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11/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p.305~끝까지

작성자
bomi
작성일
2019-10-30 03:13
조회
302
11/1 공지>

11월 1일(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네 번째 시간입니다.
함께 읽을 범위는, 민음사 판본으로 p.305~끝까지 입니다.

- 인상적인 부분,
- 공감 가는 부분,
- 그냥 좋아서 낭독하고 싶은 부분...
등을 미리 체크해 세미나 시간에 소개해 주시면 그를 바탕으로 함께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한 문장도 좋고, 한 단락도 좋고, 한 페이지 혹은 몇 페이지여도 좋습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4장 예술의 기호들과 본질>도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이번 주 발제자는 현덕님입니다.
저녁 7시 30분, 다중지성의 정원 3층 세미나실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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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 후기>

*최후의 계시와 환멸, 그리고 배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3장 배움>의 첫머리에 들뢰즈는 미래와 배움의 진전을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이 마침내는 얻게 되는 최종적인 계시와 이때 불가피하게 맛보게 되는 환멸을 이야기한다. 환멸, 즉 지금까지 주인공이 믿으며 품고 있던 환상의 깨어짐, 그러한 감각은 '최종적인 계시'에 반드시 수반된다. '최종적인 계시'는 새로운 앎의 탄생이며, 그 자체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는 것인데, 이는 기존 세계의 죽음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찾기』의 전개 과정을 직선적인 것으로만 파악할 때, 최종적 계시와 환멸은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이때, 특정한 앎(최종적 계시)은 최후의 것이 되고 배움은 종료될 수 있다. 혹은 환멸, 즉 믿음과 환상이 깨어지는 충격에만 사로잡혀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러한 부정적 환멸에 빠지지 않으려면 『찾기』의 전개 과정을 직선이 아닌 리듬으로 파악해야 한다. 즉 반복하면서 나아가고, 그러면서 변주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3장 배움>의 말미에 들뢰즈는 [배역]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어떤 인물을 주체나 대상이 아닌 [배역]으로 바라보는 것은 단선적 시간, 고정된 정체성 등에서 벗어나 세계를 불 수 있는 방법이다. 따라서 이는 환멸의 부정적 영향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벗어나는 방법이기도 하다.

*소악절

「피아노 위에 그녀(오데트)가 좋아하는 악보가 몇 개 펼쳐진 것이 보였다. <장미의 왈츠>나 타글리아피코의 <불쌍한 광인>이었는데, 그(스완)는 대신 뱅퇘유 소나타의 소악절을 쳐 달라고 부탁했다. 오데트는 피아노를 아주 서투르게 쳤지만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작품의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는 서투른 손놀림으로, 또는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에서 연주되는 틀린 음들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법이다. 스완에게서 소악절은 여전히 오데트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연결되었다. (...) 소악절이 이런 미지의 매력에 대한 갈증을 스완의 마음속에서 눈뜨게 했다. 하지만 그 갈증을 채워 줄 만한 어떤 뚜렷한 것도 가져다 주지 는 못했다. 그리하여 소악절이 ... 스완 영혼의 한 부분을 텅 빈 여백으로 남겨 놓았기 때문에, 스완은 거기에다 마음대로 오데트의 이름을 새겨 놓을 수 있었다. (91,92)」
뱅퇴유의 소악절은 스완의 사랑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음악적 기호다. 스완의 사랑은 바로 이 소악절과 함께 시작되었다. 스완은 소악절이 만들어낸 미지의 매력으로 배움에 눈뜬다. 하지만, 그것(소악절)은 그야말로 낯선 것,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스완은 불같이 일어난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만한, 즉 이해하거나 납득할 만한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 스완을 눈 뜨게 한 소악절은 동시에 그의 영혼에 텅 빈 공백을 만든다. 영혼의 빈자리에 오데트라는 대상이 자리를 잡는다. 미지의 대상으로 새겨진 오데트는 거짓말의 기호들을 뿜어내고, 스완의 배움의 여정이 시작된다.
「소악절은 사라졌다. 스완은 베르뒤랭 부인의 피아니스트가 언제가 건너뛰던 그 긴 곡조를 뒤잇은 마지막 악장 끝에 가면 소악절이 다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는 어떤 경이로운 관념들이 있었는데, 스완이 처음 들었을 때는 식별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의 기억 속 탈의실에서 새로운 곡이라는 변장한 제복을 벗어 버렸는지 그 부분을 지각할 수 있었다. 스완은 마치 필연적인 결론 속에 담긴 여러 전제들처럼, 그 악절의 구성에 들어갈 모든 분산된 주제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악절의 탄생에 참여했다. (...) 마지막 악장의 시작 부분에서 스완이 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대화는, 인간의 말을 없애면 환상이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런 환상마저 제거했다. 입으로 말해지는 언어가 이렇듯 완강하게 필연성이 되어 본 적이 없었으며, 이 정도로 적절한 질문과 명확한 대답 체계를 인식한 적도 없었다. 먼저 고독한 피아노 소리가 짝에게 버림받은 한 마리 새인 양 탄식했고, 바이올린이 그 소리를 듣고 옆 나무에 있는 듯이 대답했다. (281,282)」
배움의 진전을 향해 나아가던 스완의 사랑이 슬슬 종착역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스완은 미지의 것이었던 소악절을 식별할 수 있고, 또 그 의미를 해석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스완은 최종적 계시를 깨닫고 배움의 결론인 본질에 다다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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