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발제] 『식인의 형이상학』, 7,8장 발제문

작성자
dolbi
작성일
2020-01-28 17:51
조회
634
다른 링크: https://docs.google.com/document/d/1EPpE11b37q9WrbE8uCiB14RHP9bM5LHjrlQeIixdeOQ/edit

다중지성의 정원 인류학 세미나
<식인의 형이상학> 1월 28일 발제문
돌비 씀

1 강도적 혈통
7장은 부제인 강도적 혈통이라는 개념을 들뢰즈와 과타리로부터 이끌어낸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민족지 자료로부터 탈구조적 인류학의 재구축을 성취하지만 비베이루스가 보기에 들뢰즈와 과타리는 충분히 역오이디푸스적으로 멀리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변증법적 오이디푸스”, 151).
입구에서 비베이루스가 주목하는 개념은 강도적(=잠재적)인 것과 외연적(=현실적)인 것의 구별이다. 이 장에서 비베이루스는 들뢰즈와 과타리의 <자본주의와 분열증> 연작이 인류학 친족 이론의 동맹과 혈통을 재독해하는 과정에서 강도적인 것과 외연적인 것이라는 들뢰즈 개념체계의 대립물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평가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개념들은 <자본주의와 분열증> 1권인 <안티 오이디푸스>와 2권 <천 개의 고원> 사이의 가장 큰 이행을 이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145). 또한 비베이루스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풀어둔 실타래를 더 멀리 풀면서 인류학 자체를 변형할 가능성을 보고자 한다. “비인간주의적적 발전”(146), 다시 말해 “동맹과 혈통이라는 일반개념을 인간 바깥의 존재에게도 열려 있는 양태로 전환할 가능성을 찾는”(146) 것이다.
인류학 이론가로서 비베이루스는 먼저 친족이론에서의 형식주의, 실체주의적 형이상학을 거부한다(146). 대신 그는 ‘리좀적 개념화’, “차이와 다양체(포함적 분리접속으로서의 관계)로서의 친족 이론”을 상상하고자 한다(146-147). 비베이루스가 보기에 혈통은 실체와 동일성이라는 관념에 뿌리를 두고, (혼인) 동맹은 대립과 통합이라는 관념에 뿌리를 둔다(147). 여기서 염두되는 “형이상학적 개체로서의 그룹”과 “변증법적 전체로서의 사회”라는 괄호를 참고한다면 그가 거리를 두는 친족이론에서 혈통이 일종의 형이상학적 실체로 파악되는 사회의 단위이며, 동맹이 여성의 교환을 통해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사회의 전체성을 구성하는 관계 맺기로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47페이지에서 들뢰즈와 과타리가 참고한 수많은 민족지 정전 저자들의 이름표를 던진 후, 비베이루스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이들의 저작에서 “오이디푸스의 인류학적 일반화를 발견한다”(148)고 말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기입적 개념화’를 제안하는데, 비베이루스는 그것이 동시에 생산주의적 개념화라고 말한다(150). 다소 범람하는 개념들 사이에서 물살을 파악해보자. 150페이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식은 기입=생산의 기록=생산의 코드화=물신화된 사회체의 역실행이다. 여기서 내가 가장 먼저 풀고자 하는 매듭은 ‘생산의 코드화’이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생산이 형이상학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인, 개념과 사회체 양면의 연속을 생산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다시 그 생산 자체의 코드화가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코드가 문법, 다시 말해 규칙이라면 생산의 코드화는 생산의 규칙 자체를 생산하는 메타적 혹은 초월적인 표면 자체를 조건 짓는, 조직하는 일이다. 그런데 전 장에서 읽었던 것처럼 들뢰즈의 공식 n-1이 나머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초월적 일자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될 가능성(127)을 고려할 수 있다. 이 가능성을 염두한다면 초월적인 외부, 혹은 들뢰즈의 ‘평면’ 개념에 대응하는 보다 적합한 은유로서 고지 혹은 ‘고원’(이 은유와 함께 고원을 천 개로, 다수로 보는 의미를 곱씹을 수 있다)을 점유하는 초월적인 일자 혹은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생산 자체의 코드화라는 개념의 엄밀한 의미를 ‘물신화된 사회체의 역실행’과 함께 이해할 수 있다. 근본적인 내재성의 관점에서 사회체와 개념, 의미체계는 역사의 운동에서 빗겨나 있는 초월적인 구성요소 혹은 일자로서 ‘물신화’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물신화를 역실행할 수 있는데, 우리가 이 물신화를 피할 수 없고 물신화가 우리가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파악하는 필연적인 조건이라면 무엇이 진정으로 초월적인지를 새로이 정의하면서, 개념과 사회체를 새로이 생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서 물신화된 사회체의 역실행을 생산주의적 개념화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비베이루스는 들뢰즈와 과타리의 불충분함을 지적한다. 그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과타리가 칸트주의적인 비판 모델 그리고 변증법적 오이디푸스에 여전히 머무른다고 말한다(151). 다른 말로 그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반오이디푸스 이론에서 “혈통과 생산이 동맹과 교환보다 원초적”이라고 말한다(152). 다시 말해 여기서는 아직 실체가 관계에 앞선다. 그 증거를 대기 위해 비베이루스는 <안티 오이디푸스> 3장의 반구조주의적 전략을 검토한다. 여기서 기본 가정은 “혈통을 두 번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152). 비베이루스가 보기에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동맹(=관계)는 외연적(물신화된) 순간에만 나타나며 친족을 코드화하는 데에만 머무른다. 다시 말해 “강도적 친족에서 외연적 친족으로의 이행을 작동” 시키는 장치인 것이다(153).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공준으로 여기는 “선우주론적 혈통의 원초적 존재”(153)가 어떻게 우리에게 익숙한 내재성의 평면으로 이행하는가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도 ‘반신화’로 다뤄지기도 했던 도곤 신화[1]이다. 그러나 이 글만으로는 도곤 신화가 어떤 인류학적 의미를 갖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 장의 몇몇 구절을 통해 도곤 신화가 가지는 외재적인 의미들을 검토할 수 있다. 비베이루스를 따르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일하고 동일한 신화”가 아니며 로고스(아마도 유일하고 동일한 신화와 같은 의미값을 가질)와 다른 종류에 속하는 “동일한 타자”도 아니다(155). 비베이루스가 보기에 “반신화”(153)이자 “메타신화”(155) 신화인 도곤 신화는 “흔한” 타자로서 야생의 사유가 아니다. 여기서 도곤 신화는 서아프리카의 우주생성 신화로서 현지의 친족이론과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는 뉘앙스로 제시된다(155-156). 그러나 <안티 오이디푸스>의 사전 독서를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비베이루스는 거칠게 들뢰즈와 과타리의 직접 인용으로 건너 뛰어간다(157). 비베이루스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잠재적, 강도적 평면 위의 혈통과 혈실적 외연적 평면 위의 동맹에 관한 이론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했다고 본다(156). 다소 혼란스럽지만 이 대목에서 들뢰즈와 과타리에게 혈통(=실체)은 후험적 혹은 이차적인 것이 되며, 일차적인 것은 동맹(=관계)로 파악된다(157). 그리고 여기서 주어진 친족이론의 예 안에서 위 도식을 이해할 수 있다. “인척이란 혼인으로 맺어진 정치사회적 인물로서의 동맹자인데, 처음부터 가족 관계를 항상 사회적 장에 공외연적인 관계로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157). 이 설명을 들뢰즈와 과타리의 다음 문장과 함께 이해할 수 있다: “외연적 체계는 자신을 가능케 해주는 강도적 조건들로부터 태어나지만, 그 조건들에 역작용한다”(<안티오이디푸스> 국역본, 279). 외연적 체계, 달리 말해 앞에서 파악된 도식에서 발견할 수 있는 등가물인 ‘물신화된 사회체’는 강도적 조건(=잠재적, 강도적 평면) 위에서 태어나지만 그 조건들에 역작용(물신화 혹은 실체화)한다. 그로 인해 실체화된 외연적 체계는 “그것들(=강도적 조건들, 발제자)을 무효화하고 억압”한다. 다시 친족이론의 예로 돌아가 본다면 친족 혹은 가족은 이미 항상 실체인 친족이론의 원자적 단위가 아니다. 가족은 오로지 혼인이라는 정치사회적 동맹(=관계)를 통해서만 “사회적 장” 혹은 사회체에 공외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157). 여기서 공외연적, 다시 말해 서로 외연적이라는 개념은 가족과 사회적 장이 자족적인 실체가 아니라 혼인이라는 동맹을 통해서 서로를 관계적으로 공동구축하는 다양체들임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실체화, 물신화라는 서구적이고 오이디푸스적인 조건에서 외연적 체계는 “신화적 표현으로만”(157) 나타난다. 비베이루스는 들뢰즈와 과타리를 인용하며 신화가 표현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 지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화의 강도적 평면은 동맹을 모르는 전근친상간적 혈통에 의해 채워진다”(158). 그렇다면 우리의 방향도 명확하다. 표현들을 조건 짓는 조건으로서 n번째 원소인 일자가 제거된 반신화를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리좀적 친족이론, “”친족의 원자”를 서술하기를 포기하고, 그것을 포함적 혹은 비제한적인 분리접속의 용어(“…이든 …이든”, “그리고/또는”)로 다시 정식화”(161)는 모두 같은 목표를 지시할 것이다.


2 포식의 형이상학
8장은 비베이루스가 아마존 민족지학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경유해 구조주의를 거슬러 읽는 독해를 제안한다. 비베이루스는 희생 제의를 국가 형성에 필수적인 신학-정치적 장치라고 본다(170). 그렇다면 프랑스 사회학 교과서에서 여전히 “초월성의 대리자라는 원형적 사제의 모습을 띠는 것처럼”(171) 보이는 샤먼은 국가에 대항하는 것으로 보이는 아마존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비베이루스는 아라웨테인 종족지학과 희생 개념의 연결을 포기하지는 않는다(171). 그러나 비베이루스는 아라웨테인의 우주론과 사후 식인 풍습 사이의 관계를 희생 개념 곁에 나란히 놓는다. 우선 투피남바인으로부터 시작해보자. 투피남바인의 식인 풍습은 “적대자를 포획해 처형하고 의례에 따라 먹어 치우는 매우 정교한 체계를 필요로 했다”(171-172). 투피남바인은 같은 언어와 풍습을 지닌 다른 집단에서 전쟁 포로를 잡아왔는데 포로를 처형하기 전에 좋은 대우를 제공했으며 처형 직전까지 자유롭게 살게 할 뿐 아니라 자신들 집단의 여자들을 포로들에게 아내로 주기까지 했다고 한다(172). 여기서 여성의 이동, 교환 혹은 혼인 ‘동맹’을 통해 “포로는 누이남편으로 변형되었다”(172). 게다가 식인 제의와 처형의 집행자는 포로를 먹지 않을 뿐 아니라 포로의 장례를 치르기 위한 은둔 추모 생활 기간에 들어가기까지 한다. 비베이루스가 보기에 그는 자신이 처형한 적대자와 자신을 ‘동일시’한 것이다(172). 분석은 계속 이어진다. 비베이루스는 투피남바인의 제의를 변형한 새로운 화용론을 확립한 아라웨테인의 제의를 통해 희생 제의 가설에 반박을 제기한다. 통상적인 희생 제의 모델에서 희생물은 포식자 그룹에 속했던 망자들의 정신에 보내진다(173). 그러나 아라웨테인의 식인 풍습과 연결되는 아라웨테인 종말론 담론에서 포식하는 자들은 죽은 아라웨테인들이 아니라 천상의 신들이며 죽은 아라웨테인들은 신들에게 포식당하며 신들과 마찬가지로 불멸의 존재자가 된다(171). 정리하자면 1) 포식자: 천상의 신들 2) 종말의 시간에 신들에게 포식당하는 죽은 아라웨테인: 희생되는 전쟁 포로이다(173).
그렇다면 아마존의 식인 풍습에서 섭취되는 것은 진정으로 무엇인가? 망자들에게 적대자들의 살점이 보내지는(희생 제의) 대신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비베이루스가 보기에 인육은 양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고, 물리적이거나 형이상학적 효력이 부여되었다는 증언도 드물다고 말한다. 여기서 섭취된 몸은 그저 몸이었을 뿐이다(175). 그러나 비베이루스는 그 신체가 몸이면서도 동시에 순수한 위치 값을 가지는 기호라고 말한다. 비베이루스가 보기에 흡수된 것은 바로 적대자와 포식자의 순수한 관계적 위치 자체, “’자신’에 대한 시점으로서의 그 타자성”이다(175). 이것과 연관되는 흥미로운 증거는 아라웨테인의 전쟁 노래다. 비베이루스는 아라웨테인의 전쟁 노래에서 전사가 잡아먹힌 적대자의 시점에서 ‘자신’을 죽인 아라웨테인 포식자들에 관해 노래한다(176). 그리고 비베이루스는 “희생자의 시선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는” 주체성의 구축 장면을 통해 관점주의를 정의하는 것이다(176).
사회체(corps social)의 내부성은 외부의 영혼, 인격, 전리품, 말과 기억, 그리고 우리의 맥락에서는 포로의 살점을 포획함으로써, 포식함으로써 구성된다. 적대자에 속한 특성들과 일체화 혹은 동일화하는 운동 논리 자체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주체성을 정의하는 것이다(177). 여기서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이 지시하는 것과는 직관적으로는 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 등장한다. “원시사회란 내부가 없는 사회로서, 오로지 자신의 외부에서만 “자기 자신”이 되는 데 성공한다”(178). 그러나 내부를 통해 정의되는 사회체 혹은 주체를 실체로서의 혈통과 등치시킨다면 순수하게 외부를 통해서만 관점과 주체성을 구축하는 사회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순수히 동맹과 관계를 통해 정의되는 형이상학이 여기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식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상 여기서 관계 개념은 동맹의 단단한 연결의 이미지보다는 포식의 조각난 뼈와 살점 그리고 이들을 섭취하고 소화하는 입과 위장의 이미지와 함께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식인은 포식자와 제물 사이에 “식별불가능한 지대를 창조하는 비정의indefinition 운동을 함축”(185)하게 된다. (나는 비정의 보다는 공외연의 생산으로서 역정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더 좋을 것 같다.)



[1] https://afrikhepri.org/ko/la-mythologie-des-dog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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