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식민이성비판 1장 81~1장 끝까지

작성자
voov11
작성일
2023-05-17 13:10
조회
153
포스트 식민이성 비판 / 스피박

Ⅱ. 헤겔

1. 연속화 과정으로서 시간에 살을 붙이는 것을 시간화라고 부른다면 (82), 시간화 과정에 빠져든 이들이 잘 못 포착한 이런 암묵적인 도표로 시간이 종종 등장한다는 것이다.
2. 해체론적 개념은 발신자의 부재 속에서 의미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구조로서의 글쓰기이다. 토착정보원의 궤적을 밟고 있는 나는 인간행위자 아르주나가 말하는 살아진 시간화를 풀어헤치기보다 헤겔의 <기타> 사이의 대립을 해체하도록 몰아붙일 것이다. 즉, 나는 착오로 읽는다. 착오로 읽는 것이 서구/나머지 세계의 양극화에 맞서는 제스쳐가 되길 바라고, 양극화는 식민적 태도 자체의 반전에 의한 합법화와 너무 많이 닮아있다(83)

3. 헤겔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헤겔이 모든 역사와 현실을 하나의 도표로 집어넣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맞아들어간다는 것 즉, 헤겔이 역사철학, 법철학, 미학에서 그려주는 절대정신 여정에서 역사의 운동법칙은 헤겔의 형태학에 살이 붙여짐과 동시에 가시화된다(84).

4. 집중하는 것은 미학 강의에 나오는 두 문단이다. 토착정보원/포스트 식민주체는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 호명된 목소리로 영향을 받는다. 헤겔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형식, 내용, 의미의 계기가 있으며 예술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자기지를 향해가는 정신의 여정을 그린 도표에서 정신이 차지하는 위치다. 정신적 발전은 스스로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초부과되어 정신과 정신의 앎 사이의 정확한 일치를 향해가도록 이끄는 도표이다. 적합한 초부과, 동일성 단계에서는 기호 초월적 의미 사이의 분리란 없고 따라서 예술도 없다. 즉 예술이란 도표의 축인 정신과 앎 사이의 적합성 결여를 나타내는 이름, 기호이다(85)

5. 이 표에 따르면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 예술은 정신에 의해 생산되는 지위를 받지 못하고, 이 예술들은 모두 무의식적인 상징계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규범적인 일탈이다(86).

6. 인도는 형식과 의미가 분리된 것으로 지각된다. 헤겔에 따르면 인도예술은 현상성을 넘어선다고 지각되는 의미의 장엄함에다 외적으로 정합적인 재현을 제시하려고 한다(-> 형식과 의미간의 모순을 능가하거나 지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도인들은 헤겔에 따르면 영혼이 도달하는 통일성의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브라마와의 화해나 동일성을 알지 못한다. (86)

7. 헤겔은 기타의 구절을 이용하는데 호의를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정신이라곤 없이 선물, 역사 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부재를 가리킨다. (89). 헤겔의 결론에 따르면 이는 형태만 바뀌고, 동일한 하나이고, 극도록 단조롭고 지루한다.(89)

8. 스피박(나는) 코잠비와 마티랄의 읽기를 참고한다. (90). 코잠비는 서사분석이라는 방법을 경유한다(91). 마리랄은 텍스트의 불협화음을 지적함으로써 식민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대립, 발전론적 현실주의자들과 신비적 문화주의자들 사이의 대립을 해체한다. 스피박은 시민압제자와 피식민적의 대립을 풀어 헤치려고 시도 한다. (91).

9. 헤겔에게는 인도를 헤겔적 상징계의 전의식에 사는 주민으로 입증하려는 의도가 있다(93). 인도가 정신의 여정에 이런 정거장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것들은 지금이나 제국주의 이데올로그들에게 드물지 않다.

10. 이렇게 읽는 방식이 (스피박처럼) 시간에 이 세부사항에 집중하는 일은 착오를 일으키는지? 이런 읽기는 착오적인데 토착정보원의 (불)가능한 관점에 개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토착정보원이란 인종문화기술학에서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고, 결국 읽고 아는 주체에 의해 해석될 수 있을 뿐이다. 정말이지 이런 유형을 읽기를 위한 학술적 모델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읽기가 착오인 것은 토착정보원의 지점을 하나의 읽기 위치로 변형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인류학에서 토착정보원의 지점은 읽혀질 수 있을 뿐인 그러한 지점이다) 그것은 하나의 불가능한 관점이다.

11. 토착정보원은 동시대의 내포독자로 파악될 수 있다. 인도라는 보류된 공간에 여전히 좀 못 미치는 곳에서 두세기 걸쳐 떠돌아다닐 기간을 부여한다. 코잠비와 마티랄 둘다 이러한 것을 전제하는데, 하층 계급이 청중으로 필요 하고, 대화를 엿듣는다.

12. 기타에서 권고를 받아들이도록 수용된 독자는 아르주아 왕자이다. 발신자는 크리슈나이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의 질문에 욕망없이 행동하는 법을 길게 연설하는데(97), 크리슈나는 태양중심적 시간을 법의 중개를 통해 계보학적 시간에 집어 넣는다. 크리뉴슈나의 대답은 역사를 시간의 도표로서 법에 종속시킨다.(완벽성, 불변하는 정신, 법의 쇠퇴시 마다 스스로 갱신) (법에 종속을 안시키는 것 아닌가?)

13. 역사의 도표를 담을 수 있는 존재도표를 요청하자 크리슈나는 천개의 팔과 눈을 보여준다. 헤겔은 이것을 목적도 한계도 없는 괴물성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법과 역사 사이의 변증법에 작동하는 문화적 관용어법상의 계략이다.
14. 초월적 존재의 도표적 재현(존재도표)으로서 크리슈나는 시간 속의 유동적 현재를 담지한다. 도표는 요구된 증거이고, 시간의 도표가 시간화로서 시간을 집어삼킨다.

15. 내가 말하려는 요지는 헤겔이 본바 정적이고 단조로운 이 권위적인 텍스트에서 이런 요약들이 텍스트의 술책에 의해 허용된다는 점이다. (부족혈통사회로부터 국가로 향하는 이행의 표식이 된다.)

16. 민족주의자들은 기타를 역사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초강력 역사적인 무시간적 핵심을 지닌다고 말한다. 단언컨대 식민주체, 포스트 식민 주체도 토착정보원 혹은 내포된 동시대 수용자의 불가능한 관점속에 거주하지 않는다. 나는 미국의 새로운 제3세계 페다고지에 쏠리는 충동 드러낼 수 있으나 이것은 상실된 역사적 인도인을, 헤겔적 연대도표에 의해 지워지고 오늘날 일반화된 토착정신속에 도사리는 역사적 인도인을 복원하려는 작업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것의 역할은 혼종적인 것을 찬양하며 역으로 순수한 것으로 무심코 합법화하는 것이다. 토착주의자는 역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진정한 인도관점이란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다.

17. 우리가 상실된 시각을 알려줄 형상화들로 이끄는 길을 우리 자신과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었더라면 어떘을까? 우리가 토착정보원의 불가능한 관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이항대립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함이다. 토착정보원의 가능성은 지식생산의 증거로서 각인되고, 겉보기에 자비로운 시간화를 시간에 종속시키는 것은 기원이 발견된다면 복원가능한 하나의 기원으로 다시 추적될 수 없다. 하지만 저항적인 독자와 선생은 토착정보원이라는 이름의 형상화에 의해 지속되는 종속을 풀어헤치려고 한다. 관념 로고스 형상의 주위를 맴돌도록 저주자 받는가? 아니면 탈궤도가 적어도 환기될 수 있는가?(116-117)


Ⅲ. 맑스

1. 재생산 신체의 새로운 사회화를 코드화시키는 담론을 이야기 해보면 재생산권리, 대리모, 이식, 인구통제, 재택작업

2. 토착정보원 시각의 재각인은 맑스주의 전통에서 폐제되어 왔고, 계속해서 배제된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맑스가 유럽 자본주의의 유기적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맑스는 칸트와 헤겔과 다른방식으로 전 지구적이었다.

3. 나는 여기서 맑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구절만을 살펴볼 것이다. 맑스주의 문학비평에서는 아시아적 양식의 문제는 동양적 전제주의와 같은 쉽사리 이용되는 편향된 책들에 의해 간주되었다. “중국와 인도는 자본주의가 소위 아시아적 양식의” 여기서 아시아적 양식은 분류학적 용어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123).

4. 스피박의 생각으로 26세의 맑스는 변증법적리듬, 입장-부정-지양의 심급화로서만 의미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철학자로서의 주장, 액티비스트로서의 부정. 철학은 다른 층위에서 보존하면서도 철학을 파괴하는 철학자로서의 지양. 맑스는 파르마콘으로서 상품 형태에, 자본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의 차별적 관계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5. 1844 맑스는 유적생명(자연이 인간존재의 위대한 기관없는 신체), 유적 존재(인간?)을 갖는다. 인간적인 각인들의 활성화, 작동의 도구가 될 수 있는 살아있는 요소는 맑스에게서 중요하다. 이간적인 것이 자연 사회 역사 이데올로기 안에서 전적인 지향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각인에 의해 생기를 띠고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것을 이해하고(앎) 통제하는 (행위)는 비판적인 과업이다.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인간적인 요소가 작동하는 방식에 맞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것을 유령적인 것이라고..

6. 맑스는 인간적 서역에 깃들어 있는 비판적 과업의 필요성을 간파한다. 맑스의 유적존재 개념은 독일 고전 철학에 빚을 지고 있으며, 보편적인 것으로 취하는 인간이기를.. -여기서 더 나아가 맑스는 철학의 내부에 역사적 사실을 넣고 싶어서 철학을 사실로 입증하기 위해 철학의 형식을 위반한다. 사회적 불평등을 고려한다면 인간 존재가 올바르고 일반적인 경우로 자신을 취할 수 없음을 감지하는 것이다.

7. 헤결이 배타적인 영역으로 철학은 제한시켜서 차이의 가능성을 닫는다면, 맑스는 차이를 설명하고 차이를 제거할 체계를 찾아나선다. 그래서 아시아 생산양식의 개념을 단순히 매장하는 태도는 맑스의 태도와는 (다르며) 불충분하다.

8.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차이의 이름이자 저항과 공명하는 용어러, 차이로부터 살을 입고 나오는 상상계이다. 초기 수고들 이후 10여년 후에 나타나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이름은 상실된 채로 남아있고, 혁명과 정복의 위기들을 경유하여 동일자의 회로를 부술 수 있는 아시아가 될 수 있도록 타자를 이론화 하려는 욕망을 푯히한다. 지구의 모든 지역들이 자본/주의의 논리적 길을 따라 여행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위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9. 일부 학자들은 아시아적 양식을 첫 번쨰 형식의 한가지 판본으로 즉 원시적 공산주의로 읽었다. 아시아적 양식과 공산주의는 봉건주의 – 자본주의 회로의 외부를 표시하는 전역사적 혹은 의사지리적인 공간/시간 속에 거주한다. 혁명은 새로운 양식을 가져오지만, 이전의 양식과 새로운 양식 사이의 관계는 사실상 보건주의-자본주의-공산주의/사회주의 연속체와 일치해야한다.

10. 뱅골지역의 경우 영국인들이 최초로 차지한 지역인데, 맑스는 여기를 사적소유가 없고, 국세가 동일하다고 일반화 시킨다 (완전 이해 안감. 여기서부터는)

11. 우리는 이러한 조항들이 개정되어야 한다. 1)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역사적으로 정적인 것, 사회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설정하는 태도는 하나의 서사적 심급화 속에서 개념화된 철학적 형태학의 운동인 변증법에 대한 불감증을 역사적 정체와 혼동, 하여 도덕적 열등을 도출하는 것이다. 자신의 지양의 행위자로 놓는 맑스의 입장이 정치경제학 영역에 철합을 재배치함으로써, 그것이 철학을 역사와 혼동하게 하고 차이문제를 역사의 서사속으로 집어넣게 한 것이다. 2) 자본주의 종교, 문화 민족주의 변이들도 유럽모델의 국민국가에 반드시 적합하게 코드화되는 것이 아니다. 억압을 공고히려 하려는 지배집단들에 의해 유지된다. 기호의 파르마콘 성격 때문이다.

12. 맑스의 텍스트를 다시 읽음으로써 1) 아시아적 생산 양식이라는 개념-은유는 생산양식의 지점들에 잇는 한계들을 가시화 한다. - 왜 자본주의가 유럽에서만 발전했는가에 대한 질문- 유럽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만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봉건주의로어의 경과는 약점과 일탈이 일어남을 알 수 있다. - 아시아적 생산 양식은 지배의 자기동일성이 흔들리기 시작하도록 결함을 대리보충해준다.

13.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편의상에 부여되었던 이질적, 짜임새는 제국적 구성체들이라는 아민의 격자를 거쳐 일반적 가치형태와 총체적, 혹은 확장된 가치형태들간의 유사한 갈등이 일어나는 지점들로 보일 수 있다. (159) 자본주의의 현배치 구성은 변동중인 제국주의적 구성체들의 지속적인 서사에 나타나는 해외 원고 및 해외무역에 의해 실행되는 채무-속박과 조공 체계를 갖는다.

14. 이 체계를 떠받치는 것은 새로운 젠더화된 서발턴이다. 이 제더화된 여성이 서발터니티 속에 남게 될 때, 그것은 그녀를 능욕하는 것이다. 서발턴 여성들은 토착정보원의 관점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인 것이 전반적 전략의 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라면 젠더화는 지역적인 것의 확대된 형태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이다.

가족의 기원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주어진 것처럼 말한다. 그렇듯 욕망은 오도하는 단어이다.
안티오이디푸스 저자들(들뢰즈 가타리)에게 1) 코드가 생산, 교환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 2)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관계를 계산할 수 없는 것 3) 기관 없는 신체라는 명명을 욕망하는 생산이 하나의 코드로 부상하는 공학의 일부로 생각한다. 이들은 자본 뿐 아니라 자연 또한 이름 자체로서 생산된다.


인간존재는 섹스 젠더 체계들의 가치-형태속에 나타나는 성차를 가정하지 않고서는 자기존재자체에 고유할 수 없다. 러빈은 섹스/젠더 체계들의 다형 코드화를 정치경제라고 부른다. (170)

러빈은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 인류학에 확신을 갖고 있으며, 러빈과 같은 책을 쓰는 입장에 있는 이들은 서구의 세련된 사상, 타자에 정적인 에스니시티를 위임하는 경향을 공유한다. 이러한 움직임에 주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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