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호] 질 들뢰즈,『니체와 철학』

서평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6 09:52
조회
332
질 들뢰즈,『니체와 철학』 (민음사, 2008) 읽기

김상범

1. 니체의 존재론

이 책은 지성계에서 주로 ‘문학적으로’ 읽히던 니체를 본격적인 철학자로 만든 걸작이다. 특히 들뢰즈가 이 책을 통해 밝혀낸 니체의 생성-존재론의 영향은 들뢰즈 자신의 이후 저작뿐만 아니라 현대사상 전반에서 나타난다.

니체의 이러한 존재론에서의 근본 개념은 역시 ‘힘’과 ‘권력의지’이다. 이러한 힘은 근본적으로 복수이고, 힘들은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데, 힘들 사이의 관계는 힘들의 양적 차이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힘들의 양적 차이는 ‘미분적 요소’로서의 권력의지에 의해서 생산된다. 그러므로 권력의지는 힘들 사이의 관계를 생산해내는데, 이러한 힘들 사이의 관계가 현실을 구성하므로 권력의지는 현실을 생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힘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사회적, 물리적, 화학적) ‘신체’가 구성된다. 들뢰즈는 신체를 힘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환경’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견해가 아니라고 말한다. 힘 관계 이전에는 신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신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힘의 영역, 다수의 힘들이 서로 투쟁하는, 영양을 제공하는 환경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정의하지는 않는다....신체를 정의하는 것은 지배하는 힘들과 지배받는 힘들 간의 관계이다. 힘의 모든 관계가 하나의 (화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정치적) 신체를 구성한다. 모든 불균등한 두 힘은 그것들이 관계 속에 들어가자마자 하나의 신체를 구성한다.”(『니체와 철학』,p.87)

이와 같이 힘 관계가 신체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힘 관계를 생산해내는 권력의지는 신체 이전에 존재하고 신체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권력의지는 비물체적인 것이고, '힘 관계'와 더 나아가 '현실적인 것'을 생산해내는 잠재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권력의지를 ‘권력을 목표로 하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권력’은 고정된 힘들 사이의 관계이고, 따라서 권력의지가 ‘권력’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권력의지 이전에 고정된 힘들 사이의 관계가 먼저 존재한다는 뜻이므로, 이와 같은 권력의지에 대한 이해는 오류에 불과하다.

권력의지는 힘들 사이의 관계를 생산해내지만, 이것은 미리 설정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발성’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지는 근육과 신경에 신비롭게 작용하는 것도, 더욱이 일반적인 물질에 작용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의지에 작용하는 것”(『니체와 철학』,p.27)이고, 의지는 다른 의지와의 상호작용 속에 노출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작용 속에서 하나의 의지가 다른 의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힘 관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힘이 다른 힘을 온전히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배/통제가 불가능하게 되면, 힘들은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의 '현실'을 구성하지 못한다.

유명한 니체의 ‘주사위 던지기’ 은유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은유에서 주사위를 하늘로 던지는 것은 우연을 긍정하는 것이고, 주사위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필연을 긍정하는 것이다. 권력의지에 의한 힘 관계의 우발적 생성은 주사위를 하늘로 던지는 것이고, 이러한 힘 관계에 의한 ‘현실’의 필연적 생성은 주사위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주사위 던지기’의 긍정, 즉 이중의 긍정, 우연과 필연의 긍정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이러한 반복은 영원회귀이다.

이처럼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는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영원회귀 속에서 매번 다른 힘 관계가 형성되므로 영원회귀는 동일자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이라고 볼 수 있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가 <영원회귀>란 표현을 동일자의 회귀로 이해할 때는 항상 오해를 낳는다. ..되돌아 옴 그 자체는 자신을 차별자로, 다수로 긍정하는 하나이다.”(『니체와 철학』,p.101)

들뢰즈는 또한 “영원회귀는 권력의지가 원리인 종합”(『니체와 철학』,p.103)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원회귀 속에서의 권력의지에 의한 힘 관계의 형성은 힘들의 ‘종합’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종합은 힘들의 종합, 그것들의 차이의 종합, 그것들의 재생산의 종합이다.... 의지가 아니라면, 누가 힘과 힘의 관계를 결정하면서, 힘들의 종합에 있어서 원리의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니체와 철학』,p.103)

영원회귀란 결국 이러한 종합이 매순간마다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끊임없는 ‘차이’의 반복이지, 동일자의 회귀는 아니다. 이렇게 영원회귀를 동일성의 반복으로 이해하는 것은 권력의지에 의한 힘 관계의 생산이 근본적으로 ‘우발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즉 권력의지가 다른 권력의지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의 의지에 의해 통제가 불가능한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순환’과 ‘메커니즘’은 이렇게 ‘차별자’의 영원회귀를 동일성의 영원회귀로 포섭하려는 노력인데, 이것은 니체의 생각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순환적인 가정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공존하는 순환들의 차이와 특히 순환 속에서 다른 것의 현존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회귀를 차별자와 그것의 재생산의 이유인 어떤 원리, 차이와 그것의 반복의 이유인 어떤 원리의 표현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니체와 철학』,pp.101~102)

물론 그 원리는 권력의지이고, 이처럼 영원회귀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권력의지 개념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2. 니체의 인식론

그리고 권력의지에 대한 이해는 니체의 존재론만이 아니라 인식론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필수적이다. 니체의 인식론에 있어서 ‘물자체’나 ‘사실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히려 이러한 ‘물자체’나 ‘사실자체’는 ‘해석’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인식 자체가 해석이라는 말은 모든 인식이 의미-인식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모든 인식이 의미-인식이라는 말은 현상의 이면에 ‘물자체’나 ‘사실자체’는 없고, 이러한 현상 자체가 의미를 실어나르는 하나의 ‘기호’ 혹은 ‘징후’라는 것을 뜻한다.

“하나의 현상이란 외관이 아니며, 결코 출현도 아니지만, 실제적인 힘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기호이며 징후이다. 모든 철학은 징후학이자 기호학이다. 과학은 징후학적이고 기호학적인 체계이다.”(『니체와 철학』,p.20)

그리고 이러한 기호와 징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힘’이며 이러한 기호의 지배적 의미는 이러한 기호를 독점하는 힘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호를 독점하는 힘들을 포함한) 힘들 간의 양적 차이를 결정하는 권력의지가 이러한 힘들의 성질과 힘 관계 속에서 힘들의 위상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해석하는 자는 권력의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권력의지는 해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평가하는 것, 즉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권력의지의 원초적 성질은 긍정과 부정인데, 이것은 가치평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인식에는 이러한 권력의지가 작동하며, 따라서 모든 인식은 가치-인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인식은 의미-인식이자 가치-인식이며, 따라서 사유의 요소는 진리가 아니라 의미와 가치이다.(『니체와 철학』,p.190) 그리고 이러한 의미와 가치를 생산해내는 것이 권력의지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유는 권력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권력의지가 아닌 힘의 차원에서 고려하면 사유는 이 사유를 독점하는 힘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힘들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이지만) 니체에게 있어서 힘의 원초적 성질은 적극적임과 반응적임인데, 들뢰즈에 의하면 사유가 반응적인 힘들에 의해 독점되어 있는 동안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유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타성에 젖어 있는 사유를 깨우기 위해서는 사유를 독점하는 새로운 힘들이 적극적이어야 하는 것은 물론, 이러한 힘들이 사유에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 이와 같은 강제적인 폭력과 훈련을 니체는 ‘문화’라고 부른다.

“활동성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항상 사유의 거듭제곱이고, 어떤 능력의 자연적 발휘가 아니라 사유 자체 속에서 사유 자체를 위한 특별한 사건이다....그런데 만약 힘들이 그것에 어떤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제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폭력이 사유인 한에서의 그것에 가해져야만 하고 그것을 적극적 생성 속으로 던져버려야만 한다.”(『니체와 철학』,p.196)

3.니체의 문화론

니체-들뢰즈에 의하면 문화는 폭력적인 훈련과 선택이다. 그리고 이들에 의하면 본래적인 문화는 반응적 인간을 적극적인 인간으로, 즉 주권적 개인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반응적 인간을 어떻게 적극적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가? 들뢰즈에 의하면 이렇게 반응적 인간을 적극적 인간으로 만드는 훈련은 “그가 반응적인 힘들을 행사할 수 있도록”(『니체와 철학』,p.237) 강제하는 것인데, 이것은 적극적인 힘들로 하여금 반응적인 힘들에 영향을 끼치면서 반응적인 힘들이 적극적인 힘들로 변형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형의 과정으로서의 본래적 문화를 니체-들뢰즈는 인간의 ‘종적활동’이라고 부른다.

“...그 활동이 반응적 힘들을 훈련시키고, 그것들을 영향받을 수 있게 만들며, 그것들 자체를 적극적으로 만들기 원한다....”(『니체와 철학』,p.294)

그러나 니체는 이런 본래적인 문화가 역사 속에서 타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반응적인 힘들이 적극적인 힘들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적극적인 힘들을 반응적으로 만드는 것, 즉 반응적인 힘들의 승리가 보편사의 원리이자 의미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 변질 자체이고 그것은 <문화의 퇴행>과 혼동된다. 종적 활동 대신, 역사는 우리에게 인종들, 민족들, 계급들, 교회들 그리고 국가들을 제시한다. 종적 활동에, 그것을 회수하고 흡수하러 오는 반응적이고 기생적 특징의 사회적 조직들, 결집들, 공동체들을 이식시킨다. ...반응적인 힘들의 승리는 역사 속에서의 한 부수적인 결과가 아니라 <보편사>의 원리와 의미이다.”(『니체와 철학』,pp.244~245)

이러한 역사 속에서의 문화의 타락과 반응적인 힘들의 승리는 훈련과 선택의 의미와 목적을 크게 변질시킨다. 이제 훈련은 반응적인 인간을 적극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법과 규율에 의해 길들여진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선택은 적극적인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가 ‘노예’라고 부르는 인간형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노예’와 같은 유형이나 반응적인 힘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면, 본래적인 문화는 되찾을 수 없는 것 아닐까? 실제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문화에 관해서는 우리가 오래전에 그것이 사라졌고, 그것이 아직까지 시작되지 않았음을 말해야하만 한다.”(『니체와 철학』,p.244)

4. 초인을 위하여

그렇다면 왜 반응적인 힘은 승리하는가? 그것은 부정적인 권력의지로서의 ‘무의 의지’가 보편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무의 의지’는 우월하고 적극적인 힘의 양을 줄임으로써, 힘들의 양적 차이를 감소시키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적극적인 힘을 반응적인 힘으로 전환시킨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바로 무의 의지가 부정적이고 전복된 이미지를 발전시킨다. 그것은 뺄셈을 한다. 그런데 그 뺄셈의 연산에서 항상 수의 부정적 사용을 나타내는 가상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반응적인 힘들의 승리의 수적인 기록을 제공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반응적인 힘들이 다함께 적극적인 힘보다 더 강하게 되는 덧셈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그것 자체를 반응적인 힘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것의 차이를 부정하는 뺄셈에 호소해야만 한다.”(『니체와 철학』,pp.114~115)

따라서 반응적인 인간을 적극적인 인간으로 변환시키기 위해서는 지배적인 권력의지의 성질이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뀌어야 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변환을 ‘개종’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개종’ 속에서 ‘무의 의지’는 긍정적인 의지에 종속되며, 긍정적인 의지의 한 양태가 된다. 이제 ‘무의 의지’는 반응적인 힘들의 ‘파괴’로서 자신을 드러내며, 이러한 ‘파괴로서의 부정’은 이제 권력의지의 성질(속성)이 아니라 긍정적인 권력의지의 한 양태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그것은 긍정에 종속되고, 삶의 초과에 봉사하게 된다. 부정은 더 이상 그 속에서 삶이 자신 속에서 반응적인 모든 것을 보존하는 틀이 아니지만, 그와 반대로, 그것이 반응적인 모든 형태를 희생시키는 행위이다.”(p.305)

그리고 이러한 ‘긍정의 한 양태로서의 부정’ 없이는 진정한 긍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명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낙타’의 yes는 참된 긍정이 아니다. ‘아이’의 긍정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자’의 부정이 있어야만 한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신성한 긍정>을 사자의 <신성한 부정>이 선행해야만 한다. ...인간의 적극적 파괴로서의 파괴는 창조자의 예고이다.”(p.307)

이처럼 들뢰즈는 ‘긍정’을 ‘창조’와 연결시키고 있다. 긍정하는 것은 현실적인 것을 승인하는 것도, 현실의 무게를 짊어지는 것도 아닌, 창조하는 것, 특히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 그것은 창조하는 것, 짐을 지지도 견디지도 수락하지도 않는 것이다.”(p.320)

그리고 이렇게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인간, 즉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이 바로 ‘초인’인 것이다. 니체의 철학은 이러한 ‘초인’의 탄생을 위한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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