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171~190 발제문

작성자
qjwskan
작성일
2019-09-28 12:49
조회
601
라클라우‧무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제3장 中 171쪽 ~ 190쪽

김형근
1. 헤게모니 개념의 이론적 구축

헤게모니 개념은 특수하고도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시작되고, 해소된다. 그러니까 특수로부터 발발한 헤게모니는 자신의 유래인 특수로부터 반박 당한다. 때문에 헤게모니는 어떤 폐쇄된 패러다임 내부로 환원될 수 없는 본질을 제 속에 품고 있다. 헤게모니 공간에는 ‘이론적 공백’이 있다. 무페와 라클라우에 따르면, 헤게모니 공간은 비단 국지적인 비사유의 공간이 아니라 “전체적인 개념화가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공간”이면서도, “헤게모니적 관계가 출현하는 다양한 표면들이 이론적 공백을 형성”함으로써 개념이 해소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결론은 다음이다. “따라서 헤게모니 개념을 구축하는 작업은 일관된 맥락 내에서의 사변적인 노력이 아니라, 상호 모순적인 담론적 표면들 사이의 협상을 요구하는 좀 더 복잡한 전략적 운동을 수반”한다는 것.

또 하나의 특징, 헤게모니 개념은 접합이라는 요소를 포괄하며 그러한 접합된 각각의 요소들은 제각각 식별된다. 그리고 접합은 식별의 대상이라기보다 하나의 실천이다. 무페와 라클라우는 “접합적 실천”과 “실천을 통해 접합되거나 재구성되는 요소들”을 구별한다. 다만 저자들은 접합적 실천 자체가 요소들의 종별화를 야기한다기보다, 식별되는 요소들이 “애초부터 종별화되어 있었”던, 다시 말해 “애초부터 구조적 또는 유기적 총체성을 상실한 파편들”로서 환원되지 않는 특수하고도 일종의 자연적인 성격을 갖는 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수로부터가 아니라 객관·보편으로부터 조직화된 요소들은 일종의 ‘인위적’인 것으로, 진정한 접합은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아도 오로지 자연의 조직화를 통해 우리의 다양한 필요들이 서로, 그리고 우리의 역량 및 우리가 관계하는 모든 것들과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되”는 그러한 접합이다.(173)

이처럼 정체성이 그 자체로 온전하지 않고, 분열을 계기를 자기 속에 포함시키는 것. 저자들은 이를 ‘완벽성’과 대립하는 ‘애매성’의 속성을 제시한다. 헤겔은 폐쇄적이지 않고 “우연적이고 비논리적인 이행들”을 통해 정체성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접합의 철학적 기초라고도 할 수 있다. 헤겔에게서도 정체성은 고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정체성은 이행, 운동을 통해서만 설명된다. 그 실천의 영역이 곧 접합을 가리킨다.

“만약 헤겔의 논리 관계들이 우연적인 이행이 된다면, 그것들 사이의 연관들은 기저적이거나 봉합된 총체성의 계기들로 고정될 수 없다. 이것은 그것들이 접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175)

다만 이러한 변증법의 사상이 “개방적인 접합의 불연속적 계기보다 선험적 이행의 필연적 성격에 더 많은 비중을 둘 경우”, 이는 폐쇄적인 이론과 같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하여 저자들은 접합의 영역을 위해서 총체적 개념화에 대한 폐기를 제안한다. 사회의 특수한 각 요소들을 총체화하는 사고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것, 특수한 요소들은 하나의 “구성적 지반 또는 ‘부정적 본질’”이다(175). 환원될 수 없는 본질을 통해서만 접합은 실천이라는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 사회적인 것 자체가 아무런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세 가지 중요한 점
(1) 매개는 논리적 이행 체계를 다루는 반면, 접합은 우연적인 관계를 다룬다. 즉 그 본성은 열려있다.
(2) 그렇다고 관계들로부터 비필연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요소들 자체가 가진 정체성의 필연적 성격(우리가 자연적 정체성이라 말했던 종별성)은 분명 있다(그리고 식별가능하다).
(3) 그리하여 사회적인 것들에 대한 담론 구조는 ‘인지적’ 또는 ‘관조적’ 실체가 아닌 하나의 접합적 실천이다. 즉 그것은 사회관계들을 구성하고 조직화하는 적극적 실천인 것이다.

- 접합 범주를 이론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두 가지 단계
(1) 접합적 관계에 들어가는 요소들을 종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립하는 것 _ 요소들의 자연적 정체성을 인식
(2) 접합을 구성하는 관계적 요소의 종별성을 결정하는 것 _접합 자체에 대한 개념화, 헤게모니의 개념화

저자들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알튀세르 학파의 진화과정을 살펴본다.

2. 사회구성체와 과잉 결정

알튀세르는 헤겔의 총체성과는 다른 총체성을 제시한다. 헤겔은 차이와 운동 속에서 실현되는 총체성을 제시했지만, 그것은 결국 “단일한 자기 전개 과정 속에서 계기들의 다원성이 드러나는 복잡성”에 불과했다(178).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겔적 총체성은, 그 자신이 이념의 발전의 계기가 되는 단순한 통일체, 단순한 원리의 소외된 발전이다. 따라서 헤겔적 통일체는 엄격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모든 표현들 속에서 존속하고 따라서 자신의 복원을 준비하는 소외 속에서도 존속하는 그 단순한 원리의 현상이자 자기 발현이다.”(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우리 책 178에서 재인용)

알튀세르의 ‘과잉 결정’ 개념은 헤겔의 총체성과는 다르다. 알튀세르는 과잉 결정을 언어학과 정신분석학에서 차용했다고 스스로 진술하는데(178), 프로이트에게 과잉 결정이란 “상징적인 것의 영역 안에서 구성”되며 의미들의 다원성을 수반하는 융합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사회적인 것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잉 결정되어 있다(179). 이 말은 “사회적인 것이 그 자신을 상징적 질서로 구성한다”는 말이다(179). 따라서 제각각의 특수한 사회적인 것들 사이의 관계들의 본질에 의거하여, 그 관계들은 “내적 법칙의 필연적 계기로 환원”되지 않으며, 거기에 고정적인 “궁극적인 문자성”이란 없다. 그리하여 사회적 행위자들의 규칙성이란 본질적으로는 없고, 있다고 해도 “상대적이고도 불안정한 형태의 고정화”에 불과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어떠한 결론에 도달한다. 사회적 관계들의 성격은 애초에 “과잉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담론 내에서 과잉 결정 개념은 살아남지 못했다. 그 한계는 알튀세르 담론 내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최종 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 개념”의 존재이다(180). 무페와 라클라우는, “만약 이 궁극적 결정이 모든 사회에 유효한 진리라면, 그와 같은 [궁극적] 결정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사이의 관계는 우연적인 역사적 접합을 통해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 필연성을 구성하게 될 것”(180)이라 비판한다. 그들에 따르면 경제는 이미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들의 조건 그 자체이지,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은 아니다. 접합 개념의 이론화를 위한 하나의 축은 “차이가 구성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가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을 담당한다면, 차이는 결코 구성적이지 않다.

알튀세르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개념을 포괄함으로써 스스로 결함에 빠진다.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경제’와, 과잉 결정되어 있는 사회적 현실들. 최종 심급에서의 경제의 본질성을 강조한다면, 결국 “과잉 결정된 심급들과 최종 심급 사이의 관계는 최종 심급에 의한 단순하고 일방적인 결정으로 이해”(181)되고 만다. 이로써 알튀세르의 과잉 결정 영역은 “매우 제한적”(182)이었으며, 과잉 결정은 본질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사회가 최종적이고 본질적인 결정을 가지고 있다면, 차이는 구성적이지 못하며, 사회적인 것은 합리주의적 패러다임의 봉합된 공간 속에서 통일된다. … 이것이 알튀세르의 합리주의가 탈접합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182)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결국 “사회적 총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에 가정된 필연적 연결이 논리적으로 비일관적이었음”이 드러남으로써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합리주의적 패러다임에 내재한 논리적 연관들을 반성했다. 그러나 그가 반성함으로써 제시했던 대안은 “모든 정체성의 불확실하고 관계적인 성격을 단언하는 것”(182)이라기보다, “추상에서 구체로 이행하는 효과를 낳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는 실체들을 다양화”(183)하는 것이었다. 그는 ‘최종 심급에서 경제에 의한 결정’ 자체를 포기하기보다는 “계급투쟁의 지형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저자들은 “최초의 정식화가 가진 난점들을 확대 재생산했을 뿐”이라고 일갈한다.

“이행 과정을 설명해야만 하는 투쟁을 하는 계급들은 실제로 어떤 계급들인가? 만약 그들이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된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적 행위자들이라면, 그들 행위의 합리성과 정치적 계산의 형태들은 생산양식의 논리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반대로, 만약 이것이 [생산양식의 논리를 통해] 계급들의 정체성을 모두 망라하지 못한다면, 계급들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구성되는 것인가?”(183-184)

한편 힌데스와 허스트는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 개념과 구조적 인과성 개념을 비판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간 모습을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그들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조응이 필연적이지 않은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확증하고 나서, 생산양식 개념을 마르크스주의 담론의 정당한 대상에서 페기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184) 그들은 총체화의 가정에서 벗어나고 접합의 계기를 밝혀놓았다.

“사회구성체는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이나 구조적 인과성 등등과 같은 조직화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총체성이 아니다. 사회구성체는 일련의 명확한 생산관계들과 함께 이런 생산관계들의 존재 조건을 보장하는 경제적‧정치적‧문화적 형태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존재 조건들이 필연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그런 관계들과 형태들이 결합되어야 할 사회구성체의 필연적 구조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 만일 계급들이 경제적 계급들로서 이해된다면, 계급들은 정치 세력들이나 이데올로기적 형태들로 이해되거나 그것들에 의해서 재현될 수 없다.” (커틀러, 우리 책에서 재인용, 185)

이때 그들(힌데스와 허스트)이 제기하는 사회구성체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는 다음이다.

“이 사회구성체 개념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담론의 일정한 대상들-생산관계, 생산력 등등-을 종별화하고, 이런 대상들 간의 접합을 ‘존재조건의 보장’이라는 관점에서 재개념화한다.”(185)

하지만 저자들은 이러한 사회구성체 개념이 갖는 문제를 지적하며, 그것이 (1) 대상들을 종별화하는 기준이 타당하지 않으며, (2) 대상들이 서로 각각의 ‘존재 조건들을 보장한다’는 관점에서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개념화하는 것은 그 어떤 접합 개념도 제공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185)
첫 번째 문제, 대상들을 종별화하는 기준에 대한 문제에서, 커틀러 등은 존재 조건들이 필연적으로 종별적 형태를 채택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타당한 진술로 출발하지만, 이어서 “주어진 사회구성체의 생산관계들은 그 관계들의 존재 조건을 보장하는 구체적인 형태들과는 별도로 종별화될 수 있다”(185)는 오류를 범한다. 무페와 라클라우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하나의 존재 조건으로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최종 심급의 지위만은 아님을 강조하는데, 커틀러 등은 생산관계와 존재 조건 자체를 구분 지음으로써 구체적 사회체들의 현실과 무관한 추상적인 생산관계의 존재 조건들을 상정하고 만다.
두 번째 문제인 대상들이 서로 각각의 ‘존재 조건들을 보장한다’는 것이 하나의 접합인지에 대해 저자들은 논한다. 무페와 라클라우에 따르면 “접합 관계는 변별적 위치들의 체계를 포함”하는 것이 중요한데(187), ‘존재 조건’에 대한 문제는 대상들 간의 위치들의 체계, 즉 배열의 문제를 다루기보다 “대상이 존재하기 위한 논리적 요건을 충족”시키는 데에 한정된 담론을 제공해준다. “존재 조건을 보장하는 것이 관계를 구성하지는 않”는다(188). 접합 관계의 종별성에 대한 사고는 또 다른 지형으로의 이동을 요하는 것이다.

허스트와 울리는 알튀세르의 폐쇄적인 총체성의 개념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실천적인 접합들을 사유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총체성의 본질주의로부터 요소들의 본질주의로 옮겨 간 것”(188)에 불과하다. 무페와 라클라우에 따르면 “총체성 통념은 ‘사회’를 통일하는 근본적인 원칙이 아니라, 개방적인 관계적 복합체 안에서 총체화하는 효과 전체를 수반한다는 차이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단지 ‘본질적인 관계들 또는 비관계적인 정체성들’이라는 선택지[양자택일] 안에서만 움직인다면, 모든 사회 분석은 더는 분할할 수 없는 논리적 원자들이라는 무한히 멀어져 가는 신기루를 추적하는 것이 될 것이다.”(189)

접합의 문제는 요소보다도 ‘지형’에 있다. 즉 그것은 어떻게 배열할 것이냐의 문제, 실천의 문제인 것이다. 이후 저자는 종별적 접합의 논리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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