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프루스트와 기호들』 제4장 예술의 기호들과 본질 201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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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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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원 기획세미나, 삶과 문학. ∥2019년 11월 1일∥
『프루스트와 기호들』 질 들뢰즈, 서동운, 이충민 옮김, 민음사, 1997. p.69~86

4장 예술의 기호들과 본질

-- 왜 예술의 기호는 다른 모든 기호들보다 우월한가?
다른 기호들은 모두 물질적이기 때문이다. 그 방출 양태 때문에 우연일 수 없는 물질적인 기호들이다. 이 기호들은 자신들의 소유주인 대상 속에 절반쯤 싸여 있다.
<예술의 기호들만이 비물질적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소악절의 인상 자체가 비물질적이다.

다른 기호들이 절반쯤 대상 안에 감싸여 있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것들만의 고유한 전개 양식 혹은 펼침[설명]의 양식 때문에도 물질적이다.

프루스트는 그를 짓누르는 필연성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 한다. 이는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을 연상시키거나 다른 것을 상상하도록 만드는 데 있어서의 필연성이다. 그러나 어떤 것에서 그와 유사한 것으로 이어지는 이런 진행이 예술에서 얼마나 중요하든지 간에 이것이 예술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우리가 한 기호의 의미를 어떤 다른 사물에서 찾는 한, 물질이 여전히 조금은 남아서 정신에 거역한다. 반대로 예술은 우리에게 참된 통일을 가능케 해준다. 하나의 비물질적인 기호와 하나의 완전히 정신적인 의미와의 통일말이다. 본질이 예술 작품 안에서 드러나는 한, 본질이란 정확하게 이와 같은 기호와 의미의 합일을 일컫는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기호들은 아직은 물질적인 기호들이다. 그 기호들의 의미는 늘 다른 [물질적인] 사물 속에 [감싸여] 있으며 완벽하게 정신적인 것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 삶에 대한 예술의 우월성이 있는 것이다.

- 예술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그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차이,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차이Différance이다. 존재를 구성하고 우리가 그 존재에 대해 사유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차이이다. 이런 이유로 본질들을 드러내 주는 예술만이 우리가 헛되이 삶 속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 즉<삶에서, 여행에서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한 다양성>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개별자들이 세계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그 개별자들 속에] 감싸여져 있는 세계들, 바로 본질들이 개별자들을 구성한다. <우리가 개별자들이라고 부르는 이 [하나 하나의] 세계들은 예술 없이는 결코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본질은 단순히 개별적인 것만이 아니라 개별화를 수행하는 자이다.

감싸여 있는 본질의 세계는 언제나 세계 일반의 시작이고 우주의 시작이며 절대적인 근원적 시작이다.

만약 우리가 근원적인 본질들의 상황에 해당하는 것을 삶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런저런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어떤 심층적인 상태에서 찾아낼 것이다. 이 상태는 바로 잠이다. 잠든 사람은 <자기 둘레에 시간의 실을, 세월과 세계들의 질서를 둥글게 감고 있다.> 잠 속에서의 이 기묘한 자유는 오로지 잠에서 깨어날 때, 즉 다시 복원된 시간의 질서에 따라 [다시 이런저런] 선택을 하게 될 때 끝나버린다. 잠자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로서의 주체는 본질 자체 속에 감싸여 있는 복합적인 근원적 시간에 대한 계시를 가지고 있다.

프루스트에게서 초시간적인 것이란 탄생의 상태에 있는 이 시간과 이 시간을 되찾아 내는 예술가로서의 주체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것은,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예술 작품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예술 작품은 최고의 기호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 의미는 근원적인 복합, 진정한 영원,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 속에 있다.

- 어떻게 본질이 예술 작품 속에서 육화하는가? 예술가로서의 주체는 그를 개별화시키고 불멸하게끔 해주는 본질을[예술 작품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가?
본질은 질료 속에서 육화한다. 그러나 이 질료는 가연적이며, 쉽게 반죽이 되고 가늘게 풀어 헤쳐질 수 있기에, 완벽하게 정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예술은 질료의 진정한 변환이다. 본질, 다시 말해 근원적인 세계의 성질을 굴절 시키기 위해, 예술 속에서 질료는 정신화spiritualiser되고 물리적 환경들은 비물질화dématérialiser 된다. 그리고 물질을 이렇게 다루는 일은 오로지 <문체style>를 통해 이루어진다.

문체는 연속적이고 굴절된 탄생이고, 본질들에 적합한 질료들 속에서 되찾은 탄생이다. 또한 이는 대상들의 변신이 되는 탄생이다. 문체란 바로 본질의 이런 식의 탄생이다. 문체는 인간이 아니다. 문체는 본질 자체이다.

본질은 특정하고 개별적일 뿐 아니라, 개별화시키는 활동도 한다. 본질 자체는 (예컨대 문체의 고리들 속에 대상들을 가두어 버리는 식으로) 본질 자신이 육화되는 장소인 질료들을 개체화시키며 또 규정한다. 본질이란 본래 차이이다. 그러나 또한 본질에게 반복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동일해지는 능력이 없다면, 본질을 다양하게 만드는 능력, 다양해질 능력도 없을 것이다. 본질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아무것도 그것에 대체될 수 없는 이상, [본질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궁극적 차이인 본질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차이와 반복은 겉으로만 대립될 뿐이다. 반복이란 차이의 힘이며, 마찬가지로 차이란 반복의 힘이다.

우리는 모든 다른 영역에서처럼 예술에서도 객관주의의 유혹과 주관적 보상의 메커니즘을 겪는다. 그래도 여전히 (대상 너머, 그리고 주체 자신 너머에 있는) 본질은 예술의 영역에서만 드러난다. 만일 틀림없이 본질의 계시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바로 예술에서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술은 세계의 목적이고 견습생이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종착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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