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호] 커다란 나무ㅣ김명환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3-04-03 10:11
조회
315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커다란 나무


외삼촌이 아프다. 어머니의 통화를 우연히 들었다. 수화기로 외삼촌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삼촌한테 전화 좀 해라…….”
어머니는 날 볼 때마다 말씀하시지만, 나는 알았다고만 대답한다. 나는 삼촌이, 내게 약한 모습을 안 보이고 싶어 한다는 걸 안다. 내가 어렸을 때, 삼촌은 아주 단단했다. 내가 아주 단단해졌을 때, 삼촌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는 나도 약해졌다.


50년쯤 전으로 기억된다. 삼촌과 삼촌 친구들과 외가에 갔다. 기차를 타고 청평역에 내려 한나절을 걸어서 갔다. 해질녘, 멀리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나무 아래 마을이 있었다. 우리가 다가갈수록 나무가 커졌다.
“내가 어렸을 땐, 저 나무가 더 컸었다.”
“늙어서 꼬부라졌구나?”
“아주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는 나무지.”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연극을 하는 삼촌과 삼촌 친구들은, 꼭 어린 아이처럼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금세 알아듣곤 했다.


하루는 옆 마을로 마실을 갔는데, 밤늦게 돌아오는 길이 너무 힘들어 삼촌 등에 업혔다.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꼭, 너만 했을 때야…….”
나를 업은 삼촌이 그 커다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아재 이야기를 했다. 아재는 삼촌네 머슴이었다.
“아재는 꼭 이렇게, 나를 업고 다녔어.”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삼촌은 아재 등에 업혀 자랐다. 인민군이 후퇴하고 아재는 붙잡혔다. 커다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몇 날 며칠을 있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가 틀림없이 아재를 구할 거라고 삼촌은 생각했다. 증조할아버지를 미군도 국방군도 중국군도 인민군도 건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중국군 장교는 먼발치에서 증조할아버지에게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고 한다. 삼촌은 증조할아버지가 한자로 시를 썼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존경했다고 말했다.


증조할아버지는 끝내 아재를 구해주지 않았다. 삼촌은 증조할아버지가 아재를 구해주지 못한 게 아니라, 구해주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삼촌은 증조할아버지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고 있었어.”
아재가 죽기 전날 밤, 삼촌이 아재에게 다가갔다.
“세희야, 조심해!”
아재가 큰 눈을 뜨고 숨넘어가는 소리로 삼촌에게 말했다. 삼촌은 말없이 울기만 했다. 삼촌을 바라보던 아재의 젖은 눈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삼촌은 말했다. 나는 삼촌 등에 업혀있어서 삼촌의 눈빛을 볼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아재는, 어린 삼촌에게 조심하라고 했을까? 도대체 왜 삼촌은, 어린 나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까? 어둠 속으로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20년쯤 전으로 기억된다. 삼촌은 이제 소설을 쓸 때가 됐다고 말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야…….”
삼촌은, 커다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아재 이야기를 했다. 나는 모르는 척, 30년도 훨씬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아재가 죽기 전날 밤, 삼촌이 아재에게 다가갔다.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세희야, 조심해!”
아재가 큰 눈을 뜨고 숨넘어가는 소리로 삼촌에게 말했다. 삼촌은 말없이 울기만 했다. 삼촌을 바라보던 아재의 젖은 눈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삼촌은 말했다. 삼촌의 눈빛은 젖어있었다. 삼촌은 아재의 그 말 때문에 소설가가 됐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꼭 써야 한다고 말했다.


10년쯤 전으로 기억된다. 삼촌에게 전화가 왔다. 술을 한 잔 살 테니, KTX 여승무원 몇 명과 나오라고 하신다. 술값이 얼마 없으니 몇 명만 오라고 하신다. 술을 못하는 삼촌이 술을 한 잔 하자는 건,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거다. 서점에 가서 삼촌 책 몇 권을 샀다. 떨리는 손으로 싸인을 하며 삼촌은, 여승무원들에게 선물을 줄 수 있게 배려해준, 조카에게 고마워했다.
삼촌은 인터넷에 떠도는 ‘KTX 여승무원이 되고 나서’를 읽었다며, 처음으로 나를, 시인으로 대해줬다. 그 시를 쓰기 전까지 나는, 글쟁이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쓰신 조세희 선생님의 조카”라고 소개됐다. 그런데 그 시를 쓰고 나서 “KTX 여승무원이 되고 나서를 쓰신 김명환 선생님”이라고 소개된다. 나는 등단 22년을 소설가의 조카로 산 시인의 비애를 말했다.
“그 시는 정말 잘 썼더라!”
그날 처음으로 삼촌이 술 마시는 걸 봤다.


“나는 나이가 들면, 글을 더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삼촌이 말했다.
“그런데, 약으로 버티는 몸이 되고 나서, 약기운 때문에, 도저히 생각이 모아지지를 않는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삼촌은 왜, 술을 한 잔 하자고 했을까? 술을 못하는 삼촌이 왜, 술을 마셨을까? 글을 쓸 수 없는 몸이 되기 전에 글을 쓰라고, 내게 말하고 싶었던 걸까? 선전활동가로 살아가는 조카의 삶이, 시인의 삶보다 나아보여서, 그 말을 못했던 걸까?


그즈음, 어느 월간지에서 청탁이 왔다. 선생께서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하니, 내가 선생 이야기를 좀 써달란다.
“소설도 못 쓰고 있는 소설가가, 무슨 할 말이 있겠냐고 생각하실 겁니다.”
아, 꼭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소설도 못 쓰고 있는 소설가를, 왜 너까지 나서서 괴롭히냐고 하실 겁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삼촌 이야기를 쓸 자신이 없었다. 시대와 맞서기 위해 삼촌은 소설을 썼지만,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해버렸다. 소설가의 운명이 이렇게 아픈데, 갑자기 왜 아픈 이야기를 쓰게 됐을까? 수화기로 흘러나온 삼촌의 고통스러운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40년쯤 전으로 기억된다. 나는 삼촌이 있던 겨울바다에 갔다. 중대한 결심을 했기 때문에, 그걸 꼭 삼촌에게 말해야 했다. 나는 시를 쓰겠다고 말했다.
“넌, 내 소설을 읽었니?”
“응.”
“그럼 넌, 내가 더 이상, 소설을 못 쓴다는 걸 알았니?”
“아니.”
“그럼 넌, 제대로 읽은 게 아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시를 쓰면 넌, 견뎌낼 수 없을 거야.”
나를 바라보던 삼촌의 젖은 눈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삼촌은, 더 이상 소설을 못 쓴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아재 이야기를 써야 했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삼촌은, 이렇게 아프게 살아야 하는 걸까…….


삼촌의 몸이 더 나빠지기 전에, 삼촌을 만나야 한다. 삼촌을 만나면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을 말할 것이다. 그 누구도, 삼촌조차도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할 것이다.
커다란 나무에 별이 쏟아지던 밤, 그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아재 이야기를, 삼촌은 썼다고……. 벽돌공장의 높은 굴뚝에 달이 걸려 있던 밤, 그 맨 꼭대기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던 난장이가, 그 커다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아재라고, 삼촌은 이미, 그 이야기를 썼다고…….



- 『철노웹진』 2017.12.11.



* 삼촌이 내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고, 전화를 했다. 아주 오래전에도, 술을 못 하는 삼촌이, 술 한 잔 하자고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삼촌은 그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삼촌이 “꼭 해야 할 말”이, 그때 하지 못한 말이란 걸 안다. 나는 이 글을 크게 출력해서 삼촌에게 드렸다. 삼촌이 커다란 확대경을 대고 이 글을 읽었다. 커다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아재를, 삼촌은 “엉빙이아재”라고 불렀다. 미국으로 떠난 삼촌의 후배 진호아재가 돌아와서 엉빙이아재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쓰기로 했었다고 삼촌이 말했다. 삼촌은 진호아재가 엉빙이아재 이야기를 쓸 집필실을 구했다고 말했다. 엉빙이아재 이야기의 교정도 삼촌이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내 난쏘공도, 책이 나올 때, 교정을 안 봤어. 진호도 그걸 알고 있었지.” 삼촌의 눈빛은 젖어있었다. 진호아재는 엉빙이아재 이야기를 쓰지 못하고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커다란 나무에 별이 쏟아지던 밤, 마을 아이들에게 귀신이야기를 들려주던 진호아재를 기억한다. “너는 이 세상에,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니?” 한 아이씩 돌아가며, 진호아재가 물었다. 내 차례가 오고 있었다. “뭐라고 말할까?” 내가 삼촌에게 속삭였다. “고생해서 얘기했는데, 있다고 해줘.” 삼촌이 내게 속삭였다. 나는 진호아재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좋아하던 진호아재를 잊지 못한다. “진호는 그때 이미, 자기가 써야 할 글들을, 다 써버린 거야.” 삼촌이 말했다. 그 무렵 진호아재가 쓴 글들을,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읽었다. 젊은 날의 진호아재가 짊어졌던 삶의 무게가 나를 아프게 했다. 삼촌은 엉빙이아재 이야기를, 내가 희곡으로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엉빙이아재의 시대와, 엉빙이아재의 아픔을, 삼촌의 시대와, 삼촌의 아픔을, 진호아재의 시대와, 진호아재의 아픔을 마주하기에는, 나는 너무 약했다. 내가 쓰겠다고 했으면, 삼촌이 좋아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그게 아프다.


** 진호아재는 단편소설 「엉빙이의 겨울」을 썼다. 엉빙이가 아홉 살이었을 때, 엉빙이 아버지는 죽창을 꼬나들고 집을 떠났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엉빙이는 긴 장대 끝에 매달려 있던 산발한 아버지의 목을 보았다. 엉빙이는 아홉 살 겨울에서 나이가 멈췄다. 날이 풀리면 엉빙이는 집을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30년이 지나도록 날이 풀리지 않았다. 「엉빙이의 겨울」은 추모문집 『숨겨진 전설, 전진호 이야기』(연극과인간, 2005)에 실렸다.


*** 김명환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사화집 『시여 무기여』에 시 「봄」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첫사랑』, 산문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가 있다.
조세희는 1942년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났다.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돛대 없는 장선』이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있다.
전진호는 194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들개」, 국립극장 장막극 공모에 「밤과 같이 높은 벽」이 각각 당선되며 연극계의 기린아로 촉망받았다. 희곡집 『인종자의 손』, 추모문집 『숨겨진 전설, 전진호 이야기』가 있다.


**** 이글은 산문집 『볼셰비키의 친구』(갈무리, 2019)에 실렸다.


커다란 나무와 꼬마시인 김명환. 1967년 소설가 조세희가 찍었다.

커다란 나무와 꼬마시인 김명환. 1967년 소설가 조세희가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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