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1/10 『프루스트와 기호들』 ,2부, 5장 문체

작성자
bomi
작성일
2020-01-10 17:01
조회
584
다지원 기획세미나, 삶과 문학. ∥2020년 1월 10일∥보미
『프루스트와 기호들』 질 들뢰즈, 서동운, 이충민 옮김, 민음사, 1997. p251~262

제 2 부 문학 기계
제 5 장 문체

1. 완전한 조각들
『찾기』의 부분들은 조각 난 채이며 파편화되어 있지만 <이 부분들에게 부족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251)

2. 부분(조각)으로서의 시간
시간은 그 자체가, 전체화를 막는 심급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어떤 전체일 수 없다. (252)

3. 부분(조각)으로서의 관점
<해석하기>는 대상 못지않게 주체도 분해한다. (주체가 가지고 있는) 연상의 사슬 전체는 주체보다 상위에 있는 어떤 관점을 위해서 폐기되어 버린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이 관점들, 즉 진정한 본질들이라고 해서 통일성이나 전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252)
본질의 지위를 규정해 주는 것은 개인들(각각의 예술가들) 자체보다 상위에 있으면서 개별화시켜 주는 관점인 것 같다. 이 관점은 개인들의 연상의 사슬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이 연상의 사슬이 나타날 때 이와 <함께 나란히> 등장한다. 이때 이 관점은 막힌 부분 속에서 구현되며, 자기가 내려다보는 대상에 <인접해> 있고 또 자기가 보여 주는 대상에 <인접해> 있다. - 성당의 예 (253)

4. 푸르스트가 제기하는 여러 층위의 문제들. (254)
1) 한 작품의 통일성을 이루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2)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작품과 <소통>할 수 있게끔 해주는가?
3) 만약 예술에서 통일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이루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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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유기적 전체성으로서의 로고스, 그리고 논리적 통일성으로서의 로고스를 배제한다.
그러나, 다수성의 통일인 전체성, 이런 조각들의 통일체로서의 전체성은 존재하며 또 존재해야만 한다. 이때 一者는 多者들로부터 생기는 <효과>일 것이다.
전체(일자)는 원리로서 작동하는 게 아니라 효과로서 작동할 것이다.
2) <소통>은 원칙적으로는{부분들을 통합하는 원리로서의 一者로부터는} 주어지지 않겠지만 기계들과 그 부품들의 작동으로부터, 기계들의 소통되지 않는 부분들로부터 생겨날 것이다.
프루스트에게서는 통일성, 전체성, 소통은 기계들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으며 미리 마련된 저장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255)
3) 예술 작품의 통일성도 논리적인 통일성이나 유기적인 전체성이 아니다.
발자크의 천재성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실제로 발자크의 『인간 희극』의 통일성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생겨난다. 발자크에 의해 통일성은 그의 책들의 <효과>로서 발견된다. (255)
발자크의 一者나 전체는 부분들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나 일자가 생겨났다고 해서, 분열되어 있고 서로 조화되지 못하는 그 부분들의 성격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일자나 전체는 그 자체가 다른 부분들과 함께 나란히 있는 한 부분, 다른 부분들 옆에 나란히 인접한 한 부분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이 통일성은 작품 전체에다 유약을 바르는 일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펜을 들어 가하는 국부적인 수정으로 나타난다. (256)

4. 프루스트의 문체 - 비문체
프루스트의 문체는 묘사하려 하지도 않고 무언가를 연상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257) 그의 문체는 펼치는 일을 하다. 즉 문체는 이미지들을 가지고 펼치는 작업을 한다. 그 문체는 주체가 부재하는 순수한 <해석하기>와 뒤섞인다. 또 그 문체는 문장의 내부에서 문장에 대한 관점을 증식시킨다. 그러므로 이것은 비문체 non-style이다.
문체는 곧 기호들의 펼침이다. 여기서 기호들은 각기 자신의 고유한 연상의 사슬을 따라 서로 다른 속도로 전개된다. 이때 기호들 각각에 있어서 문체는 관점으로서의 본질이 파괴되는 지점에까지 이른다. (258)

5. 펼치는 일을 하는 문체의 <효과>; 예술에서의 생산
두 개의 대상이 주어지면 <문체는 부분적 대상들을 생산한다>. 즉 문체는 <그 대상들을> 서로가 서로 안에 포함되어 있는 부분적 대상으로서 생산한다. 그 다음 <문체는 공명의 효과들을 생산하고 강요된 운동들을 생산한다.> 바로 이것이 문체의 산물인 이미지이다.
그런데 문체는 결코 인간에게 속하지 않고 언제나 본질에 속한다. 다시 말해 문체는 절대로 하나의 관점에서 생기지 않는다. 문체는 한 동일한 문장 속에서 무한한 계열을 이루며 공존하는 관점들로 만들어지며, 이 관점들을 따라 대상은 해체되거나 서로 공명하고 또 확장된다. (259)
{프루스트-한 인간-의 문체는 비문체다. 따라서 생산할 수 있다. 한 가지 스타일의 확고한 문체를 지닌 작가는 예술에서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 작품의 통일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문체가 아니다. (260)

6. 다시 제기되는 문제: 모든 <단일화>로 환원될 수 없으며 <나중에 오는> 이 매우 특별한 양태의 통일성이란 어떤 것인가?
수많은 카오스들로 변해 버린 한 세계에 있어서 통일성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예술 작품의 형식적 구조뿐이다. 이때 이 구조란 결코 다른 것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것이며, 또 [처음부터가 아니라] 나중에야 통일성의 구실을 한다.
따라서, 모든 문제는 이 형식적 구조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이 구조가 없었다면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부분들과 문체의 통일성이 어떻게 해서 이 구조에 의해 주어지는지를 규명하는 데 있다.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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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찾기』의 형식적 구조; 새로운 언어적 규약: 횡단성
횡단성은 한 풍경에 대한 여러 관점들을 단일화하지 않고도, 횡단성 자신의 고유한 차원에 의거해 그 차원 안에서 관점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의 차이나 간격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이 두 방향의 독특한 통일성과 전체성을 만들어 주는 것도 바로 횡단성이다.
이 횡단성은 문장 전체를 가로지르고, 책 전체에 있어서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옮겨간다.
이 횡단성의 차원에서 통일성과 전체성은 대상들이나 주체들을 단일화하거나 전체화하는 일 없이 그 자체만으로 정립된다. (261)
(시간도 횡단성으로 작동한다.) 『찾기』에서 시간의 차원은 관점들이 서로 침투하게끔 하고, 이제껏 막혀 있던 관들을 소통시킨다. 오데트는 스완과 소통하고 어머니는 화자와 소통하며 알베르틴도 화자와 소통한다. 그리고 <펜을 데는 것>{나중에 오는 통일성}으로서 늙은 오데트가 게르망트 공장과 소통한다. 바로 이런 것이 화자의 차원인 시간이다. 이 시간은 부분들을 전체화하지 않으면서 이 부분들<의> 전체일 수 있고, 부분들을 단일화하지 않으면서 이 부분들 모두<의> 통일성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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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간, 플라톤] 책 목록
* 니체, 『플라톤의 대화연구 입문』 - 『파이드로스』
* 심슨, 『예술로서의 삶』 - 『향연』
* 푸코, 『주체의 해석학』 - 『알키비아데스 1』
* 기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 『국가』
*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 『소크라테스의 변론』
* 네그리, 『예술과 다중』 - 『티마이오스』
* 조정환, 『예술인간의 탄생』 - 『소피스테스』


우리는 플라톤의 '철학' 보다는 플라톤의 '철학함'에 더 관심을 가진다.

우리는 플라톤을 예술인간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만든다. 이 작업은 철학사의 한 인물인 플라톤을 '내'가 '자유롭게' 예술인간으로 구성해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가 이미 가진(혹은 가졌다고 착각하는) 플라톤 해석자의 자리, 혹은 그 주체가 지닌 사슬이 해체된다.

우리는 플라톤을 '예술인간'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 관점은 플라톤의 부분들을 새롭게 통합하는 하나의 관점이 아니다. 이 관점을 통해 개별화한 독특한 하나의 플라톤 (예술인간 플라톤)은 <그 자체가 다른 부분들(다른 플라톤들)과 함께 나란히 있는 한 부분, 다른 부분들 옆에 나란히 인접한 한 부분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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