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식민이성비판> 서문, 1장 전반(-81p)_발제문

작성자
Jina Lee
작성일
2023-05-17 15:52
조회
166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_ 서문, 1장(-81p)_ 05/17

한국어판 저자 서문
(스피박은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계속 질문하며) 단일-국가 모델(미국판 제국주의)에 비판적 거리두기를 요청한다. 우리가 처한 제국주의 게임판은 정치적인 것으로, 명시된 이상(과학적 사회주의의 여러 판본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초국적이고 초학제적인 비판적 문화연구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시작이며, 연구는 ‘대타성’을 재현하는 것이며 (그람시가 영원히 설득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유기적 지식인의 모델에 따라 식민자들의 입장과는 다른 입장을 분석적으로 재현할 것을 요청한다. 페미니즘과 포스트식민 이론은 사회정의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의 이론은 선택된 이 이론에 적용될 일차적 자료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의 생산 자체로 하나의 실천이며, 연구는 온갖 종류의 이론 자체의 생산으로, 읽기는 실천적 읽기로 항상 이론의 수정을 요구한다.

옮긴이 서문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이 철학, 문학, 역사, 문화에서 각기 드러나는 ‘토착정보원’(서구인에게 식민지의 정보를 제공하므로 서구 지식의 원천이면서도 대상으로 각인, 그러나 공백으로 남는다.)의 형상을 추적하면서 식민담론 연구에서 초국가적인 문화연구로 옮아가는 궤적을 보여준다. (80년대 후반 쓰여진 글을, 포스트식민주의가 인기 담론으로 자리 잡은 90년대 중,후반의 맥락에서 수정 확대하는 글쓰기) 스피박의 비판적 개입은 ‘페미니즘적 해체론적 맑스주의’라는 입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7)
이 책 전체를 아우르며 스피박이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윤리, 읽기의 윤리(학)인데, 세상을 읽어내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교육실천의 핵심적인 사안이다. 이 책에서 스피박이 말하는 읽기의 윤리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무지에의 의지” 즉 “인가된 무지”에 저항하면서 위대한 텍스트를 숙지, 포획하려고 하기보다, 결을 거슬러 읽어내는 것이자 (불)가능한 관점에서의 읽기를 상상하는 것이다. 텍스트에는 각기 나름의 폐제가 실행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텍스트의 안정성에 균열을 내는 읽기를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환원불가능한 대타성을 지각하는 역능을 갖춘 윤리가 요청된다.(8)

서문
1. 스피박은 철학, 문학, 역사, 문화라는 다양한 실천들을 통해 ‘토착정보원’의 형성을 추적하려 하고 이 추적인 자신을 토착정보원과 결별시키는 식민주체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전지구화가 절정에 이른 오늘날 특정한 포스트식민 주체가 이제 식민주체를 재코드화하고 토작청보원의 입장을 전유하고 있고, ‘폐제’(foreclosure,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나오는 용어, 비유럽 주체의 주체화를 가로막고 배제한다는 의미)는 더욱 공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25) (본인이 식민담론 연구에서 초국가적 문화연구로 옮아가는 실천가임을 밝힘.(26))
각 장들은 유기적으로 느슨하게 연쇄되어 원주민이자/또는 서발턴인 ‘토착정보원’의 의식 경계의 하부에서 일어나는 불연속적 부상을 추적한다. 토착정보원이 불가능한 관점으로부터 스스로를 치환시켜 초강력-착취된 대상들뿐만 아니라 저항의 네트워크들을 향하게 된 경위가 이야기의 일부를 이룬다.(29)

2. 스피박은 조직된 저항으로부터 어떤 서발턴들이 전략적으로 배제되는가를 탐색하고자 할 때에도 ‘주류 텍스트’들에 더 많이 집중한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가 서식하는 페미니즘은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것의 전통에 적대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어떤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보통) 세상을 읽는 문학적 습관을 길러온 사람은 공모성의 불편함을 감지하지 않아야만 그러한 초강국 승리주의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러니 스피박은 포스트식민 이성의 생산구조를 점검하고 비판하고자 한다.

3. 스피박은 ‘상호학제적’이기를 요구한다. (본인이 충분히 박학하지 못하지만....) 이는 규칙을 깨트릴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1장 철학
I
식민담론 연구는 피식민지인의 재현이나 식민지 문제에만 집중할 때 식민주의/제국주의 제3세계를 옛 식민지의 치환으로 본다면 새로이 부상한 남-북 분할이 한계를 부과하는 과정을 더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고 함. 고도의 식민주의가 스스로를 신식민지로 탈바꿈한 것이고, 영토 문제라기 보다 경제적인 것, 역사가들에게 중요하지만 본인은 엄격히 구별하고 있지 않다. 소련이 붕괴한 이후의 상황이 신식민주의 서사를 전 지구의 금융화의 역학 속으로 옮겨 놓고 있고, 현재의 산업적 자본주의는 금융 자본 시장을 지닌 세계 무역과 같은 상업 자본에 간섭하는 차연의 과정 속에 있다. 이러한 차연을 인지하는 것은 데리다의 통찰을 배우는 것이다.(37-38)

를 과거 속에 안전하게 놓고/거나 그러한 과거로부터의 우리의 현재에 이르는 연속적인 선을 시사함으로써 현재의 신식민지적 지식생산을 종종 도와줄 수 있다.(35) 이런 저런 의도를 지닌 주체들을 계속해서 독선적으로 수치스럽게 만들 때 그것은 생산적이지 않게 되고 여기서 ‘해체’가 도움이 된다. 전 지구적 금융화와 같은 거대서사들이 더 강력한 작동원칙이 되고 있고, 바로 이점에서 칸트, 헤겔, 맑스를 ‘관념들’의 투명한 혹은 동기부여된 저장소로보다는 머나먼 담론적 선구자로 읽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독자들이 자신의 입장과 그들의 입장 사이의 건설적인 공모성을 발견하기를 희망한다.(38)

위대한 텍스트들에 의해 토착정보원이 여러 방식으로 중요하게 요구되고 '폐제'(foreclosure)된다. 폐제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차용(“에고는 정동과 함께 양립할 수 없는 생각을 거부하고, 마치 에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해온 개념으로, 서사의 앞선 부상을 윤리적 심급화로 읽어내는 테크닉이다. 정동의 거부라는 발상은 정신분석학적 사변을 실용과학으로부터 윤리적인 책임으로 변위시켜 보게한다. 1장에서는 토착정보원이라는 이름을 대문자 인간, 즉 보편 인간의 이름으로 인간 존재의 서막을 열어주는 정동을 실어나르는 이름으로 암호화하는 현상을 기입해 나갈 것이다.(40)

칸트의 경우는 합리적 의지의 자유를 허용해주는 반성적 판단의 자율성을 출범시키느라고 한정적인 것의 타율성을 나타내는 예로 토착정보원이 요구된다.(42) 독일은 18세기 말엽, 식민지 및 제국 설립에 수반되었던 지배, 착취, 인식소적 폭력의 구실을 제공하고 자아와 세계의 새로운 재현들을 과학적으로 꾸며내기 위한, 위기 관리 서사가 필요했고(43), 이때 독일의 문화적 자기재현의 서사는 차이의 서사였다(44). (유럽의 윤리-정치 주체 구성에 칸트, 헤겔, 맑스가 끼친 영향은 매우 크며 이들 윤리-정치적 자기 재현의 원천이 되는 텍스트들이 오늘날의 포스트 식민 담론과 공모한다.)
이에 스피박은 의도적인 오독으로 칸트를 읽음으로써 철학 텍스트를 경험적, 인류적 읽기, 용의주도한 희화화 등을 통해 서술자에 접근하지 못하는 주체의 폐제를 가시화하려 한다.(47)

특히 칸트의 <판단력 비판>> 중 ‘숭고’에 천착하는데.... (그 전에 칸트의 비판들을 좀 정리해 보면).... 자연을 이론적으로 인식하는 이성의 작동을 설명하는 <순수이성 비판>>, 합리적 의지의 작동을 설명하는 <실천이성 비판>>, 미학적인 것과 목적론적인 것, 즉 아름다운 것과 숭고한 것에 대한 고찰을 다룬 <판단력 비판>>인데....

칸트에 의하면 <판단력 비판>>에서 아름다운 것의 체험은, 주체가 그 자체를 인식하지 않은 채, 객관적인 지시 없이도 표면상의 인식의 대상을 구성할 수 있고, 예술은 자연 개념의 지반 없이 유희할 수 있는(47) 반면, 숭고의 순간에 주체는 합리적 의지에 응하게 된다. 칸트는 “숭고의 감정은 상상력에 의해 형성된 미학적 평가와 이성에 의해 형성된 미학적 판단 사이에 일치가 부족해서 발생하는 고통의 감정이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감각 능력이 부적합하다는 이 판단이 이성적이고 옳기 때문에 쾌락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감각적인 것에 대한 합리적인 것의 우월성은 우리의 초감각적 한정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에서 느끼는 숭고한 감정은 사실 메타렙시스(metalepsis, 결과를 원인으로 대체하기)로 객관인 자연의 숭고에 대한 존중을 우리 주관 안에 있는 인간성 관념에 대한 존중과 교묘하게 교환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내부와 외부에서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이러한 감정을 우리 안에 일으키는 모든 것을 숭고라 부른다.(49)

그런데 이러한 자연에서의 숭고에 대한 판단은 문화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차적으로 문화에 의해 생산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 문화에 이방인으로 타고난다면 이 문화 속에서 문화적으로 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50) 교육을 받지 않은 아이와 가난한 자, 태생상 교육시킬 수 없는 여성은 ‘날 것의 인간’으로(51) 야생적인 것과 원시적인 것을 수용한다. 무비판적으로 자연에 숭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러한 명명의 철학적 부적합성 때문인데, 문화에 의해 익혀진 사람들만이 메티렙시스를 통해 자연에 숭고를 명명할 수 있고, 날 것의 인간에게 심연은 단순히 끔찍함으로, 무서운 것으로 다가온다. 날 것의 인간은 세 종류의 비판 이성 사이에서 구분되고 각기 보는 관점을 갖는 그러한 주체가 아니다. 그러한 주체 자체와 아직-주체가-되지 못한-자 사이의 간극은 알맞은 환경하에서 문화에 의해 메워질 수 있다.(53)(나중에 이것은 제국주의의 문화적 사명과 연관됨....)

칸트의 비판 체계 중 가장 이상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인데 이는 예술과 전혀 관계가 없다.(판단력 비판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부분(<미학적 판단 비판>)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목적론적 판단력의 주제는 자연에서 목적성의 가능성, 또 세계를 인식하는 지적 권위의 가능성으로, 칸트가 판단의 가장 중요한 쟁점들을, 이렇게 구조적으로 미결정적인 곳에 둔다는 점은 이상하다.(59)(이 덕에 아름다운 예술, 목적 없는 목적성, 을 목적성의 선험적 원칙이 합법적으로 유희하는 유일한 장으로 확실하게 위치시키고 있기는 하다.)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 즉, <판단력 비판>>의 상당 부분은 칸트에 의해 판단의 고유 영역 외부에 기입될 것이다.

이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사이의 화해불가능한 모순을 돌파하기 위함인데(9)) 칸트는 “그러므로 정신의 끈질긴 원칙은, 그렇게 할 책무가 지워져 있기 때문에 참된 것으로 가정되며, 그 원칙을 최상의 도덕적인 궁극 목적의 가능성으로서 전제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최상의 도덕적인 궁극 목적의 불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가능성을 들여다 볼 수는 없을지라도 말이다.”라 말함으로써 모든 궁극적인 질문들을 회피해야 하는 실천이성의 이중구속이 생긴다(62)고 스피박은 분석한다.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문제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 이성에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며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실천이성의 이율배반: 우리는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자율과 자유가 내재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이성은 위의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문제를 끈질기게 던진다. 실천이성에는 천부적으로 의무는 선의지를 요구한다. 선의지는 정언명령이며 정언명령의 근거는 자유이다.
판단력: 자연을 통해 선험적 원리를 파악하는 ‘지성’과 자유를 바탕으로 선험적 법칙을 규정하는 ‘이성’을 연결하는 또 다른 능력.(반성적 판단력, 규정적 판단력)

우리의 인식 능력들을 목적을 갖고 사용하기 위해 자연을 기계적 법칙들에 의한 목적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판단력 부분은 자율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주관적인 타당성을 가지며 객관적으로는 법칙 혹은 개념을 상당히 결핍하고 있기 때문이다.(반성적 판단력) 이 결핍은 자체에 이질적인 법칙들에 따라 스스로를 적응시켜야 하고, 지성에 의해 주어지는 타율적 판단력 부분에 의해 대리보충된다. 이 타율적인 종류의 판단력은 한정적인 것이라 불린다.(규정적 판단력)(62)

스피박은 칸트의 한정적 판단력의 서술에서 지정학적 차별화를 발견한다. “... 우리는 인간의 존재가 왜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우연히 뉴홀랜드인들이나 티에라 델 푸에고 거주자들에게 우리 생각을 내비친다고 해도 그리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숭고의 분석틀에서 날 것의 인간은 지반으로 남모르게 왕복 이행하지 못하고 심연-정동에 붙들린채 명명되고, 우연히 언급된 뿐, 세계를 말하거나 판단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67)

칸트의 쳬계에서는 인가된 무관심 덕분에, 평등을 전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이해관계 속에서 제자리에서 명료화되는 철학자의 의무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71) 그리하여 알 수 있는 것과 사유되어야 하는 것 사이의 모순을 실천적으로 해결하고자 할 뿐이다. 인간성에 입문하는 기획은 문화 (유럽인이 아닌 이들은 제한되게 접근한다는 암묵적인 단서를 달고 있는), 시민의 법률제정, 신앙의 기획이다.(72) 칸트에게 문화의 기획이란 사변적 이성의 한계들과 도덕적 이성의 무한함을 보기 위해 사변적 이성을 훈련하는 것이며 그래서 문화의 기획은 초기 혹은 다른 사회에 속하는 계발되지 않은 이성을 상정한다.(문화의 일반 수준에 이미 도달한 사회들의 경우, 부르주아 사회의 시민적 조직이 권장된다.)(73)

실천 이성과 그 기획에 대한 쳬계적 기술은 인간을 본연의 주체로서 본체라고 가정한다. 이 부분에서 문화적 차이를 논의하는 대목은 나오지 않고, 날 것의 인간은 인류학적 영역에 들어가지 못한다. 여기의 인간은 선의와 상식에 의존한다고 말할 때의 바로 그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칸트의 판단력 비판은 이러한 상식을 전제하면서도 그 상식을 분석하는 것을 억제한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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