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본을 찾아서2> 14장 메이지 문화_ 711p~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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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k
작성일
2022-08-31 23:21
조회
363
<현대일본을 찾아서> 14장 메이지 문화_ 711p~ 발제자. 유현숙

메이지 시대의 역사는 근대 국민국가 형성기의 시대 구분과 거의 일치한다. 새로운 제도가 수립되는 과정, 그다음에는 그것이 정치, 경제, 외교분야에서 실행되는 시기, 그리고 결국 전쟁을 도발하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는 19세기 말엽으로 구분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메이지 문화는 시대별로 파악하기가 훨씬 어렵지만, 그것에 대한 연구를 통해 당시에 진행되고 있던 사회적 변용과정의 핵심적 차원을 파악할 수 있다.
일본이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근대세계의 도구들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분명하지만, 문제는 적절한 도구들을 취사 선택하고, 그 도구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전통적 요소들이 무엇인지 모색하는 것이었다.
1902년에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일기에 일본이 30년전에 깨어났다고 하지만 사실 일본은 완전한 혼돈이었다.
서둘러 서양 문화를 흡수하려 했고, 그결과 그것을 소화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일본은 문학, 정치, 산업, 그밖의 모든 분야에서 진정으로 깨어나야만 했다.. 이것이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 예술가, 사상가들이 스스로 설정한 목표였다.

1. 복고
도쿠가와 후기 문화의 여러 측면이 메이지 시대의 노력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당시 중국에서 수입한 유교문화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운동과 함께 진정 본질적으로 일본적인것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씨름하면서 일본문화를 재정의하고 있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토착의 신과 신화에 대한 강조는 자연을 신성시하는 세계관을 만들어냈고, 자연스러운 것이 진실하고 좋은것의 기준으로 회복 되었지만 메이지 지도층에 의해 신도의 신정을 구현하려는 시도는 거부 되었다. 하지만 천황제 만은 예외였다 그들의 권력이 천황의 주권에 의거하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문화적인 면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옛 문물에 대한 긍정이 물질적 근대화에 대한 거부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무사의 통치와 중국 지향적인 세계관, 불교에 대한 박해도 복고운동에 뿌리를 둔 것이었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생활의 중요한 일부를 박탈당한 서민들의 경악과 분노를 표출했고, 수많은 폭동을 일으켰으며, 이는 19세기 말까지 골치 아픈 사회문제가 되었다.

2. 문화개화! 입신출세!
고제를 활용하는 일이 정치적 상징이나 의식을 위해 중요했던 것만큼, 일본의 대다수 젊은이를 강하게 자극한 것은 서양을 본받아 일본을 근대화하고 개인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일념이었다.
이 목표는 메이지 초기의 개혁에 대한 열정과 낙관주의를 표출하는 문명개화와 입신출세로 표현되었다. 일본이 근대세계의 물질문명에 뒤늦게 합류한 탓에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으며, 실제로 부유한 국가들 틈에 낀 가난한 나라라는 정확한 상황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입지를 다져야 했고, 일본시민이 각자의 본분을 다해야만 했다. 지식인들은 사회를 개조하겠다는 이상주의적 확신을 공유하고 있었고, 서양에서 교육받은 지식인들은 대단히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p717)

3. 그리스도교
이와쿠라 사절단은 일본의 그리스도교 금지령 때문에 해외 순방중 비난과 칠책에 시달렸다. 이를 계기로 메이지 정부는 1873년에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폐지 했다. 1859년에는 네덜란드계 미국인 성직자 귀도 버벡 이라는 인물이 나가사키에 도착해 선교활동을 하며, 사쓰마, 조슈, 도사 사가 출신의 젊은 사무라이들과 함께 일하며 훗날 일부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젊은이들은 구마모토 밴드라 불리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보여준 인물 : 1. 귀도 버벡, 2. 윌리엄S. 클라크 3. 조지프 헵번
그리스도교는 정신의 자율성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메이지 시대의 지적 풍토에 중요한 자극제였고, 사회개혁과 정치변화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80년대에 그리스도교 열풍은 대단하였으나, 10년 뒤에는 이 조류가 180도로 바뀌어 1880년대 후반에 고조된 보수주의 물결은 이런 추세를 견제하고 되돌리기 시작했다. 불교 지도자들은 발언권을 회복했고, 창조론에 도전한 진화론 사상에서 위안을 얻었다. 불교가 일본의 전통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삿포로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신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발휘한 결단력과 수완은 일본제국이라는 독특한 사회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어떻게 융화시킬지 고심한 흔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4. 정치와 문화
정부 지도자들은 [5개조어서문]에 회의에 대한 조항을 넣어 동료 엘리트들을 안심시키는 한편 천황의 아우라를 토대로 공공질서를 확립하고자 했지만, 대다수 국민은 다른 종류의 정치질서를 원했다. 최근에 학자들은 일본사회의 구석구석을 뜯어 고치고자 했던 당대의 각종 탄원서와 건백서를 모아 여덟권의 두툼한 책으로 펴냈다. 메이지 초기의 양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역동적이었으며, 지방의 지도층은 중앙정부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까지는 기탄없이 의사를 표명했고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열정은 문화적으로 표현되었다. 이름난 시인들은 시골마을 지도자들이 쓴 시를 교정해주고 돈을 받아 생활했다. 이때 정치적인 변화와 자유를 갈망하던 일본인들은 엄청난 양의 소설을 쏟아 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어색하게도 고대 그리스나 최근의 서양을 배경으로 하고있는데, 용감하게 자유주의를 지지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려는 고귀하고 야심만만한 젊은이들이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공공정책, 개인의 삶, 광범위한 여론의 추이를 통해 살펴본 메이지시대의 면면은 밀려드는 서양의 사상적, 이상적 모델을 개조하고 변용 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면밀히 검토해본 서양세계는 전적으로 자비롭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일방적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해서 변화의 추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일본은 아무리 끊임없이 변해도 여전히 일본이었다.

5. 국가와 문화
국가는 메이지 문화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정부는 한편으로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천황가의 의식과 신비감을 활용하면서 복고운동을 전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의 합리화와 근대화를 이루고 외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문명개화운동을 후원했다. 개혁관료들은 규제, 분류 중앙집권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사회를 통제하려는 강한 욕망을 보였다.

부제 : 우아한것과 통속적인것

1) 언어와 표기법
정부는 표준어 발달에 일일이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일정한 역할은 수행했다. 효율적 측면에서 한자를 계속 사용해야하는지를 의심했다. 선조들이 무분별하게 중국문화를 수입하면서 들여온 불편한 상형문자를 폐지(한자폐지론) 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수의 의견은 일본어를 지키되 표기법을 단순화하고, 딱딱한 한문 대신 구어를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런 방식을 발전시켜 완성하는 데는 40년이 걸렸다. 1887년과 1889년 사이에 후타바테이 시메이는 전통소설을 두가지 버전으로 발표했는데, 두번째 버전은 근대적이고 구어체에 가까운 언문일치제로 서술되었다. 그 후 공립학교의 의무교육이 실시되자 교육제도를 통해 표기와 어휘가 표준화 되었다.

2) 음악
메이지 정부는 도쿠가와 후기의 오락이 지닌 통속적인 분위기를 정리, 정돈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서양음악은 군악의 형태로 일본에 들어왔다. 사쓰마가 왕정복고 전투에서 승리한 후인 1871년에 영국 군악대는 일본 군악대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군가와 행진곡이 왕정복고 전투를 통해 유명해지자 음악을 공립학교의 정규과목에 넣었다.
1891년에 제시된 문부성 지침은 “음악의 아름다움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윤리의식의 배양이 기본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예컨데 프랑스 제3공화정 때도 예술과 공교육을 관장하는 부서의 존재는 예술활동이 전체국민에게 생산적이고 자기 규제적인 삶에 대한 공통의 전망을 제시해준다는 논리로 정당화 되었던 것처럼.

3) 미술
메이지 정부의 미술정책은 상당부분 도쿠가와 시대의 미술에 기초했고, 네덜란드의 미술이 19세기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쿠가와 시대의 이학(양학) 연구기관은 지도 제작 및 소묘에 관한 회화 교육을 실용적인 학문으로 취급했다.
메이지 정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 미술정책을 이토 및 이노우에와 함께 영국에서 공부했던 조슈 출신인 사무라이가 주도하게하였고, 이들이 초기 메이지 문화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디까지나 일본인, 특히 정보의 통제하에 있었다는 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교육기관을 졸업한 일본의 전문가들이 외국인의 도움없이 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이 1895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국제사회에 입지를 굳히자, 천황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새로운 풍조가 발달했다. 1908년에 황태자가 거주하는 동시에 서양의 국빈을 맞이하는 아카사카 이궁(영빈관)이 건설되었다. 이것은 베르사유 궁전을 본뜬 듯한 화강암 건물이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철학을 가르치러 1878년에 일본에 온 어니스트 페널로사는 일본 전통미술의 애호가가 되었고, 과도한 근대화정책을 한탄했다. 페널로사가 사후에 얻은 명성은 시대의 추세를 옹호하기 위해 똑똑한 외국인의 의견을 차용하는 일본인의 편의적 사고방식을 잘보여준다. 마찬가지로 경영컨설턴트 에드워즈 데밍 이라는 인물도 일본경영진의 사고를 뜯어 고쳤다는 명성을 얻었는데 사실 일본의 산업관리는 오래전부터 서양의 발전상황과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4) 문학
새로운 문화형식을 이루기 위한 투쟁이 가장 분명하고도 면밀하게 기록되어 있는 분야가 문학이다. 따라서 이 분야가 서양학자들의 가장 큰 관심을 받아온 것이다.
일본 근대화 초기의 문학적 실험은 풍자작가와 이야기꾼에게 기회를 제공하는데 그쳤는데, 메이지 시대의 일본인들은 서양에서는 소설이 사회적, 심리적 비평의 주요 형식으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러시아 소설은 특히 일본 최초의 근대소설로 평가되어 번역작업을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메이지시대의 위대한 작품은(모든 일본인에게 회자 되어진) 20세기 초반에 탄생했다.

메이지 시대의 위대한 소설가3인
나쓰메 소세키(p744)
마음이라는 소설은 가장 흡인력이 강한 작품이다. 20세기 일본의 중요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소설의 주제는 고독과 소외이다. 중심 사건은 메이지 천황의 죽음인데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친구에게 남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p745) “나와 자네는 다른 시대에 속해있고 그래서 서로 생각이 다르네. 우리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네.” 이 소설을 읽으면 그들이 바로 메이지 시대의 아이들이었고 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뿌리를 잃은 사람이었다는점과 소설가로서 그들이 주요 관심사는 격변의 시대에 태어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던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모리 오가이
인생행로가 소세키와 전혀 다른 인물이다.
소세키가 고독과 자아를 묘사하는 심리적 깊이 면에서 두드러졌다면, 오가이가 역사적 작업에 뛰어나며, 도손은 일본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자의식을 파헤치는데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고한다.

시마자키 도손
도손은 20세기 유행한 소설인 사소설인데, 사소설이란 작가가 자기 내면의 투쟁과 불확실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형식이라고 한다. …생략(p746) …장엄함과 비극이 결함된 작품이 탄생한것이다.

5) 이데올로기와 역사
메이지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정부관료들의 관심과 학자 및 사상가들의 노력이 긴밀하게 맞물리면서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역사분야, 특히 일본 고대사 연구에서는 국가의 영향력이 두드러졌다.
도쿠가와 시대에 뛰어난 유학자들이 추구한 작업과 메이지 시대에 발달한 근대적 역사서술 사이에는 상당한 연속성이 있었다.
역사가 시게노 야스쓰구는 한학과 실증적 연구 분야에서 오규 소라이의 전통을 계승한 가장 뛰어난 학자로 알려졌다. 그는 중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고, 학생들을 중국에 장기유학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서양사의 방법론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세계사를 가르치는 것 외에도, 역사과학을 하나의 학문분과로 일본에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학자 구메구니타케. 이 둘은 모두 일본고대사를 신화 중심의 서술방식에서 해방시키는데 앞장섰고, 역사적 추정의 사실성과 인물의 실존여부에 의문을 제기 했다.
일본이 도쿠가와 시대에 유럽과 달리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국가로 부상한 것은 19세기 개항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에따라 대외관계에 관련된 문서를 수집하려는 야심찬 계획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제도가 정착되고 교육을 받은 서민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사회가 점차 개방되자, 넓은 의미의 역사가 공중의 논쟁이 되었다.
역사학자 구메 구니타케는 신도 자체는 근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없으며, 나무가 죽은 가지와 잎을 떨어뜨리 듯 일본은 쓸모 없는 요소들을 벗어 던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근대국가의 건설자들은 신도를 쓸모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는 커넝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구메는 강의와 저술활동을 계속했지만 정부가 후원하는 수사국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검열은 더욱 매력적인 수단이 되어 구메의 책이 수십년이 지나 검열을 받게 되었다.
메이지 말기인 1911년에 정부는 전문가들이 교과서에 쓸 수 있는 것을 규정해 줌으로써 역사해석에 더욱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메이지 문화는 이처럼 모순을 안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서양을 모델로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황은 물론 그 후광에 기대고 있는 사람들의 권위까지 떠받들기 위해 고대 신화를 근대에 맞게 윤색해야 할 책문도 있었다. 이 두가지 가치가 충돌했을 때는 당연히 국가의 권위와 정통성을 우선시 해야했고, 관료들은 제국대학의 교수들을 국가적 요구에 부응해야하는 문화공무원으로 간주해 버렸다. 새 것을 새운다는 것은 옛 것과 단절을 의미한다. 메이지 시대는 따로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할 만큼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라고 보는 시각이 일본인의 저술과 사고에 일반화 되었고, 이러한 의식의 상징이 되는 건축물로는 교토의 헤이안 신궁과 도쿄의 메이지 신궁이 기념물로 상징되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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