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통행로> 122-164 발제입니다.

작성자
etranger
작성일
2018-10-19 18:25
조회
73
유진님하고 겹치지 않는 부분들 몇 개 골라서 적어봤습니다.

조금 지각할 것 같네요.

곧 뵙겠습니다.



피렌체 세례당 (128)

“교회 현관에 안드레아 피사노의 ‘희망’이 그려져 있다. 그 희망은 앉아서 손이 닿지 않은 어떤 열매를 잡으려고 팔을 들어 올리고 있지만 잡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희망은 날개를 갖고 있다. 어떤 것도 이보다 진실할 수 없다.”

‘피렌체 세례당’의 단상에서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을 떠올렸다. 이 그림의 천사는 등을 돌린 채 무언가 응시하며 날갯짓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를 향해 거침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떠밀려 간다. 천사가 그토록 절실히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과거의 잔해로 남겨진 부산물들이다. 천사는 죽은 자들을 살리고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결합하고 싶어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력함 앞에서 필사적으로 날개를 저으며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이다. 거리 산책자로서의 벤야민의 시선 또한 여기에 가닿아 있다. 모든 것을 획일화 시키고 지워버리는 근대 대도시에서 벤야민은 버려진 사물의 의미를 추적하는 ‘새로운 천사’다. “시선은 한 인간의 마지막 남은 부분이다.”라는 말처럼 그는 자본주의의 강풍을 막아낼 수 없지만, 필사적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기록한다. 그의 존재 또한 말끔한 거리와 제도권 학계의 부산물이었다.

사무용품 (139)

“사장의 방은 무기로 가득 차 있다. 그 방에 들어서는 사람을 편안함으로 감싸는 것은 사실은 잘 포장된 무기고다. 책상에 놓은 전화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 중요한 대목에서 말을 끊게 만든다. 이때를 이용해 그는 어떤 대답을 할까 머릿속에서 궁리한다. (…) 비서가 기록카드를 책상 위에 죽 펼쳐놓으면 손님은 그 속에서 자신이 상이한 관련망들 속에 범주화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곧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불빛을 등지고 있는 사장은 빛에 환하게 노출되어 있는 그의 얼굴 표정에서 그것을 읽어내곤 만족스러워 한다. (…) 이제 조만간 무엇인가가 제거될 것이다.”

벤야민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유년기 이후 대부분의 삶은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한 논문이 심사에서 거부되어 교수 자리를 단념해야 했고, 생활 노동에 있어서도 무력했다. 생계를 위해 소장하던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를 골동품점에 팔아야 했고, 변변찮은 제도적 지원조차 받지 못했기에, 홀로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자신의 철학을 쌓아야 했다. 어쩌면 ‘사유의 유격’이라 표현되는 벤야민의 비약적이면서 압축된 글쓰기들은 이런 환경적 요인에서 기인한 측면도 있지 않았을까? 그의 삶 자체가 끊임없이 ‘유격’을 벌이며 떠도는 삶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사무용품’에서 묘사된 풍경에서 철저히 ‘을’일 수밖에 없는 자의 불안함이 느껴진다. 사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는 잘 정돈된 사무실이 ‘잘 포장된 무기고’로 느껴질 것이고, 대화 도중 전화가 울리는 타이밍에 어떻게 협상을 할지 고민할 것이며, 비서가 펼쳐놓은 기록카드에 범주화 된 자신을 보며 언제든 ‘치과’에서 충치를 제거하듯 버려질 수 있음을 직감할 것이다. 요컨대 그 또한 ‘사무용품’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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