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8장~)

작성자
sodam
작성일
2022-06-05 15:45
조회
769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 8~9장 / 결론
Dami 2022-06-05 16:00

8장 기계의 구성

- 외부성 태제를 노골적으로 위반하는 사이비 들뢰즈(모든 것이 어떤 보편적 일자로 다시 내부화됨- 바디우 <들뢰즈: 존재의 함성>

- 제3의 종합과 그 결과 분석: “관계 역시 하나의 기계”라는 테제와 매개는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국소적’(376)

1. 연접적 종합 (377)
- 연접적 종합은 “보편적 근거 와해(DR, 230; 292)와 다양체의 탄생(DR, 90, 133)을 수반한다.
- 각각의 관계는 하나의 기계임을 수반한다.
- 들뢰즈 ‘관계의 논리’의 두 가지 요소(관계를 항들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이해/ 관계 역시 개체, 각각의 개체가 역능이라는 의미)

- 기계는 자신이 맺은 관계들로 환원될 수 없고, 역으로 관계는 기계들로 환원될 수 없다.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은 구성요소들을 닮지 않은 특이성들을 갖춘 기관 없는 신체라는 것이다.

- 연접적 종합은 두 가지 사례가 제3의 사례을 만들어내는 합성작용이다.
[예] 나는 세차했다 / 나는 쓰레기를 버렸다. => 나는 세차했으며 그리고 쓰레기를 버렸다.
두 기계 사이의 모든 관계 역시 기계

- 들뢰즈는 바로 ‘연접적’이라는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무엇이든 두 기계 사이의 모든 관계 역시 기계임을 알려준다.

- 각각의 관계는 무언가를 대자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관계는 자신의 구성요소들로 환원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시에 실존적으로는 이들 구성요소에 의존할 것)

- 연접적 종합은 철저히 새로운 기계의 생성을 가리키는데, 그 기계는 생성된 이후로 줄곧 독자적인 연결과 되기에 관여할 수 있다(378).

- 세 번째 종합은 (...) “잔여물”의 생산을 수반한다(AO, 28).
[예] 물은 수소와 산소의 연접적 종합이고, 정당은 그 당원들과 그들의 요구들의 연접적 종합이며, 사랑은 연인들의 연접적 종합이다.
- 어느 튤립에 대한 내 느낌조차도 독자적인 환원불가능한 기계다.
- 모든 생산은 (...) 새로운 기계의 생성을 수반한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은 환원 불가능한 것, 자기의 고유한 신체를 갖춘 것을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기계와 관계 사이의 이원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든 관계가 기계이기 때문이다(379). “힘들의 모든 관계는 각자 하나의 신체 (그것이 화학적이든 생물학적이든 사회적이든 혹은 정치적이든 간에)를 구성한다. 동등하지 않은 어떤 두 가지 힘도 그것들이 관계를 맺자마자 하나의 (기관 없는)신체를 구성한다.”(NP, 40; ATP, 149; SPP, 19)
- “ 생산물은 생산과정에서 제거되거나 삭제되는 것. 생산행위와 생산물 사이에서 분리되면서 방랑하는 유목적 주체를 잔여물로 산출한다”(AO, 39). " (...) 모든 연결은 비생산적이고 환원불가능한 기관 없는 신체의 생산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게 된다." (AO, 19) (380)
- 들뢰즈는 이런 잔여 존재자를 “독신 기계‘라고 일컫는다(AO, 29).
- 모든 회집체는 다른 다양체들로부터 종합되었기에 독신 기계가 아닌 리좀은 전혀 없다.
- 각각의 기계는 독신 기계, “그 자체에 중립성과 발생적 힘을 결합하는 자율적인 형상"이다. (LS, 123)
[예] 폭풍과 사막, 역병(페스트), 이데올로기의 생성과 수명)

- ‘영원회귀’는 모든 기계가 ‘되기’를 겪는다는 점을 뜻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기계를 생성하는 각각의 관계가 그 자체로 되기를 겪는 하나의 기계라는 의미이다(380). 영원히 회귀하는 것은 새로운 것의 생산, 미래의 진정한 도래이다. 영원회귀는 생산물의 자율성, 작품의 독립성을 구성한다. (...) 영원회귀는 그 자체만으로 계열의 세 번째 시간, 본연의 미래이다(DR, 90). (381)

- 들뢰즈는 하나의 보편적 배경(‘열린 전체’)을 상정하기보다 오히려 관계들이 기계들 자체의 내부에서 혹은 기계들을 통해서 맺어진다고 주장한다(383).
- “진정한 외부적 교량”으로서 기능하는 '제3의 기계'를 제외하고 두 기계사이의 간극을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DI, 163) (383)
[예] 새, 강 : 서로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내가 그것들과 맺은 관계들 속에서 수렴한다. 새와 강에 연결되는 것은 “나 자신과 ‘구분되는’ 하나의 기계인 나의 지각”을 통해서이다.
Q: 그런데 왜 바로 세 번째 종합이 “수렴하는 계열들을 연속성의 조건 아래서 연장하면서 자신과 관련하여 이들 계열을 조직하”는가" (LS, 175; 229 참조)?

- 주체는 언제나 급하게 자신을 “이런 제3의 생산 기계와‘ 혼동하고 ”그것이 초래하는 잔여적 화해, (...) ’이것은 그것이었다‘라는 형식을 띤 완성의 연졉적 종합과“ 혼동한다(A), 29).
- 누군가가 ‘참으로’ 간호사이거나, 운동선수이거나 혹은 범죄자라는 모든 결론은 잘못되었다.
- 그 이유는 잠재적 존재가 현실적 정체성이나 관계 혹은 활동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 연접은 관계와 사물을 생산하기 위한 “주위” 혹은 “포괄자”인 환경이 선재함을 가리킨다(C1, 141). 이 환경은 그 신체의 재생산에 적합한 엄마와 같다“ (LS, 272). “다수의 엄마”가 존재한다(LS, 272). 어두운 전조(DR, 119~120)

- 생성되고 있는 하나의 회집체가 그것이 ‘지속하는’ 동안에는 존재한다(386).
- “진정한 용기(容器)는 찻잔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적 성질, 즉 맛이다." (PS, 110)

- 몇 초 전 차와 나는 이미 어떤 방에 있었다. 아직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일단 내가 차를 마시면 차와 나는 나와 차에 의해 생성된 하나의 새로운 회집체 (차 마시기/ 맛보기) 속에 함께 존재하게 되고, 그 강도는 내가 경험하는 ‘맛’으로 나에게 나타난다.

- 새와 강에 대한 나의 지각과 마찬가지로, ‘막힌 관’ 자체로 남아 있는 차가 바로 맛보기를 통해서 “열린 상자”로 번역됨으로써 마주치게 되는 대상이 될 수 있게 된다(PS, 140).

- 연접적 종합은 새로운 존재자들이 출현하게 되는 “종합적 진전”(DR, 181) 혹은 “점진적 결정”(DR, 210)을 가리키며 각각의 존재자는 연결과 수축, 기록, 되기 과정에서 더 약해지거나 더 강해질 우발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387).

- 라이프니츠와 반대로 들뢰즈의 경우에는 공가능성과 불不공가능성이 세상 안에 있다는 것이다(388).
- 우리는 암흑 물질이 현존함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현행적 한계를 극복하는 데 적절한 기계들이 구축될 때까지 그것과 마주칠 수 없다.

- 모든 독신기계는 ‘준’원인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할 수 있다(AO, 180; LS, 94).
- 독신 기계는 자신의 생성자들과 직접 마주치지 않고 오히려 특정 현실적 성질들을 갖춘 부분적 객체들 또는 의미-사건들로서 마주친다.
- 어떤 헐벗은 특수성을 갖고 있기보다 어떤 특유성을 갖추고 있는 의미-사건은 “자신의 물리적 원인과 인과성의 관계‘를 유지한다(LS, 169-70). 기계가 자신이 마주치게 되는 방식에 관여하는 상황(부차모순) (388)
- “기관들이 유기체라고 일컬어지는 합성의 관계를 맺는 것은 [기관 없는 신체]의 내부에서다”(ATP, 159).
- 독신 기계의 ‘준인과적’ 본성과 더불어 관계도 독신 기계라는 통찰을 고려하며 기계는 들뢰즈가 “역설적 존재자”(LS, 40-1, 997).
- 기계의 본질은 가변적, 기계는 “자신이 기표로서 구성하는 한 계열에서는 과잉상태에, 그리고 자신이 기의로서 구성하는 다른 한 계열에서는 결핍상태에” 있다(LS, 41). 그 이유는 관계가 일방적이기 때문이다(391).

- 내가 강을 바라보면 나의 지각은 나와 강의 마주침을 매개하는 기계이다. 나의 지각은 나로 환원될 수 없기에 나를 넘어서는 과잉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 강은 여전히 나와 나의 지각 둘 다에 의해 전적으로 교란되지 않은 채로 있을 수 있다.

- 들뢰즈의 목표는 미분적 관계에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DR, 170).
- dx는 이념이다(DR, 171).
기계의 잠재적 절반에 있는 신체는 하나이고 비생산적(신체의 생성이 그것의 고유한 푸이상스가 아니라 다른 기계들에 의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반면 욕망은 (원인으로서) 여럿이고 생산적이다.
- 잠재적 이념의 기계 관계들로의 현실화는 해상 신체의 현실화가 아니다. 그 신체는 여전히 자신의 현실적 표면의 배후에 물러서 있다(392)
- 기계의 이념 자체는 결정되지 않은 것이지만 불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회집체의 잠재적 존재. 현실적 관계들의 결정되었거나 결정될 기계의 외양과 종류가 다르며 그 외양으로 환원될 수 없다(392).
- 이념이 현실적 표현들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때 하나 이상의 다른 기계가 필요하다(393).
- 다양체들 사이에 맺어진 각각의 관계는 또 하나의 회집체를 산출하며, 그 회집체는 그것이 자신의 생성자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미분적 관계다(393).

# 여섯 번째 간주 - 트리스탕 가르시아와 형식적 사물 (397~410 참고)
- 가르시아는 존재자를 형식적 존재와 객체적 존재로 포착하는 일종의 ‘양면적 존재론’을 고수한다. (397)
- 가르시아는 모든 사물이 형식적으로는 동등하고 객체적으로는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398)
- 들뢰즈 기계 존재론과의 유사점. 모든 것이 하나의 사물로서 동등하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 들뢰즈 기계 존재론과의 차이점. 성질에도 사물성을 부여함으로서 들뢰즈보다 더 나아간다.
- 가르시아 존재론은 들뢰즈 존재론보다 더 ‘평평한’ 존재론이다. (398)
- (들뢰즈와 대조적으로) 가르시아는 고독한 사물이 어떤 의미에서도 그 자체로 실재적인 존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르시아 ‘간결성’: 다양한 실체성/본질을 거부함) (399)
- 전체로서 부분. (가브리엘과 유사하게) 가르시아는 존재 혹은 현존은 언제나 무언가 속에 존재하거나 혹은 현존할 따름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무언가 속함과 무언가임은 동등하다”
- (들뢰즈의 ‘환원 불가능성’과 비교) 무언가 속할 뿐이고 결코 고유한 그것임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떻게 환원 불가능한 것일 수 있는가? (399)
- 가르시아는 “지금의 객체”가 “몇 초 전의 객체”와 다른 객체라고 주장한다. (405)
- 가르시아 존재론에서 사실상 현존하는 것은 단 하나의 사물, 즉 관계들의 총체가 있을 따름이다. (405)
- (들뢰즈의 ‘외부성 테제’와 비교) 가르시아는 존재자를 그것 자체의 내부에서의 차이라기보다 오히려 존재자들 사이에서의 차이로 규정한다. (410)
- 기계가 무한정 증식하는 준거의 네트워크에 빠져 버리는 오류에 빠진다.

2. 리좀과 위계 (411~429)

- 기계들의 포개기 상황
- 기계는 근거 지어지지 않은 존재자이다(411).
- 기계들 사이의 다양한 긴장 관계에 집중하는 ‘리좀’
- 리좀은 개별적 본질이 언제나 이질적인 원천들에서 구성되는 방식을 강조한다. (412)
- 리좀은 여러개의 입구가 있고, 우리는 “어느 쪽으로든” 들어갈 수 있다.
- 어떤 쪽도 다른 쪽보다 낫지 않으며, 그것이 막다른 골목, 좁은 통로, 도관처럼 보이더라도 어떤 입구도 더 특권적이지 않다“ (K, 3)
- 각각의 새로운 관계 생성이 하나의 새로운 기계 생산을 수반한다. 그 이유는 각각의 관계가 그 자체로 하나의 기계이기 때문이다. ⇤ 새로운 존재자(독신 기계) (428)
- * 삼중 종합의 존재 생성 : (1) 어느 기계에 대한 성질을 띤 의미사건의 표현 (2) 이런 마주침이 그 관계가 맺어지게 되는 근거로서의 푸이상스를 변경하는 정도, 그리고 (3) 전혀 별개의 새롭고 환원 불가능한 존재자의 생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429)
- 관계가 미분적이라는 것은 단지 기계가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의 독신 기계로 출현하더라도 언제나 이미 자신의 모든 현재와 과거, 미래의 관계보다 과잉적임을 뜻할 따름이다(429)

9장 기계 존재론과 사유

1. 자아와 세계(432~
- 기계 존재론은 모든 존재자가 하나의 자아라고 주장한다.
- 모든 존재자가 지닌 기관 없는 신체의 환원 불가능한 (비)-존재 혹은 ?-존재 덕분이다(DR, 64). 모든 기계는 기계들에 의해 생성되는 하나의 기계이기에 모든 실재는 들뢰즈가 ‘수동적’ 자아라고 일컫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DR, 118).

- 세계에 풀려난 힘. 수동적. 자아는 지향적 행위를 수행할 수 없다. 수동적 자아에 대해 ‘애벌레 주체’가 존재한다(DR, 118). 한 자아의 주체는 그것의 ‘이념’이다.
- “유일한 주체는 기관 없는 신체의 욕망 자체이다.” (AO, 90)

- 실재적이지만 현실적이지 않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경험 대상이 아니다.
- 미래의 마주침이 그것의 되기에 관여함으로써 그것을 후속적으로 발달시킬 것이라는 점에서 각각의 ‘이념’은 애벌레이다.
- 어떤 ‘더 큰’ 사회적 기계에 대한 ‘기술적 기계’로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각각의 ‘이념’은 애벌레이다.
- “어떤 고정된 정체성도 없고, 영원히 탈중심적이며, 그리고 자신이 겪는 상태들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AO, 32-33)

- “외관상의 잔여적 주체” : 우리가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AO, 376)

- "개체가 자신의 고독 속에 갇혀 있기에 오히려 모든 행위자는 집단적이다“ (K, 18)
- 우리는 철저히 혼자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조직 폭력단과 같다.” (D, 9)

- 들뢰즈에 따르면 공간은 원초적으로 기계의 특이성들과 관련되어 있다(DI, 111)
- 두 가지 종류의 공간 ‘매끈한 공간’과 ‘홈 파인 공간’
- 모든 기계는 자신의 홈 파인 세계를 구성하는 현실적 의미-사건들의 연속체를 맞닥뜨리지만, 이들 홈은 그 사건들의 근저에 놓여 있는 매끈한 공간에 말끔하게 대응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은 자신의 고유한 잠재적 공간 안에서 그 자체로 혼자이고 환원 불가능하다. 동시에 기계들은 다른 기계들 안에서 함께 존재하며, 결코 일반적인 장소에 존재하지 않는다.

- ‘크로노스’는 “홀로 현존하는 현재”(LS, 77), "신체들의 행위, 그리고 물체적 성질들의 창출“과 관련되어 있으며(LS, 165), "신체들의 행위의 한계 혹은 척도”(LS, 163) "물체화의 현재가 아니라 순수 조작의 현재“ (LS, 168) "어떤 개별적 체계에 포함되는 각각의 특이점을 ‘조정한다’(LS, 77). ”한정되어 있지만 무한한 시간이다. 순환적이기에 무한, 물리적 회귀를 같음의 회귀로 활성화한다“. (LS, 61)
- 크로노스는 기계가 겪는 현실적 마주침들의 인접한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
- 크로노스는 기계들에 대한 현실적 사건들의 이행이거나 기계들이 겪는 변화이다.
- 크로노스는 기계들이 현실태로 번역되는 중에 다른 회집체들에 대해(향해) 현존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 크로노스는 신체들의 행위를 ‘한정한다’.
- 크로노스는 특이점들을 ‘조정한다’. (한 기계가 서로 관계 맺지 않은 다른 기계들과 맺은 관계와 관련 있기 때문)
- 크로노스는 그 자체로 환원 불가능한 기계들을 또 다른 기계의 인접 세계로 혼합하고 뒤섞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 크로노스는 ‘같음’의 귀환. (자신의 고유한 견지에서 다른 존재자들을 등록하는 행위를 넘어설 수 있는 기계는 없다.)
- 크로노스는 “사물들과 사람들의 위치를 정하는 측정의 시간” (ATP, 262)

- 아이온은 “한정되지 않은 과거 및 미래” (LS, 61) "성질들과 구분되는 속성들“(LS, 165) "이미 지나간 것이자 영원히 아직 오지 않은 것” (LS, 165)과 관련되어 있다.
- 아이온은 “자신의 물질을 떨쳐버림으로써 자율적인” 것이 되면서 “과거와 미래의 두 방향으로 동시에 질주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LS, 5; 62).
- 아이온은 특이성들이 존속하고 내속하는 시간(LS, 53)
- 아이온은 “단지 사유될 수 있을 뿐”이다(LS, 74).
- 아이온은 되기의 시간이거나 반현실화의 시간이다. (439)
- 아이온은 리좀의 잠재적 표면에 기입되거나 편입되는 본질의 변이다.
- 아이온은 잠재태와 관련이 있기에 현실적 성질들과는 별개의 것이다.
- 아이온은 이미 지나갔고 영원히 오지 않은 것이다.
- 크로노스와 아이온의 기계들 사이의 시간은 현실적이고 개별적으로 인접한 세계들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들과 뒤얽힌 ‘초험적 특이성들의 변경들’을 설명한다. (439)

- ‘타자’는 내가 아닌 기계일 따름이다.
- 타자는 자신의 현실적 표면들로 감싸인 또 하나의 신체에서 이루어진 특이성들의 또 다른 분배이다(DR, 260).
- 타자는 내가 생성하는 기계이자 또한 나를 생성하게 되는 기계이다.
- 내가 나 자신을 내가 생성하는 기계 중 일부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나는 타자다” (DR, 261)
- 대타자는 “나의 지각의 장 속에 있는 객체도 아니고 나를 지각하는 주체도 아니다” (LS, 307: 309)
- 대타자는 일상적 타자와는 전적으로 다른 무언가이다(LS, 317)
- 대타자는 “한 가능 세계의 표현”으로 규정한다(DR, 261; LS, 309)
- 대타자는 다른 한 기계가 기능한다고 규명하는 한 기계의 기호이다. (440)
- 대타자는 하나의 가능 세계이다. (440) 대타자는 “세계의 전환”을 공표한다(LS, 305).
- (기계들이 언제나 다른 기계들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들뢰즈는 대타자를 언제나 선제하는 “구조”라고 말한다(LS, 305)
- 그 구조_대타자는 세계를 “가능한 것들, 배경들, 주변적인 것들 그리고 전환들”로 가득 채운다(LS, 310).

- (공간과 시간이 보편적이고 균질한 매체가 아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세계는 유일한 세계일 수가 없다.
- 각각의 세계는 “어떤 수렴의 질서 안에서 무한”하다(LS, 110)
- 각각의 세계는 “유한한 에너지”를 갖추고 있다(LS, 110)
- 세계에는 언제나 자신이 알아채는 것보다 더 많은 존재자가 있다. (441)
- 존재자의 막연한 본질이 여러 존재자에 대하여 여러 방식으로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에(LS, 114) 동일한 존재자가 여러 세계의 부분일 수 있다. (441)
- 유일한(the) 세계는 현존하지 않지만, 하나의(one) 실재가 존재한다. (442)
- ‘하나-전부’ (WP, 35)
- (실재가 기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고 기계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라는 실재는 분열증적이다. (444)

# 일곱 번째 간주 - 브뤼노 라투르의 환원 불가능한 행위소 (444~459)
* 라투르
- 실재가 환원 불가능한 존재자들과 그것들의 상호 연합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간주한다.
- (‘자아’와 ‘세계’라는 개념 재규정) 들뢰즈와 라투르의 유사성은 매우 강하다. (444)
- 객체지향 존재론과 경험론 사이의 관계 주목. 경험적 작업을 경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오류)추리에 의존하는 것을 (들뢰즈와 같은 방식으로) 비판하고 있다.
- 들뢰즈의 외부성 태제와의 유사성과 기계 태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천연성이 존재한다. (447) ⇤ 라투르의 <행위소 이론>
- 하먼의 경우, 라투르 철학이 행위소가 긍극적으로 그것이 다른 존재자들과 맺은 관계(즉, 다른 존재자들에 미치는 영향)로 환원되는 하나의 관계주의임을 시사한다. (451) 라투르의 입장은 내부주의와 관계주의에 붙어 다니는 모든 문제 (변화를 설명하지 못함. 특화의 무한 유예, 기타 등등)의 포로가 된다.
- 경험론 관련 비교. 라투르는 자신의 작업에 있어 경험적 탐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들뢰즈는 ‘초험적 경험론’을 요청한다. (455) 기계들의 현존, 기계들이 다양한 종합에 연루된 사중체라는 것은 존재론적 태제이지만, 어떤 기계들이 현존하고, 그것들이 어떤 역능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이 서로 어떤 유대들을 맺고 있는지는 단지 경험적으로 규명될 수 있을 뿐이다. 이점에 대해 라투르의 최근 출간 <존재양식들에 관한 탐구>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456)
- 들뢰즈 경험론과의 차이점. 라투르의 환원주의와 관계주의. 라투르의 경우, 사물들을 초월적이거나 포괄적인 구조로 환원하고자 하는 경향(들뢰즈)이라고 비판. 그러면서도 모든 존재자가 기계론적 자연법칙의 수동적 실행자로 환원될 수 있는 ‘자연적’ 영역과 모든 것이 주권자 인간의 자유로 환원되는 ‘문화적’ 영역으로 분할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그런데 들뢰즈의 경우, 환원주의가 어떤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오류추리들'에 뿌리 박고 있다. (458)

2. 플라톤주의와 오류추리

- 기계 존재론은 존재자들에 관한 이론을 체계적으로 개관. “플라톤주의 극복하기” 달성하기를 바란다(DR, 59; LS, 253).
-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것은 완전한 현전과 환원주의, 관계주의의 모든 흔적을 제거하는 것이다. 단순하고 안정적이고 영원하고 일반적인 본질들을 제거하고서 ‘가변적인 특이성들의 개별적 분배들로 대체하는 것이다(LS, 53).
- 기계 존재론의 목표는 “회상 (그리고) 안정적 본질의 목표로서의 이데아”를 “‘질적 전환’과 ‘상호 융합’을 겪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념”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459)

- 플라톤 주의 : 일부 혹은 모든 존재자의 존재가 이차적이라는 테제를 옹호하는 철학을 ‘플라톤 주의’라고 일컫자(LS, 255).
- 플라톤 주의는 내부주의이다.
- 이데아적인 것 혹은 비물체적인 것은 이제 ‘효과’에 지나지 않게 된다(LS, 7).

- 오류추리 : 무의식의 본성에 대한 잘못된 해석 (들뢰즈는 모든 존재자가 잠재적인 ‘이중’ ‘무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함)
- 오류추리는 (그것이 경험과 사유 자체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사유에 의해 폭로될 수는 있지만 결코 제거될 수는 없다. (461) 그러므로 오류추리는 사유가 자체적으로 극복하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대상을 제시한다. (462)
- 들뢰즈의 경우 모든 오류추리는 “동일한 오류 주위를 공전한다”(AO, 132), 그 오류는 ‘잠재적인 것’에 의거하여 생각하고, 존재론적인 것을 ‘실존적인 것’에 의거하여 생각하며, 초험적인 것을 ‘경험적인 것’에 의거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 5가지 오류추리 제시. 이 오류추리들은 직접 경험의 본성과 더불어 존재자의 초험적 존재는 단지 사유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해서 언제나 우리가 플라톤주의의 변양태들, 즉 환원주의와 관계주의로 되돌아가도록 유혹하는지 예증한다. (467)

(1) ‘외삽’이라는 오류추리 (462~463)
- 연결적 종합의 두 가지 사용, 즉 포괄적이고 특정적인 사용과 부분적이고 불특정적인 사용“사이의 대립과 관련되어 있다(AO, 88). ⇢ 객체주의
- 단절과 인접성 원리에서 비롯된 결과로서 경험되는 존재자들 사이의 상사성에 의해 초래된다. (그러나 기계 존재론에서 모든 관계는 부분적 객체와의 연결관계, 기계의 잠재적 존재의 현실적 표현이자 잠재적 존재와 종류가 다른 현실적 의미-사건과의 연결관계이다. 부분적일 뿐만 아니라 ‘불특정한 것’이다. (462)
- 외삽이라는 오류추리는 어떤 지정된 성질이나 개념 혹은 소속이 또 다른 기계의 존재를 정확히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 외삽이 협소하게도 한 존재자의 존재를 단 하나의 관계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특정적’이다.

(2) ‘이중구속’이라는 오류추리 (463~464)
- 기록의 이접적 종합과 관련이 있으며(AO, 133), ‘외삽’오류추리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킨다.
- 한 존재자의 존재를 하나의 특권적 관계와 동일시한 후에는 그것의 여타 관계와 행위를 하나의 특별한 성질의 표현들로 해석하는 것이 사리에 맞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이접은 배타적인 것이 된다(AO, 94).
-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행하는 모든 것은 여전히 동일한 하나의 특정한 특질의 변양태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3) ‘적용’이라는 오류추리 (464~465)
- 연접적 종합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AO, 133)
- 한 존재자의 존재와 행동을 단 하나의 성질(한정된 일단의 성질)과 동일시한 다음, 한 주체에 (모든 행위주체성을 부여하지 않고) 그것의 모든 행위를 결정하고 초래하는 것으로서 어떤 “상징적 조직자”를 지정하는 것이다(AO, 111).
- 세 번째 종합에 합축된 “다의성”은 “일대일 대응성”으로 환원된다(AO, 127).
- 모든 참신성은 새롭고 환원 불가능한 존재자를 수반하는 새로운 관계라기보다는 오히려 동일한 유희의 변양태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된다. 그리하여 독신 기계와 미분적 관계들의 논리에 함축된 ‘노마디즘’은 ‘분리’로 대체된다.
- 모든 것이 하나의 불가피한 조직자에 본질적으로 귀속된다면 아무것도 결코 무언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정신분석적 오류 뿐 아니라 모든 관계주의와 환원주의의 중핵이다(AO, 125).
- 생겨나는 모든 것은 특권적 조직자들에 ‘적용되’며, 그리하여 환원 불가능한 사중체들과 그 되기들의 다양체는 사건의 세 가지 요소(두 개의 항과 하나의 관계)가 언제나 제3의 존재자(상징적 조직자) 혹은 구조에 의해 엄격히 과잉결정되고 그것의 재현에 불과한 것들이라는 단순한 견해로 환원된다.

(4) ‘전치’라는 오류추리 (465~466)
- 이전 세 가지 오류추리의 결합 효과의 변양태이다(AO, 138)
- 한 존재자를 어떤 관계 속에 계속 두는 것은 힘을 가하는 것의 문제. 즉 우리의 “능력” 덕분이라 생각한다.
- 기계 존재론에서는 이 문제는 단지 잠재적 코드가 현실적 표현들과 종류가 다르다는 테제에서 이해된다. (어떤 관계가 맺어지거나 유지되거나 혹은 끊어질 수 있는 지점마다 무언가가 언제나 발생하고 있다.)
- (그러나) ‘전치’ 오류추리에서는 초험적으로 생각해야하는 국면에서 경험적으로 생각한다.
- (힘의 행사가 욕망의 과잉적이고 잉여적인 본성이라는 생각대신) 관계가 힘을 포함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5) ‘나중’이라는 오류추리(466~467)
- 욕망적 생산(세 가지 종합에 따라 접속-되기-생성하기)이 언제나 현실태를 포함해야 한다는 관념이 전도된 것이다.
- 존재자의 존재와 되기가 무언가 현실적인 것이 구성된 ‘이후에’ 나타나며, 한 존재자가 생성될 수 있으려면 무언가가 현실적으로 발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오류추리
- ‘나중’ 오류추리는 현실태 자체가 자신의 고유한 잠재태에 준거를 두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 ‘나중’ 오류추리는 모든 형태의 지루한 유물론의 배후에 잠복하여 있다. (467)

3. 초월적 경험론

- 초월적 경험론은 들뢰즈의 기계주의 존재론에 의해 함축된 사유 방법과 그의 포괄적인 철학에 대한 적절한 명칭이다. (468)
- “복수주의(경험론)는 (...) 철학에 의해 고안된 사고방식인데, 즉 구체적 정신에 있어서 자유의 유일한 보증자이자 격렬한 무신론의 유일한 원리이다(NP, 4; PS, 4).
- 들뢰즈의 (복수주의적) 초월적 경험론을 “실재적인 것에 비해 너무 일반적이거나 너무 큰” 칸트주의적인 초험적 철학에 대립시킨다(DR, 68).
- 칸트의 초험적 주체성이 철저히 내부주의적인데 반해, 초험적 경험론은 분열증적 실재에 관한 이론에 뿌리박고 있는데, 이기서 존재자는 자신의 고유한 가변적인 초험적 본질, 즉 그것이 자신의 세계와 마주칠 때 의거하는 내부적 ‘물질’을 갖춘 기계이다. (468)
- 인간의 유한성과 사유의 힘과 관련하여 들뢰즈는 칸트주의적이다. (468)

- 관계와 항의 외부성으로 인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유한한 존재자다. 우리는 오로지 타자의 연장적이고 현실적 표현을 그것의 잠재태에 대한 기호로 간주함으로써 타자의 내부에 관해 알 수 있게 될 뿐이기에.. 그러므로 초험적 경험론이라 지칭된다.

- 사유는 존재자가 작동하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존재자가 개별적인 초험적 실재를 갖추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지만 이런 초험적 실재를 우리에게 현시하게 할 수는 없다.
- 사유는 어떤 특정 사례에서 이런 실재가 어떠한지 우리에게 제시할 수 없다. (한편, 과학은 확정된 환경 아래서 기계가 어떻게 현시되는 지에 대하여 엄청나게 정확한 설명을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을 예시한다. 그런데도 어느 존재자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믿음직한 서술 혹은 경험조차도 그것이 존재를 대신할 수 없다. (469)

- 들뢰즈는 (우리가 모든 기계와 공유하는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사유에 어떤 특권을 부여한다.
- 사유는 결코 현시될 수 없는 것, 즉 존재자의 환원 불가능성과 초험적 본성을 생각할 수 있다.
- 사유는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 “감각적인 것의 존재”를 고찰할 수 있다(AO, 237).
- 들뢰즈는 종종 ‘사유’보다 ‘느낌’에 특권을 부여하는 철학자로 제시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470)
- 들뢰즈가 서술하는 대로 과잉적이거나 헤아릴 수 없는 것(욕망)은 “생각하는 영혼만이 구상할 수 있을 뿐이고(CI, 47), 신체 혹은 ‘원자’는 사유만이 다룰 수 있을 뿐이며(LS, 258), 본질은 순수 사유만이 파악할 수 있을 뿐(DR, 140, 143)이기에 순수 사유는 본질에 관한 능력이고(PS, 86), 그리하여 사유는 의식에 현시되는 사물들의 외양에 불과한 것을 넘어설 수 있다(SPP, 18).
- 사유는 의식에 현시되는 사물들의 외양에 불과한 것을 넘어설 수 있다(SPP, 18). 이런 까닭에 철학에 관한 한 “오직 지성만이 진리를 추출한다” (PS, 23)
- 그런데 (기계를 생각할 때) 사유는 자신의 한계와도 마주친다. 사유는 단적으로 경험한 것이 결코 초험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 어떤 특정한 ‘이념’도 결코 “회상의 종착점”으로서 그리고 “고정된 본질”로서 직접 입수될 수 없다(PS, 109).
- 각각의 이념은 자신의 잠재태로 물러서 있으면서 독자적인 “질적 전환”을 겪는다(PS, 109).
- 사유의 무능력. 자신의 고유한 자연적 ‘무능’ 때문에 사건에 관한 모든 가능한 서술은 기계 존재론을 벗어난다. “우리가 서술하는 국면 (...) 생산의 물질적 과정, 생산물의 특유성은 증발하는 경향이 있다(AO, 37). [언어는 ”끊임없이, 결코 멈춤이 없이 자신의 지시 대상 위에서 미끄러진다“ (LS, 2)
- 사유도 지각도 기계이다. 모든 관계와 마찬가지로 개념들도 상징들도 그 자체로 기계들이다(AO, 36; DR, xx~xxi; LS, 60, 87)

- “가면들이 가리는 것은 다른 가면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DR, 17)
- 지식이라 일컫는 것은 (1) 어떤 존재자를 생성하는 현실적 구성요소들과 관련이 있다. (2) 어떤 존재자가 무언가 다른 것을 생성하면서 수행하는 현실적 역할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어떤 기계의 잠재적 존재 자체를 규명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 존재자를 생성하는 것의 기능적 가면이거나 그 존재자가 생성하는 것의 기능적 가면이다.
- 존재론은 어떤 기계들이 현존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의 내부적 존재는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침묵한 채로 있어야 한다. 존재론은 모든 존재자가 삼중종합에 관여하는 사중기계라는 점에서 “동등하게 실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473)


* 우리가 ‘기계’를 감지할 수 있는 몇 가지 특징들 (475)
(1) 창발이 존재한다.
- 기계는 자신의 생산자들로 환원될 수 없기에 우리는 그것의 ‘고유한’ 표현들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다.
[예] 물은 대략 섭씨 100도에서 액체이자 기체인데, 이것은 수소와 산소의 면모가 아니다.

(2) 과잉성이 존재한다.
-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차이로 인해 한 기계가 자신의 생성자들과 맺은 모든 관계가 그 기계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기계에 대해 생성선자들과 생성물들을 선택적으로 추가하고 제거하며 무엇이 그 기계ㅔ에 고유하게 ‘머무르고 있’는지 관찰하는 실험을 수행할 수 있다(과학 실험에서 숙달하고자 하는 실천이다).

(3) (종종 기관 없는 신체의 한 가지 면모에 해당하는 생성자 역할로의) ‘회귀’가 존재한다.
- 기계는 ‘회귀’하여 자신의 고유한 구성요소들의 생성자가 되고, 그 과정에서 그것들의 되기(예: 종교집단에 소속)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그것들을 변화시킨다.
- 자신의 부분들에 미치는 이런 영향은 기계를 감지하고 기계의 존재양식에 관한 지식을 얻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4) 저항이 존재한다.
- 각각의 기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힘이기에 그것을 ‘움직이’게 하려면 언제나 힘이 필요하다. 힘이 가해지는 모든 경우 기계는 저항할 것이다.

(5) 특유한 부분들의 생성이 존재한다.
- 무언가가 생성되는 모든 경우에 어떤 기계가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 결론
* 존재론과 불연속성 (482~487)
- 간과된 기계 존재론을 재구성
- 동시대 다양한 객체지향 철학들과 비판적으로 비교 고찰

- 사중체론 : 각각의 ‘기계’는 네 가지 측면이 있다. (p.91 도식 참고)
- 외부성 테제: 기계들의 잠재적 측면들이 결코 직접 만나지 않음을 가리킨다.
- 불연속성: 기계 존재론의 특징

* 들뢰즈와 객체지향 철학 (488~490)
- 들뢰즈의 기계 존재론은 사변적 실재론이자 객체지향 존재론이다.
- 내부주의 객체지향 철학 비판: (1) 브라이언트, 데란다 (2) 경험주의 과학 분석 (3) 가브리엘, 가르시아, 라투르의 관계주의 [7개 간주 참고]
-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한 들뢰즈는 객체지향 존재론의 진영에 속함이 분명하다. (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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