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후기] 10/2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세 번째 시간

작성자
coosh83
작성일
2019-10-19 02:54
조회
421
10/25 공지>

10월 25일(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세 번째 시간입니다.
함께 읽을 범위는, 민음사 판본으로 p.p.199~304입니다.

- 인상적인 부분,
- 공감 가는 부분,
- 그냥 좋아서 낭독하고 싶은 부분...
등을 미리 체크해 세미나 시간에 소개해 주시면 그를 바탕으로 함께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한 문장도 좋고, 한 단락도 좋고, 한 페이지 혹은 몇 페이지여도 좋습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3장 배움>도 함께 공부하겠습니다.(종석??님 발제)
저녁 7시 30분, 다중지성의 정원 3층 세미나실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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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미나 후기>
2019_10_18

● 들뢰즈와 프루스트의 상이한 관점들에 관하여
- 들뢰즈의 입장은 누구나 낭비의 시간을 순간이 온다고 이야기하지만, 프루스트는 사유나 철학을 무시하지 않고 이야기하면서 동시적으로 양가적 입장을 취하는 것 같음.
- 프루스트 누구나 작가가 될 있고, 독서에 대한 것도 강조하는 것 같은데 들뢰즈의 글을 보게 되면, 공부가 가치 없게 느껴진다.
- 들뢰즈는 선의지에 대한 것에 대해 격하,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 프루스트는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에머슨이 플라톤을 참고하는 습관처럼 그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듯하다.
- 사유는 선한 본성을 자연적으로 타고 나지 않는다.

● 진리와 기호, 폭력성과 관련하여
- 오직 기호가 자극할 때만, 그 자극에 대한 사유는 그 기호에 대한 해석을 시작한다.”
- 들뢰즈에게 진리는 선 의지의 산물이 아닌, 사유 안에서 행사된 폭력의 결과이다.
- 진리란 어떤 사물과의 ‘우연’한 마주침에 의존하고 이것은 우리에게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 “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 들뢰즈는 진실을 찾는 것은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4구조로 구분된 복수의 시간성
- 먼저 존재들을 변화시키고(변질) 존재했던 것들을 없애버리는(소멸) ‘잃어버린 시간’이 있다.
- 이 잃어버린 시간(수동적)은 시간을 낭비한다는 측면에서 ‘잃어버리는 시간’(자발적 탕진)으로 분화될 수 있다.
-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우리는 ‘되찾는 시간’(의지적)을 가지며, 영원성의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다.
- 예술의 기호이자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이기도 한 ‘되찾은 시간’(마들렌, 포석처럼 비자발적인)이 있다.
- 여러 기호들은 그에 상응하는 특권적인 시간 선을 가지면서도 불균등하게 여러 가지 시간선에 참여한다.

● 들뢰즈가 설명하는, 시간 흐름 안에서의 변질과 소멸 즉 ‘잃어버린 시간’ 측면에서의 세 기호들의 특성들
- 그는 사교계의 기호들은 일시적이고 덧없으며 공허한 성격을 지녔다고 말한다. “이 기호들은 자기가 변질되어 가는 것을 숨기기 위해 미리부터 꼼짝 않고 고정되어 버린다.”(가면들의 전시장). 하지만 사교계란 매순간 변질되며 변화할 수밖에 없다.
- 반면 사랑의 기호들은 변질과 소멸을 앞서가는 속성을 가진다. 이러한 점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감싼다고 볼 수도 있다. 들뢰즈는 사랑이 미래를 향해 파국을 반복한다는 측면에서 질투의 장면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가 생겨나며, 사랑의 세계는 거짓말을 드러내는 기호라고 말한다.
- 들뢰즈는 감각적 기호가 ‘되찾는 시간’의 풍요로움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시간’의 기호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비자발적인 기억이 우리에게 영원한 이미지를 주지 않고 죽음의 격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문제 삼고 있다. 들뢰즈는 양면감정을 감각적 기호 속에서 발견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 다음으로 들뢰즈는 ‘잃어버리는 시간’ 즉 헛되이 낭비하는 시간의 기호들 속에서 사교계의 기호들, 사랑의 기호들 그리고 감각적 기호들을 설명하는데 그는 자발적인 의지가 노력해서 수행하는 노동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 진리는 추상적인 가능성 이외에 별로 많은 것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 진리(진실?)에 대하여
- 들뢰즈에 따르면, 진실은 헛되이 보내 버린 시간 안에 있는 것이며(들뢰즈의 내재성), 그것은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는 것
- 고통은 진리를 찾도록 요구함.
- 사랑은 우리를 반복적으로 고통스럽게 하지만 관계가 깨진 그 사슬은 지성의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지성 덕분에 우리는 처음에 몰랐던 사실, 즉 진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시간을 헛되이 잃어버린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미 기호들을 배우고 있었다... 우리의 게으른 삶이 바로 우리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전 생애가 ... 하나의 천직이다.”(되찾은 시간,899)
- 곧 하게 될 제3장 <배움>에서 ‘프루스트의 작품은 ... 미래와 배움의 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처음엔 어떤 것을 몰랐지만 점차적으로 그것들을 배워가는 마침내는 어떤 최종적인 계시를 얻는다는 점이다.(p.53) + [진리란 이런 식으로 얻어진다는 점에 대해] <처음에 프랑수아즈는 내게 실례를 들어 보여 주었다. ([그러나] 나는 훨씬 나중에야 [이 점을] 이해하게 되지만……)>(p.58.)
- “우리 시대의 가장 비범한 걸작들이 ... 아카데믹한 교육에서 나오지 않고 경마장과 고급 술집에 자주 출입하는 자들 쪽에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웠다.”(알베르틴,607) 들뢰즈는 ‘잃어버리는 시간’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에서도 진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하는데, 프루스트는 이 진리를 ‘지성의 진리’라고 부른다.
- 이 진리는 필연성이 결핍되어진 자발적인 선 의지의 지성이 아니라 예술이나 문학에서 오는 지성이다. 이 지성은 ‘이전’이 아니라 ‘나중에’ 돌발적으로 찾아온다.
- 들뢰즈는 이 모든 차원들이 합쳐지고 진리를 발견하는 곳은 예술작품의 절대적인 시간 속인 ‘되찾은 시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진실 찾기의 집단들인 기호의 세계들은 진정한 배움의 선인 시간선들을 따라 펼쳐지는 것이다.

● 오데트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에 관하여
- 스완이 오데트를 사랑하는 것은 권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p.72)인 것인가? 사랑은 결국 자신을 보호하려는 어떤 도구가 아닐까?
- 프루스트는 평범한 여성이 지적인 여성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의 세계를 풍족하게 해준다고 고 하는데 이에 대해 들뢰즈는 이에 대해 불안전한 재료와 물질들이 기호로서 더 풍부하고 그것들이 우리와 결합할 때 우리를 황홀하게 만들어주기 때문.
- 다시 말해서, 평범한 여성은 이해가능하며 분명한 내용으로 소통되는 것이 아니라 해독해야만 하는 기호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음.
-오데트는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고, 해석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 소악절에 관하여
- “이 뒤부터 스완은 오데트만 보면, 소악절이 울리고 그녀에게 반복하여 연주하게 했다.”
- 소악절은 두 사람의 마주침, 사랑의 매체/도구가 된다.
- p.61. 그는 악절을 그 제체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베르뒤랭 부부나 젊은 피아니스트에게서 오데트와 그를 동시에 연상해 주는, 그들을 맺어 주는 사랑의 정표나 기념품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소나타 전곡을 어느 음악가에게 연주시켜 보겠다는 계획은 오데트의 변덕에서 우러나온 청에 못 이겨 단념했고, 그래서 그는 여전히 소악절밖에 알지 못했다. “그밖에 무엇이 필요해요? 이것이 우리 곡인데요.”하고 오데트가 말했다.
- p.92. 오데트는 피아노를 아주 서투르게 쳤지만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작품의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는 서투른 손놀림으로, 또는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에서 연주되는 틀린 음들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법이다.
- 둘은 소악절을 함께 듣는 것을 통해 충만한 결합을 느꼈을 것. 기호에 민감해지는 과정...오데트에게 민감해지는 과정이 그려진 것

● 소외되고 있으나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스완
- 베르뒤랭이 원하는 타이밍에 그들이 기뻐할 만한 언어를 표현해야 그 모임에 초대될 수 있지만, 스완은 그러지(멋드러지는 표현에 확실한 리액션을 해주어야 하는 것을) 못했음.
- 오데트에게 있어서 본질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마도 베르뒤랭측에서도 그럴 듯.)
- 그러나 스완은 소외를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함( p.143 스완은 베르뒤랭 집에서 이렇듯 자시니 은총을 잃고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으며, 자신의 사랑을 통해 그들의 우스꽝스러움을 계속해서 아름답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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