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본을 찾아서 2』 15장 '전간기 일본'

작성자
deepeye
작성일
2022-09-17 19:56
조회
307
들어가며

메이지 시대와 달리 다이쇼 시대는 명확한 구분이 불가능하다. 메이지 천황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이었지만, 다이쇼 천황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존재감이 미미했다. 잰슨은 차라리 러일전쟁 때부터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까지의 25년을 근대일본사의 다음 시대로 보는 편이 낫다고 주장.

1. 정당내각을 향한 발걸음

- 메이지 헌법은 책임의 소재 면에서 교묘할 정도로 모호했다.(주권과 최종권위가 천황에게 있으나 궁극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구조)

- 유권자들에 의해 선출된 ‘중의원’은 천황이 임명하는 추밀원, 그리고 귀족원에 비해 열세였으나 예산안 승인이라는 중요한 헌법상 권한을 보유.

- 이토는 중의원의 협조를 구하는 것에 지쳐, 따로 입헌정우회를 결성했으나 야마가타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후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총재직을 넘기고 한국통감으로 밀려났다.

- 메이지 마지막 10년은 조슈 출신 사이온지 긴모치와 가쓰라 다로가 주도.(767) 그러나 조슈 내부에서도 문관과 무관 사이의 경쟁이 치열했다.

- 순차적인 정권교체는 다음 시대가 시작되자마자 무너졌다. 사이온지가 2개 사단을 증설하자는요청을 거부하자, 군부는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도록 압박했고 사이온지는 1912년 12월 사임했다. 이 사건을 ‘다이쇼 정변’이라 부른다.

-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가쓰라 다로는 세 번째 내각을 구성했는데, 각계 각층에서 ‘정당내각’이 아닌 천황의 권위를 끌어들여 내각을 구성한 가쓰라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특히 오자키 유키오의 비판 연설은 새로운 의회시대의 개막을 상징.

- 이후 정당내각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과정.(770~771) 해군 제독 야마모토 곤노효에(뇌물로 실각), 겐로 오쿠마 시게노부(외무대신 가토의 독단)-데라우치 대장(입헌동지회와 입헌정우회를 무시하고 통치하려다 실패하고 쌀소동으로 궁지에 몰림)

- 1918년 데라우치 통치 시기, 자연재해와 경제난으로 벌어진 쌀 소동은 하라의 정당내각을 탄생시킨 중요한 요인이었다. 하라는 1921년 암살 당하기 전까지 진정한 정당정치의 희망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보수세력은 여전히 유권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립적인’ 내각이 사분오열된 의회와 협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꿈꾸었다.

- 전간기 일본 정치의 특징은 앞선 사례들에서 보았듯 잦은 내각 교체라 할 수 있다.(772~773) 총리가 빈번하게 바뀌는 정치 환경에서 일상적인 의사결정은 점점 더 관료집단의 손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 전간기 3명의 현직 총리가 암살당한 것은 모두 대외정책과 관련 있었다. 하라와 하마구치는 워싱턴 회의에서 조인된 해군력 감축안을 밀어붙이다, 이누카이는 상하이 사변을 저지하다가 변을 당했다. 군부는 민간 정치인이 특권을 건드릴 때마다 폭력을 행사했다.(774)

1) 검열과 억압

- 민중의 일부는 선거규정을 고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시스템 자체를 바꾸려 했다. 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대역사건 재판과 처형(1911)은 이에 대한 정부의 두려움을 드러냈다.

- 1900년의 치안경찰법은 급진단체와 그 사상의 전파를 막기 위해 고안되었고, 1909년 가쓰라 내각의 신문지법, 그리고 1925년 치안유지법이 실시되면서 억압이 최고조로 달했다. 이 시기 남성의 보통선거권을 인정하는 법률이 가결되었는데, 검열과 억압은 확대된 참정권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조치였다.

2) 정치적 의제’

-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목적은 국민을 위해 정부를 통제하는 것이었다.(779) 1912~1913년과 1924년의 ‘호헌’ 운동(가쓰라 내각 성토)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는 민중의 열망을 반영. 한편 참정권 운동에는 내셔널리즘과 외교정책에 대한 방향도 함축.(ex 히비야 폭동)

- 1925년 (남성) 보통선거가 도입되고 1928년 최초의 보통선거가 실시되기 전까지는 새로 집권한 내각의 요청에 의해 총선이 치뤄졌다. 하지만 이제는 전임 내각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 그리고 계파와 돈에 의한 선거 ‘관리’가 결합하여 새 내각을 중의원 다수파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다.

- 정당은 그 의미에 충실하기보다 ‘파당’에 가깝고 유권자보다 계파 보스에 대한 충성으로 유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내각의 업적을 무시할 순 없다. 하라, 가토 다카아키, 하마구치 같은 강력한 총리들은 군부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전후 민주주의라는 세계적 추세에 발맞추려고 시도 했었기 때문이다. 천황을 현인신이 아닌 입헌군주로 봐야 한다는 관념 역시 정당내각시대의 산물이었다.

2. 세계 속의 일본

-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세계 5대 강국으로 대접받았다. 이런 입지는 일본에 대한 세계인, 그리고 아시아인의 인식을 변화시켰다. 한편 1차 세계대전 동안 붕괴된 국제질서, 전세계 군주제와 제국들이 해체되는 상황 속에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봉착한 새로운 도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1) 중국문제가 먼저

- 역사적으로 일본의 안정은 중국의 내부사정과 관련 깊었다. 이런 역학 관계에서 청제국의 몰락은 일본에게도 간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중국의 보전’을 주장하는 언론과 지식인들은 쑨원과 같은 지사 세력을 지원하며 아시아적 연대(소일본주의)를 이어갔다.

2) 일본문제가 먼저

- 그러나 대국으로의 팽창을 지향하는 ‘대일본주의’자들은 일본이 중국에게 누리는 특수를 보전하길 원했고 제국주의적 질서에 도전할 생각이 없음을 천명.

- 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위안스카이 정권에 굴욕적인 ‘21개조 요구’를 전달.(789~790 참조) 중국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내셔널리즘을 고조시켰다.

3) 1919년의 3.1운동과 5.4운동

-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일본을 바라보는 아시아 인접국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거기다 한국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을 무력 진압하면서 세계 각국의 비난을 받았고, 아시아의 근대화를 주도한다는 명분은 힘을 잃었다. 잰슨은 일본 제국주의가 없었다면 동아시아가 연대와 우호의 기회를 증대해 나갈 수 있었으리라 판단.

4) 국제주의: 국제연맹과 워싱턴 체제

- 일본은 새로 탄생한 국제연맹을 영일동맹의 대체제로 삼으려 했다. 내부에서는 국제주의적 시각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는가 하면, 극단에는 미국, 영국이 빠진 국제연맹의 유용성을 의심하며 지역주의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있었다.

- ‘워싱턴 회의’에서 초기 일본은 해군력 감축 조약에 순조롭게 따랐다. 그리고 산둥의 독일 조차지를 중국에 반환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국제주의 노선의 하라 총리가 암살당했고 일각에서 팽창론이 대두되어 혼란스러웠다.

5) 배일 이민법의 파장

- 군축협상은 불신과 의혹에 시달렸고, 미국의 배일 이민법(797~798)은 반미 감정을 고조 시키며 ‘워싱턴 회의’에서의 협약을 수포로 만들었다.

6) 중국 내셔널리즘의 출현

- 청나라 패망 이후 북중국에서는 군벌들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남중국에서는 소련의 후원을 받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결성해 북벌에 나섰다.

- 이때 북벌군은 반외세 정서와 무질서로 비중국인에 대한 폭력행위가 빈번했는데, 각국 열강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 동참하길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당시 외무대신 시데하라는 중국 중남부와의 정치. 경제적 관계를 염두에 두고 신중했던 것.

- 일본의 전쟁영웅 다나카(군국주의)는 입헌정우회를 이끌며 시데하라(국제주의)의 노선을 비판했고 총리를 맡게 되었지만, 미묘한 상황 속에서 중국의 혼란에 개입하지 않았다. 한편 상이한 정치적 노선을 가진 두 사람 사이에도 공통점이 있었다. ‘만주’를 중국과 구별하며, 중국의 내셔널리즘을 견제할 수 있는 완충지대로 봤던 것이다.

- 하지만 다나카의 신중한 접근은 현지 일본군 장교가 만주군벌 장쭤린을 암살하면서 무너져버렸다. 아들 장쉐량이 장제스 국민군에 합류하면서 ‘만몽문제’는 이전보다 악화.

7) 천황과 장군

- 히로히토가 이 파국에 대해 다나카를 준엄하게 질타하자, 다나카 내각은 총 사퇴했고 분위기가 악화되면서 천황은 ‘자기 역할의 한계’를 깨달았다.(804)

8) “국권의 발동인 전쟁을 포기하다”

- 파리 켈로그-브리앙 조약으로 일본에 논쟁이 벌어졌다. “인민의 이름으로”가 들어가는 조약이 국체에 위배되기 때문. 이 조약은 향후 일본사에 두 가지 영향을 미쳤다. 1) 조약이 침략 전쟁을 불법화 했는데 이 기준에서 전쟁을 기도한 일본은 심판 받아야 한다는 것 2) 일본의 전후 헌법 9조의 “국권의 발동인 전쟁을 포기한다.”가 평화주의 원칙에 따랐기 때문.

3. 경제적 변화

- 일본 경제는 전간기에 변용을 맞이했다. 특이할 점은 근대에 이룩한 경제성장이 전통경제를 위기에 몰아넣지 않았고, 전통경제가 근대경제의 성장을 지탱하며 20세기에 접어들기까지 길항.(808)

- 청일, 러일전쟁은 경기 활성화와 더불어 근대 부문의 성장을 극적으로 앞당겼다.(810)

- 일본은 1920년대 심각한 경제공황을 겪었는데, 일본인에게 대륙 침략은 디플레이션과 불황의 늪에 빠진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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