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발제문(정현용)

작성자
영대
작성일
2020-06-02 19:28
조회
459
파리의 몸부림에 거미줄이 흔들린다. 모습을 드러낸 거미가 파리를 향해 긴 다리를 드리운다. 거미는 어떻게 파리를 인지하는걸까? 그 원리를 이해하자 했던 한 생물학자는 파리 대신 거미줄에 대고 쇠말굽을 두드렸다. 역시나 거미는 모습을 드러냈고, 쇠말굽이 일으킨 진동의 가장자리를 맴돌면서 있지도 않은 파리를 한참이나 찾아 헤맸다. 생물학자는 물리적 진동이 거미의 행동을 촉발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각각의 물리자극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사전에 해부학적으로 전제된 대차대조표 -기계와 같이- 과학이 물어야 할 것은 생명체의 내부가 아닌 외부라는 상상력은 그렇게 상식이 되었다. 만약 그 생물학자가 거미에게는 표상 능력이 있으며, 다만 거미는 쇠말굽의 진동과 파리의 진동 양자 간의 차이가 표상되지 않는, 우리와는 다른 기호 체계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신중한 결론을 내릴 용기가 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생명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스스로 테두리 지은 세계의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을까.
콘은 비인간 존재와 인간이 맺는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강고한 분석 방법을 제안함을 이 책의 목표 중 하나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을 예외적인 것, 즉 나머지 세계와 근본적으로 분리된 존재로 취급해온 방식을 비판하는 이들 포스트휴먼적 비평에 기여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지금가지 포스트휴먼적 비평들이 제안해 온 방식, 즉 유일신 신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나치게 존재 간의 본질적 차이를 무화하는(동정적 다원주의) 방식에는 이의를 제기한다. 그가 볼 때 포스트 휴먼적 재고의 시작은 지점은 표상과 기호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 선입견에서 부터다. 그는, 기호 > 표상 > 마음에 대한 재고는, 우리를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는 인류학”으로 이끌어 줄 것으로 믿는다.
단지 그것이 익숙하다는 이유 때문에, 표상은 인간 언어의 작동 방식과 자주 혼동되곤 했다. 언어적 표상은 관습적이고, 체계적으로 상호 연관되며, 지시대상과 “자의적으로” 관계 맺는 기호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표상 과정이 이러한 특성을 지닌다고 가정하곤 한다. 그러나 관습에 기초하는 그러한 상징적 기호들은 인간 표상 형식이자 인간 언어를 가능케 하는 특정을 지닌 것으로서, 실상은 그와 다른 표상 양식들에서 창발하며 다른 표상 양식들과 연관되어 있다.
콘은 퍼스의 기호론을 경유하여, 광대한 비인간적 우주의 작동과 논리 속에 오히려 인간적인 표상 과정을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적인 것 너머로 나아간다. 1장에서, 콘은 루나족에 대한 민족지적 관찰사레를 퍼스 기호학의 관점에서 분석함으로써, 루나족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이면서, 아니 오히려 그들의 삶에 분명한 구성능력을 행사하는 ‘언어’ 너머의 표상 형식들을 탐구한다. 인간은 상징적 기호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숲에 떠돌아다니는 다른 기호 양식들을 그 밖의 비인간적 생물체들과 공유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은 인간적인 것이 어떻게 인간적인 맥락 너머에 놓여 있는 것의 산물이기도 한지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탕, 총 소리가 울려퍼지자 한 무리의 목도리패커리들이 우거진 덤불틈에서 빠져나와 강으로 도망가고… “추푸”. 추푸란 어떤 것이 물에 맞닿은 후 물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는 모습을 가리킨다. 일단 이 단어를 사용하는 이와 그 이미지를 공유하자마자, 우리는 즉시 그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느끼게 된다. 우리는 그동안 개념은 차이에 기반하고, 차이는 역동성의 엔진이 된다-고 대체로 믿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동일성을 통해 존재감을 갖는 언어 추푸, 이 낯설고 짤막한 유사 단어가 전적으로 언어적 맥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 당연하고도 사소한 사실은 맥락을 통해 인간적인 것을 이해한다는 인류학적 기획을 뒤흔든다. 퍼스에 따르면 추푸는 다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그 자체로 자명한 것이다.
카우상기추 같은 말은 언어라는 저 특유의 인간적인 의사소통 체계 속에서 역사적으로 우연히 얽힌 문법적, 통사적 관계들을 퉁해 그 말이 다른 말들과 불가분하게 결합되는 방식 덕분에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퍼스를 따라 모든 기호가 언어와 유사한 특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적 맥락에 의해 제약되는 상징적 언어체계 또한 경계 너머에서 밀려들어오는 숲의 기호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기호를 사용하는 존재는 인간만이 아니라는 진정한 숲의 현상에 진입하게 된다.

<세계 안에 있으며 세계에 속해 있는> 모든 기호는 어떤 식으로든 세계에 관한 것이다. 기호는 “재=현전시킨다(re-present)”. 기호는 바로 옆에 있지 않은 무언가에 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기호는 또한 중요한 방식으로 세계 안에 있다(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표상에 대한 관념론과 경험론은 모두 잘못된 진단이다. 퍼스가 볼 때 관념론은, 해석자의 사고가 세계에 가득찬 기호작용의 연쇄 속에 자리함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잘못되었고(EX. 차이가 아닌 동일시), 경험론은 우리가 상징이라고 부르는 추상적 증류작업 이면에 이미 아이콘과 인덱스라는 기호적 추론작용이 익명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접근이다(순수한 감각적 질료란 이상적인 것).
[아이콘] 추푸는 그것이 표상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 기호매체(즉 기호의 역할을 하는 것, 여기서는 추푸의 음향적 성질)와 대상(여기서는 이 단어가 흉내내는 강물-속으로-뛰어듦) 간의 차이가 간과되는 방식 덕분이다. 가령, 2진법으로 짜여진 컴퓨터 프로그램과 화면의 아이콘은 전혀 별개의 것이지만, 우리가 그 둘의 차이를 간과하는 한, 아이콘은 컴퓨터 프로그램과 동일시된다. 퍼스는 이러한 닮음의 기호를 ‘아이콘’이라고 불렀다. 추푸는 차이에 대한 주의의 부재로 인해 의미를 갖는다. 어떠한 것을 고유하게 만드는 무수한 특성을 간과함으로써 매우 제한된 일련의 특성이 증폭되는데, 여기서는 행동을 흉내내는 소리 또한 이러한 특성을 공유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한 증폭이 일어난다(차이에 기반하는 표상 이론들 = 상징의 작동방식 맹신 = 차이, 맥락을 넘는 세계의 기호작용 간과).
[인덱스] 사냥꾼에게 몰려 무리를 잃고 홀로 남겨진 아기 양털원숭이는 거대한 야자나무의 가지 사이로 몸을 숨겼다. 원숭이를 위협하기 위해 사냥꾼이 주변의 나무를 쓰러뜨리기 시작하자, 쿵-하고 쓰러지는 소리 혹은 일대에 울려퍼지는 불길한 진동은 즉각 원숭이가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오게 했다. 이때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 이 사건은 그 자체로 일종의 기호이다. 인덱스로서 그것은 원숭이에게 비록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여하간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아이콘이 그것이 표상하는 실체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무엇이라면, 인덱스는 사실 “그 자체”를 수반한다(상황, 사건을 얽어 들어감). 대상과 공유하는 유사함을 통해 표상하는 아이콘과 달리, 인덱스는 대상과의 실재하는 연결을 통해 표상한다.
혹자는 사냥꾼의 잡아당기는 힘이 넝쿨을 통해 전파되어 문자 그대로 원숭이의 안전 감각을 뒤흔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숭이가 이 잡아당김을 어떻게 하나의 기호로 받아들이는지는 원인과 결과의 결정론적 연쇄로 환원되지 않는다(기계). 원숭이가 나무 꼭대기의 흔들림을 반드시 어떤 것의 기호로 인지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숭이가 그것을 기호로 인지한다면, 이때 원숭이의 반응은 넝쿨줄기를 따라 전파된 잡아당기는 힘의 효과 이상의 어떤 것일 것이다. 인덱스가 감지되려면 해석자가 어떤 사건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또 다른 잠재적 사건을 연결해야만 한다. 원숭이는 나무 꼭대기의 움직임을 기호로서, 즉 그것이 나타내는 다른 무언가와 연결된 것으로서 받아들인다. 인덱스는 우리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잠재적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가령, 인덱스를 통해서만 마침내 확인할 수 있는 일; 즉 사건이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해석자의 입장에서는 ‘부재’하는 일)을 연결하라고 부추긴다.

<살아있는 기호들> 기호들은 살아있다. 쓰러지는 야자나무는 성장할 수 있는 한 살아있다. 그것은 가능한 미래로 확장되는 기호적 연쇄 속에서 후속 기호에 의해 해석되는 한 살아있다(> 앞에서, 죽은자). 놀란 원숭이가 더 높은 나무 꼭대기로 뛰어오르는 것은 이 살아있는 기호적 연쇄의 일부이다. 살아있는 기호 과정을 통해 하나의 사고가 또 하나의 사고를 낳고, 또 하나의 사고는 순차적으로 또 다른 사고를 낳으며, 그렇게 해서 기호작용은 잠재적인 미래로 이어진다. 이것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가능성의 영역에 존재하는 방식까지도 담아낸다. 모든 기호작용은 결국 세계 속에서 일을 하기(do things) 때문에, 기호작용의 살아있음은 정신 안에서만 실재하거나, 정신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우히려 우리가 정신 혹은 자기라고 부르는 것은 기호작용의 산물이다. 쓰러지는 야자나무의 의미를 파악한느 누군가는, 그가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이 기호 및 다른 많은 기호들의 해석을 위한-그러나 덧없는- 처소가 되는 방식 덕분에 시간의 흐름 속에서 때마침 삶을 시작하는 자기이다. 자기는 기호들의 해석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그러한 기호들의 산물이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단순하든 복잡하든, 자기들은 미래의 자기를 낳는 새로운 기호 해석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기호 작용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자기들은 기호 과정의 경유지이다.
때마침 삶을 시작하는 자기들은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숲 속에서 쓰러진 야자나무는 이 살아있는 세속적 기호작용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창발하는 자기들의 생태학에 뿌리박고 있다. 어떤 의도에서 나무는 쓰러지고, 쓰러지는 충격음은 다른 존재의 삶을 변화시킨다. 그 안에는 나무의 삶도 얽혀들어간다. 여기서 창발하는 것은 고도로 매개되어 있으면서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연쇄이다. 그처럼 열대에서 일어나는 종-횡단적인 의사소통의 시도는 기호 작용의 살아있는 세속적 본성을 드러낸다. 모든 기호작용은 세계-내-정신 속에서 일어난다.

<부재>기호에는 물질성이 있다. 기호는 감각적 성질을 소유하며, 기호를 생산하는 동시에 기호에 의해 생산되는 신체로 구체화되며, 사건 향방에 개입한다. 그러나 기호는 비물질적이기도 하다. 플라스크는 존재하는 것과 관계하는 만큼 부재하는 것과도 관계한다. 플라스크에서 배제된 다른 모든 것들 덕분에 플라스크 내부에서는 특정한 종류의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책에 소개된 총 쏘기 직전의 외침, 테에에예는 3가지 측면에서 부재를 수반한다. 부재1: 먼저 그 입모양은 날숨이 유성음으로 발음되었다면 만들어졌을 그 외의 많은 소리들을 효과적으로 모두 소거한다. 부재2: 물리적으로 눈 앞에 있지 않은 대상이 두 번째 부재를 구성. 부재3: 아직-없는 미래를 현재로 들여오기(희망). 톄에에에라는 말을 통해 세상으로 발을 들이는 것들 중에는 비단 물리적 실체가 있는 대상 뿐 아니라, 비물질적인 것들도 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기호는 어떤 방식으로든 미래와 교통한다. 그로부터 미래는 분명히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구성적인 부재: 그것은 공간적으로 혹은 시간적으로 눈앞에 있지 않은 것과 맺는 어떤 종류의 관계이며 생명 작용과 모든 부류의 자기에게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구성적인 부재가 가리키는 것은 마음의 세계(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세계)에서는 무-즉 존재하지 않는 것-도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기이한 측면이다.
마음의 세계에서 구성적인 부재는 부재하는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주는 특정한 매개 방법이다. 이는 생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목적성-어떤 것이 현재 속에서 실존하기 위해 필요한 미래-을 실재적인 인과적 양식 중 하나로 간주해야 하는 적절한 이유다. 현존하는 것과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부재 사이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대화작용이 기호에 생명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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