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9/29 『스크린의 추방자들』 실종자들 pp.179~203

작성자
bomi
작성일
2021-09-29 18:03
조회
537
삶과 예술 세미나 ∥ 2021년 9월 29일 수요일 ∥ 손보미
텍스트: 『스크린의 추방자들』히토 슈타이얼 지음, 김실비 옮김, WorkroomPress, 2016 pp.179~203


<실종자들: 얽힘, 중첩, 발굴이라는 불확정성의 현장>

1
1935년, 슈뢰딩거가 사고 실험으로 고안한 상자 속에서 치명적인 방사선을 쪼인 고양이는 두 마리가 된다. 산 고양이, 죽은 고양이. 상자가 닫혀있는 동안 고양이의 중첩상태는 지속된다. 이 사고 실험은 상호 배타성을 불가능한 공존, 소위 불확정성의 상태로 대체했다. 중첩, 그러니까 불확정성을 타파하는 것은 관찰행위다. 관찰은 계측하고 식별함으로써 대상에 개입하고 관여한다. 양자역학의 주요 성과 중 하나는 능동적으로 형성되는 현실 안에서 관찰자의 역할에 대해 인정한 것이다.

2
실종 상태는 슈뢰딩거 이전 논리학의 개념적 도구로써는 이해될 수 없는, 역설적인 중첩을 다루는 듯하다. 실종(자취를 잃음; 식별되지 않음)은 삶과 죽음의 불가능한 공존에 접근한다. 관찰자가 불확정성의 ‘상자’를 열기 전까지. 이 상자는 대개 무덤이다.

3
2010년, 스페인의 가르손 검사는 스페인 내전 기간 발생한 실종, 학살, 납치 혐의 조사에 착수했다. 모두 법의 심판을 전혀 받은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중첩상태를 건드린 것이다. 그는 즉각 논란에 봉착했다. 가해자 대부분이 이미 사망한 뒤였는데, 그들의 죄를 조사하기 위해서 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주장해야 했다. 가해자뿐 아니라 모든 실종자도 살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야 했다. 잠재적으로 죽은 혹은 살아있을 실종자가 법적인 양자적 상태 안에 얽힌 채로 있게 되었다. 이러한 불확정성의 상태는 사건이 공개된 채 조사가 진행될 수 있게 했다.

4
중세 왕의 신체는 자연적 신체와 정치적 신체로 나뉜다. 자연적 신체는 유한하지만, 정치적 신체는 불멸의 존재다. 왕이 군림하는 동안 이 두 상태는 중첩되었다. 이러한 왕의 쌍둥이 신체 관념은 주권 개념 발달에서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주권이란 죽음과 영원히 중첩된 지배 권력이다. 양자물리학의 사고 실험은 20세기에 주권을 표명하는 새로운 실험 형식들과 공명하고 있었다. 인종 말살, 차별, 테러. 생과 사의 중첩은 20세기 다양한 형식의 정권에서 표준적 특성이 되었다.

5
2011년, 스페일 내전의 집단 매장지. 영아의 사체가 암살당한 공화주의자의 사체 위에 매장되어있었다. 세례받지 못한 아기는 고성소에 같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죽은 영유아는 원죄의 사함을 받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 것이었지만, 동시에 죄를 지을 시간이 없었으므로 형벌은 가벼우리라 여겨졌다. 고성소는 구원과 저주, 지복과 고문 사이의 중간 단계. 고성소는 영원한 권태와 절망의 장소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사물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성립시킴으로써, 지복의 단계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 아기는 반란자로 사살당한 사체 위에 유기됨으로써 그들 자체가 미해결된 사물이 되었다.

6
2011년 라이프니츠 두개골의 석고 모형이 하노버에서 전시되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의 진위를 의심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세계는 모나드로 구성되며 각각의 단자는 우주의 전체 구조를 담는다. “향구적으로 생존하는 우주의 거울”. 그러나 모나드는 다양한 정도의 해상도를 지닌다. 뼈, 두개골등. 증거물들은 마치 모나드처럼 그 자체의 역사뿐 아니라 불투명하고 미결된 형식으로 다른 모든 것 또한 응축한다, 신만이 모든 모나드를 읽을 수 있다. 인간은 모나드 안에 결정화된 시간의 몇 가지 층위를 해독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두개골.

7
슈뢰딩거의 상자 속에 고양이가 살아있을 확률은 절반이지만, 정치 실험실 속 인간이 살아있을 확률은 극단적으로 낮다. 이 실험실은 삶과 죽음의 중첩이 아닌 죽음의 중첩을 위한 현장이다. 시체 위의 시체. 20세기에는 대량 학살을 위한 무기 발달과 함께 관찰이라는 살상 방법 을 완성했다. 골상학, 통계, 생체 실험. 이러한 발달은 왕의 두 가지 신체라는 정치적 관념의 종말이기도 했다. 이제 자연적 신체뿐 아니라 정치적 신체까지 사망했다. 민족(인종, 국가)의 ‘유기적인 신체’에 대한 모든 관념은 대학살과 인종 말살로 고통스럽게 실현되어야 했다. 공동 묘혈은 전체주의와 기타 독재 형식의 정치적 신체 ‘그 자체’였다. 그것을 생산하는 ‘공동체’란 ‘가짜fausse 코뮌’이며, 합법성을 위해 경쟁하는 완벽하고도 처참한 가짜임을 명명백백히 드러냈다.

<질문>
- fausse의 구체적인 의미는? 거짓의, 허위의, 아첨하다(파파고)
- 위 글의 ‘전체주의와 기타 독재 형식’은 무엇을 전제로 쓰인 것일까? 독일 나치 정권, 스페인 군부 독재, 민족주의….

8
얽힘의 상태는 한시적이다. 집단 매장지의 발굴과 함께 불확정성 상태가 끝났을 때 확률은 압도적으로 죽음 쪽으로 치우쳤다. 실종자들의 신원 확인. 뼈가 사람으로 재변신하여 언어와 역사에 재등장하면서 그들에게 적용되었던 법률의 마법은 (법적인 양자적 상태) 중단되었다. 하지만 자금 부족으로 인해 아직 신원 미상의 두개골과 뼈가 많다. 그것들은 신원만 빼고 모든 것을 발설한다. 사후 외상, 키, 성별, 나이, 영양 상태의 지표. 이름과 얼굴이 없는 신원 미상의 유해들은 다른 증거물들(총알, 시계, 동물, 신발밑창...)과 뒤섞여 있다. 그 불확정성은 그들 침묵의 일부다. 그들이 폭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친인척, 가족, 소유의 세계에 재입장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재입장을 거부하는 그 질서가 바로 그들을 처형한 질서이므로. 그들은 시민적 정체성, 재산, 지식의 질서, 인권의 영역을 위반하며 우직하게 사물로 남는다.

9
2011년, 휘스뉘 일드즈는 1997년 좌파 게릴라로 투쟁하던 중 실종된 형제의 발굴을 요구하는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형제의 무덤은 터키 쿠르드에 있는 집단 매장지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정부 부처가 유전자 검사에 착수하지 않아 결국 그것이 진짜 자기 형제의 시신인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사이 일드즈는 수습된 열다섯 명, 그리고 수천 명의 실종자가 모두 자신의 형제자매라 선언했다. 유해의 불확정성은 가족 관계를 보편화한다. 그 유해들은 가족주의의 질서를 파열하여 넓게 개방한다.

10
공동무덤을 발굴할 때 흔히 발생하는 일: 하나의 유골에서 온갖 개인 물품들(구두 굽, 단추, 동전, 벨트 장식 등)이 발견된다.

11
20세기 이후, 우리는 실종자들이 확률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생존하고 있는 양자 상태에 접속하고자 헛되이 기다려왔다. 이 또 다른 양자 상태에서 살종자들은 자신의 죽은 신체가 아닌 우리의 살아 있는 신체와 얽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정체성과 소유의 범주를 벗어나서 불확정적 상호작용으로 얽힌 사물들일 것이다. 양자적 현실의 역설적 객체성에 고정될 것이다. 포옹하는 질료.

12
나의 친구 안드레아 볼프의 유골이 터키의 집단 매장지에 묻혔을 것이라 한다. 안드레아와 쿠르드 노동자당 투사들이 비합법적으로 처형되었다는 증언이 있었으나 공식 조사 허가가 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중첩을 깨뜨릴 수 없다. 지금으로써는 까맣게 탄 사진 필름 한 통만이 1998년 전투의 유일한 증인이다.
비가시성은 정치적으로 구성되고 인식론적 폭력으로 뒷받침된다. 그러나 이 판독 불가능한 이미지를 우리는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빈곤한 이미지, 즉 폭력과 역사로 난파된 사물로 바라보는 것이다. 빈곤한 이미지는 미결 상태로 남은 이미지다. 이러한 이미지는 자신이 재현한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대해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빈곤한 이미지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가려진다면, 그 자체의 가시성의 조건이 가시화된다.
상업적, 정치적, 군사적 이해는 지표면 위성사진의 해상도뿐만 아니라 지표 밑에 묻힌 사물(뼈와 총알, 불탄 사진 필름….)의 해상도 또한 결정한다. 불가해한 증거 조각들. 이 불확정적 사물은 저해상도 모나드다. 정치적, 물리적 폭력의 석화된 도표, 즉 그 사물의 생성 조건을 담은 빈곤한 이미지다. 그 이미지의 빈곤은 결여가 아니라, 형식에 대한 추가적인 층위의 정보다. 이 형식은 그 이미지가 어떻게 취급, 공개, 전달, 무시, 검열, 삭제되는지 보여준다. 불탄 필름은 특정한 불확정성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폭력을 방증한다. 이러한 빈곤의 이미지는 재현의 영역을 넘어서 사물과 인간, 삶과 죽음, 정체성의 질서가 유예된(미결된) 세계에 도달한다.
라이프니츠의 글에서 우주의 만물을 읽는 궁극적 관찰자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는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지 않다. 관찰의 과업을 그에게 맡겨버릴 수 없다. 0으로 수렴되는 확률의 지대는 많은 경우 형이상학적 조건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다. 폭력, 혼란, 쇠퇴, 특권, 독점. 그리고 끈질긴 무관심. 기술적 패러다임이 이 지대의 해상도를 관리한다. 익명의 뼈는 두 가지 해상도로 비춰질 수 있다. 빈곤한 이미지로 한 번, 선명한 공식 증거로 한 번.
실증주의는 인식론적 특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특권은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이 더 우월한 해상도의 증거라는 생각은 엉성하고 편리한 생각일 뿐이다. 정의의 여신은 해상도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손가락은 우툴두툴하고 반짝거리는 이미지, 저해상도 모나드 위를 쓰다듬으며 그 지질학적 윤곽을 파악하고, 상처를 감지하고, 불가능은 가능하며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 굳게 믿을 것이다.

<토론> 라이프니츠의 신에 대비되는 정의의 여신에 대해
전체 0

전체 483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공지사항
[SF읽기] SF의 전환; 도약 - 7월 26일 시작! (2,4주 수요일, 저녁7시)
bomi | 2023.07.16 | 추천 0 | 조회 2844
bomi 2023.07.16 0 2844
공지사항
세미나 홍보 요청 양식
다중지성의정원 | 2022.01.11 | 추천 0 | 조회 2453
다중지성의정원 2022.01.11 0 2453
공지사항
[꼭 읽어주세요!] 강의실/세미나실에서 식음료를 드시는 경우
ludante | 2019.02.10 | 추천 0 | 조회 5527
ludante 2019.02.10 0 5527
공지사항
세미나를 순연하실 경우 게시판에 공지를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ludante | 2019.01.27 | 추천 0 | 조회 5193
ludante 2019.01.27 0 5193
공지사항
비밀글 <삶과 예술> 세미나 참가자 명단 - 2019년 1월
다중지성의정원 | 2018.02.25 | 추천 0 | 조회 55
다중지성의정원 2018.02.25 0 55
475
4/3/ 세미나 공지, 필립 K.딕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chocleda | 2024.03.22 | 추천 0 | 조회 58
chocleda 2024.03.22 0 58
474
3/13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읽을 거리
bomi | 2024.03.13 | 추천 0 | 조회 27
bomi 2024.03.13 0 27
473
3/13 세미나 공지_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bomi | 2024.03.11 | 추천 0 | 조회 52
bomi 2024.03.11 0 52
472
2/28(수) 구드룬 파우제방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토론거리
chu | 2024.02.28 | 추천 0 | 조회 100
chu 2024.02.28 0 100
471
[SF읽기] 2/28(수) 구드룬 파우제방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세미나 공지
chu | 2024.02.25 | 추천 0 | 조회 101
chu 2024.02.25 0 101
470
1/14(수)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kindred)>(1979)
희정 | 2024.02.13 | 추천 0 | 조회 92
희정 2024.02.13 0 92
469
1/31 [체체파리의 비법] 읽을 거리와 토론 주제 발제
chocleda | 2024.01.31 | 추천 2 | 조회 153
chocleda 2024.01.31 2 153
468
1월 31일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체체파리의 비법> 세미나 공지
chocleda | 2024.01.17 | 추천 0 | 조회 143
chocleda 2024.01.17 0 143
467
10일 세미나를 17일로 순연합니다!
bomi | 2024.01.10 | 추천 0 | 조회 182
bomi 2024.01.10 0 182
466
1/10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자료와 토론거리
bomi | 2024.01.09 | 추천 0 | 조회 201
bomi 2024.01.09 0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