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민중의 세계사』, 2부 151~173쪽 발제

작성자
overthe
작성일
2020-01-18 10:18
조회
891
미리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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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1 정치철학 고전 세미나,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2부 151~173쪽 발제자: 홍원기

1. 수백 년의 대혼란

1. 유라시아 남부를 지배한 세 제국[로마, 중국, 인도]는 5세기에 분열과 혼란 맞음.
1.1 야만인이 국경 휩쓸고, 군벌이 왕국 분할, 기아 전염병 확산, 상업 퇴조, 도시 인구 감소.
1.2 이에 대처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시도.
로마 제국: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 중국: 불교 교리 / 인도: 힌도교 강화와 새로운 교파들 번성.

2. 일부 역사가는 위기의 원인을 세계적인 기후 변화에서 찾지만, 그것은 몇 세기 동안 각 문명을 괴롭힌 중대한 문제를 간과한 것.
2.1 문제는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나머지 모든 사람을 위해 생계를 이어가던 기본 방식: 농업 생산성 발전은 철기 도구가 확산 됐던 1천 년 전의 농업 생산성 발전 속도와는 비교도 안 될(151) 정도로 더뎠지만, 부자들의 소비는 더욱 사치스러워졌고 국가라는 상부구조는 훨씬 더 방대해짐.
2.2 위기는 로마 세계가 가장 심각. 로마 제국의 번영은 노예 공급에 의존. 따라서 제국 당국과 대지주들은 인도나 중국보다 농업 생산 개선에 더 게을렀음. 따라서 붕괴의 충격도 컸음.
2.3 이후 유럽에 ‘암흑기’가 도래. 도시 생활, 문자 생활, 문학, 예술을 의미하는 문명은 점차 붕괴, 보통 사람들은 기아와 전염병에 시달림. 6세기 후반과 7세기에 인구 절반이 감소된 걸로 추산.(152)
2.4 도시 인구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버림받고 폐허가 되는 일도 종종 생김: 상업 퇴조, 성직자들만 더는 쓰지 않는 언어인 문어체 라틴어를 읽고 쓰는 능력을 지님, 수도원 바깥에서는 고전적 학문이 완전히 잊힘, 여기저기를 순회한 수도승 학자들만 문자 문화의 고립된 섬들을 연결해준 유일한 고리, 침략자들이 수도원 도서관을 불 지르면서 그리스-로마 세계 학문이 담긴 많은 책이 소실.(153)

3. 약 6백 년 서유럽은 이런 조건에 처해 있었지만, 마침내 혼돈 속에서 새로운 종류의 질서가 출현.
3.1 유럽 전역에서 농업이 후기 로마 제국의 자급자족적 영지와 정복자들의 촌락 공동체의 특징을 모두 지닌 방식으로 조직되기 시작. 옛 제국보다 더 생산적인 농작물 재배 방법이 사용되기 시작.(153)
3.2 농경 방식의 변화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 조직과 결부. 조야한 성채에 거주한 무인 영주들은 자기 영지의 농민들에게서 무보수 노동이나 갖가지 세금을 걷으면서 촌락을 착취하는 동시에 보호하기 시작. 그러나 새로운 문명의 토대가 마련되는 데는 더 오랜 세월이 걸림.(154)

4. 중국: 제국의 재등장

1. 로마 제국처럼 중화 제국은 내부의 경제적 붕괴, 기근, ‘야만인’의 침략으로 붕괴.
1.1 4세기는 가뭄·메뚜기 떼·기아·내전의 만연, 옛 제국의 경쟁 제국들로의 분열, 정치·경제 행정의 혼돈기: 1백만 명의 농민이 북부 심장 지대를 떠나 남부 양쯔강 유역과 이남 지역으로 피신. 남겨진 지역은 폐허가 되어 많은 경작지들이 잡초 밭이 되고, 생산적 생활은 자급자족적 농업으로 회귀, 상업과 화폐 쇠퇴.
1.2 그러나 ‘암흑기’라고 부르는 건 적절치 않음. 문명은 붕괴하지 않음. 양쯔강 유역에서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전개된 벼농사의 확대는 번영하는 도시와 식자층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잉여를 제공. 중국 남부는 동남아시아·인도·이란과 무역로를 트고 있었음. 북부 ‘야만인’ 왕조들은 지배권을 다퉜지만, 중국 문명의 이점을 깨닫고 중국 문화를 받아들임.(155)
1.3 더욱이 이 ‘야만인’들은 옛 문명에 가르칠 수 있는 훌륭한 것들을 지님. 제국의 비용과 전통에 짓눌리지 않아 특정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음: 마구 이용법, 말안장과 등자, 교량과 산길 놓는 법, 약초와 독초에 관한 학문, 항해술 등의 기술이 중국 안으로 유입. 이러한 혁신은 부와 잉여를 늘릴 수 있는 길을 열었음.
1.4 제국의 붕괴는 도서관과 필사본들을 파괴했지만, 이전 지적 전통이 약화되면서 새로운 전통이 탄생할 여지가 생김: 불교 영향력 얻기 시작, 인도·이란·그리스가 중국 미술에 영향.

2. 6세기 말 중국은 다시 제국으로 통일(수, 당). 새로운 황제들은 적들을 상대로 거둔 군사적 승리 덕분에 거대 공사를 위한 충분한 잉여를 주민 대중에서 뽑아낼 수 있었음. 뤄양과 장안에 새로운 도읍이 생겨남.(156)
2.1 문신 관료가 운영하는 행정 구조, 문신 관료 일부는 과거제도로 충원: 지주 호족 계급 견제. 잉여가 호족의 지대가 아닌 세금으로 납부되도록 호족의 땅을 소농지로 분할하려 함.
2.2 국가는 강력. 도시 생활을 면밀히 단속, 순종을 강조한 유교가 국가 관료 지배 이념이 됨. 하지만 무역의 성장으로 아시아 도처의 이데올로기가 유입. 중국 역시 사방에 영향력을 떨침.

3. 당은 3백 년만에 위기에 빠짐: 관료와 궁정 파벌들 간의 끊이지 않는 싸움. 지배 계급의 사치스런 생활과 대규모 국가 공사와 거대한 제국을 지탱하는 비용이 급증, 소작농과 임금 노동자를 이용해 경작한 대토지가 늘어나면서, 소농 계급 급격히 몰락, 국가 세입도 축소.(157)

4. 농민 대중의 형편은 갈수록 나빠짐. 870년대에 반란의 물결이 일어나 제국 전체를 위협. 대규모 반란군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행군했다가 880년에 도읍을 장악하려고 다시 장안으로 향함. 황소의 난.
4.1 이는 억눌린 농민의 승리가 아님. 대다수 반란군은 온민이 아니라 땅에서 쫓겨난 유랑민. 반란군 지도자들은 일부는 농촌의 유생, 일부는 빈민 계급 출신.
며칠 지나지 않아 반란군과 지도자들은 서로 다른 길을 추구. 지방 빈민 출신 반란군은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를 약탈. 반면 황소는 안정된 정권을 세워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음. 최고위 관료만 제거하고 옛 귀족은 여전히 핵심 자리에, 불평하는 지지자들은 잔인하게 탄압.
4.2 지지자에게 칼을 돌린 황소는 옥좌를 유지할 수 없었지만, 황소의 난으로 사실상 당나라는 멸망. 이후 5년 동안 5대 왕조로 분열했다가 송으로 통일.(158)

5. 중국 역사 속 반란들은 흔히 비슷한 양상을 보임.
5.1 왕조 수립, 궁전·운하·도로를 건설하는 야심찬 계획에 착수 -> 조정은 유목민족의 위협에 대응해 엄청난 비용을 들여 북쪽과 서쪽 국경을 요새화하고 해외 정복에 나섬. -> 조정은 권력을 확장하지만, 농촌 대중을 끔찍한 가난으로 내몲. -> 반란으로 제국 멸망. -> 반란 지도자나 제국 장수가 새로 왕조를 수립. -> 모든 과정 되풀이.
5.2 농촌 빈민들은 반란에 승리해도 전혀 이득을 보지 못함. 농촌에 널리 흩어져 땅에 묶여 있던 농민은 반란을 일으킬 수는 있었지만, 자신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집단적으로 통치하는 새로운 국가를 세울 수는 없었음. 그저 ‘좋은’ 황제가 다스리는 비슷한 국가 세우려 함.
5.3 그렇다고 중국 사회가 “변하지 않는” 사회는 아니었음. 왕조 건설과 멸망 과정에 변화가 누적. 새로운 기술이 생산에 도입, 사회 집단들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변화를 겪음.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다
6. 중국은 거대한 경제적 변화를 계속 겪음: 소작인이나 임금 노동자를 고용한 대지주들은 새로운 농업 도구와 제분기계에 투자. 한 해에 두(159) 차례 이상 수확할 수 있는 농법을 개발하여 수입 늘리고자 함. 농업 생산성이 급격히 증대, 부자들이 사치품에 쓸 잉여도 증대.
6.1 농민들은 상업망을 통해 지역 시장과 연결되기 시작, 지역 시장은 규모와 중요도가 커진 지방 도시들과 연결되기 시작. 화폐가 상거래에서 갈수록 큰 비중. 상인 수가 늘고 일부는 막대한 부를 축적.

7. 공업도 성장: 전국에 병기창. 직물업, 철강업 성장.
7.1 기술 혁신: 금속 녹이는 대 목탄 대신 석탄 사용, 풀무질에 수력 기계 이용, 광산 채굴에 화약 사용. 1044년 화약 사용 -> 1132년 대나무 관 로켓 발사 -> 1280년(160) 청동과 쇠로 대포 만듦. 새로운 조선술과 앞선 지도 제작술.

8. 인쇄술이 발전한 덕에 역사상 처음으로 대량의 중간 계급 수요를 겨냥한 서적들이 출판.
8.1 9세기에 이미 각판 인쇄 실행, 11세기에 활판 인쇄 선보임.
8.2 중국은 유럽보다 5백 년 앞서 책을 인쇄, 문자는 식자층의 특권이 아니게 됨. 양쯔강 이남 지역에 관학과 사학 늘어남.

9. 상업·공업 성장과 더불어 상인 계급의 부와 규모와 영향력도 커짐.
9.1 국가는 과거에는 상인을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분자로 감시.(161) 이제는 이런 규제들은 유명무실해지고, 새로운 도시 부자들은 부를 이용해 조정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
9.2 과거제도는 훌륭한 가문 출신 아닌 사람들도 조정의 높은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수단이 됨. 관료 집단은 갈수록 부유한 상인과 지주 집안 출신들로 충원.

잃어버린 세기들
10. 상인은 중요한 압력집단, 하지만 국가 운영할 힘은 모자람. 대규모 생산은 여전히 국가가 대부분 운영.
10.1 국가 운영 집단은 시골 선비를 이상으로 여긴 문신 관료들이었고, 관직을 얻은 상인의 아들도 같은 이상을 공유. 그 결과 송조가 절정기에 도달하지마자 위기의 조짐이 나타남.

11. 국가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신유교(162): 무신 귀족의 폭력적 행동과 상인들은 가차없는 이윤 추구를 모두 피하는 것. 보수적인 사회 계층에 알맞음.
11.1 이는 송 초기의 정책, 군대 규모 줄이고 변방 국가에 뇌물을 줘서 평화를 사는 것과 맞아떨어졌음. 그러나 이런 정책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핵심을 담고 있었음.
11.2 지배적인 신유교 이데올로기와 상인 계급의 활동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음.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면서 자신들이 더욱 부유해지고 유력해지는 한(163) 상인 계급은 그런 간극을 용인.

12. 상인과 무역가들이 완전한 자본가로 변모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킨 중국의 특수성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닌 물질적인 것: 중국 상인 계급은 17~18세기 유럽 상인 계급보다 훨씬 더 국가 기구 관료들에 의존적. 거대한 운하망과 관개 시설 같은 생산수단을 국가 관료가 운영했기 때문에.

13. 귀족 관료와 부유한 상인들이 크게 번영한 반면 농민들은 뼈저린 가난에 시달림. 귀족 관료는 농민에게는 ‘유교’ 도덕을 지키지 않고 가혹하게 대함.(164)

14. 내적 위기가 충분히 성숙하고 상인과 관료 사이의 이익 갈등이 전면 등장하기 전에, 외적 위기가 국가를 갈가리 찢어놓음.
14.1 여진족 1차 침략과 금의 건국. 몽골의 2차 침략과 원의 건국.
14.2 몽골 지배자들은 원조를 세우고 옛 관료 중 일부에 의존해 제국 운영. 그러나 요직은 직접 장악했고, 수익성 있는 징세 사업은 중앙아시아 이슬람 상인들에게 하청. 이는 세계 최고의 기술적·경제적 발전의 결과이자 동력이었던 사회 조직을 해체.

15. 송대부터 불어나고 있던 경제 문제들, 특히 농촌의 빈곤 문제가 전면에 등장.
15.1 중국 사회는 여전히 놀랄 만큼 발전한 사회. 유라시아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165)까지 뻗어 있던 몽골 제국은 중국의 선진 기술을 뒤처진 서구에 전파하는 중요한 기여를 함.
15.2 그러나 중국 자체는 이미 경제적 역동성을 잃은 상태. 농민의 빈곤은 백련교, 홍건적 같은 종교 일파나 비밀결사가 이끈 농민 반란으로 이어짐. 결국 떠돌이 농업 노동자의 아들인 홍건적 지도자 주원장이 몽골 도읍 베이징을 장악하고 1368년 황제가 됨.
15.3 명나라 세워진 뒤 원나라 말기의 파괴가 꾸준히 복구됐지만 경제적 역동성은 회복되지 않음. 명나라 초기에는 자원을 농업에 집중하기 위해 공업과 대외 무역을 억눌렀음.
그러는 동안 유라시아의 다른 여러 곳에서는 중국이 선구적으로 개발한 기술이 유입, 지역마다 고유의 도시 문명과 육군·해군이 번성하기 시작.(166)

3. 비잔티움: 살아 있는 화석

1. 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한 지 1천 년이 지나도록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는 로마인을 자처한 황제들이 제국을 통치. 비잔틴 제국.
1.1 콘스탄티노플은 제국이 존속한 1천 년 가운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유럽의 나머지 기독교 세계의 특징이었던 가난, 문맹, 미신, 끝없는 전쟁 등과 대비되는 문명의 보루.
1.2 그러나 인류의 생계 유지 능력이나 지식에 보탠 것은 별로 없음. 모든 영역에서 로마 제국과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인이 알던 지식에 의존.(167)
1.3 몇 가지 기술 진보도 지배 계급에 사치품을 제공하기 위해서나 군사 용도로만 이용.(168)

2. 무엇보다 토지를 경작한 압도 다수 인구가 생계를 꾸려가는 데 사용하는 기술에서는 사실상 어떤 진보도 없었음. 농민이 아무리 허리를 졸라매도 국가 유지와 지배 계급의 사치에 쓰이는 잉여는 늘어나지 않았음. 이것이 비잔틴 사회를 정체하게 만든 근본 원인.
2.1 로마 제국은 동부가 가장 비옥한 농경 지대였기 때문에 살아남음(나일강 유역). 속주들의 경제는 지역의 대지주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자급자족 경제나 다름없었음. 그러나 제국 군대는 충분히 강력했고 조직력도 견고했기에 제국에 필요한 자금을 계속 받아낼 수 있었음.

3. 이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의 마지막 서부 정복에 나서고 성 소피아 성당을 완공한 지 50년도 안 돼서 붕괴할 뻔. 많은 군대, 갑작스런 공사량 증가, 황궁과 교회의 사치 때문.(170)
3.1 농민의 계속된 궁핍과 속주 도시들의 부유하지 않은 주민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제국의 모든 도시에서 경쟁 분파들 사이에 격렬한 충돌 일어남.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플과 소아시아 일부에 한정된 제국으로 축소. 인구도 줄고 학문도 퇴조.
3.2 축소된 제국은 지배자들이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해 경제를 재편. 국경 지방의 대토지를 잘게 쪼개 병사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아예 일개 군대를 국경 근처에 정착시키려 함. 이를 통해 민병대와 징세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
3.3 이런 식으로 제국의 심장부를 간직하고 10세기에 발칸 반도 일부를 되찾음. 그러나 체제의 근본 약점은 극복할 수 없었기에 11세기 중반에 다시 쇠퇴하기 시작.
3.3.1 고질적 모순: 세금을 매길 독립적 농민층 구축하려 했지만, 세금에 짓눌린 농민은 부유하고 힘 있는 자들에게 계속 토지를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음.(170)
3.4 제국 관료는 도시 대중의 독자적 조직화를 막는 데 성공. 상인과 장인들은 그들의 이윤을 강력하게 제한한 국영 길드로 편재.
3.4.1 이 때문에 강력한 부르주아지 성장 지체, 떠오르는 무역 시장은 외국 상인에게 빼앗김. 제국은 더욱 약화됨.
3.5 도시에는 여전히 노예제가 남아 있어,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 계급도 성장할 수 없었음.

4. 콘스탄티노플이 누린 영광과 지배자들이 가진 부의 이면에는 주민 대중의 가난이 있었음.
4.1 독립적 경제 기반이 없던 빈민은 독자 세력으로 활동할 수 없었음. 폭동을 일으켜 잠시나마 대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때조차 빈민들과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들이 빈민의 반감을 손쉽게 이용. ‘니케의 반란’
4.2 도시 대중의 독립적인 계급 요구를 차단하고 그것을 엉뚱한 곳(171)으로 비껴가게 하기 위한 제도화된 형태의 폭동까지 등장.
4.3. 값싼 곡물의 배급 체계가 붕괴한 12세기 이후에야 도시 거주자들의 계급 이익을 반영한 폭동들이 일어나기 시작. 장인과 상인들의 다양한 ‘길드’와 연합이 일정 구실을 하게 됨.

5. 비잔티움은 그리스-로마 문화의 마지막 보루로 살아남았지만, 생산에 기여하거나 조직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생산에 기생.
5.1 생산과 가까이 있어 잉여의 일부분을 떼어갈 수도 있는 다른 계급의 출현을 두려워했고, 이는 비잔틴 문화가 경직되고 메말랐던 원인. 또한 미신과 신비주의의 성행, 야만적 관습의 성행, 교회의 엄격한(172) 도덕주의에 따른 여성의 격리.
5.2 비잔틴 문명의 근본 약점은 4차 십자군 원정대의 약탈,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한 함락 등으로 이어짐.

6. 비잔틴의 특이한 문명은 1천 년 동안 보존. 그러나 지배 계급은 세리와 농촌 사제를 통해서만 노동 대중과 접촉. 이런 문명은 한 시대의 업적을 다른 시대로 전달하지만, 그 자신은 아무것도 보태지 못한 살아 있는 화석.(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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