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호] 『선악을 넘어서』읽기 /김상범

서평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8 20:53
조회
241
『선악을 넘어서』

김상범


0.

선악 을 넘어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단순히 종래의 기독교적 도덕을 극복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래의 가치평가를 넘어선다는 것은 종래의 모든 형이상학을 극복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겉보기에는 독자적으로 성립한 듯한 모든 논리도 그 배후에는 가치판단"1)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의 이 책은 종래의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성의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에 대한 급진적이고 철저한 비판은 '힘'과 '권력의지'에 기반하는 새로운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의 건설로 이어진다.

1.

『선악을 넘어서』의 첫 번째 장인 「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에서 니체는 우리가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성급하게 달려가기 전에, “우리 내부의 <어떤 것>이 진리를 원하는가?”2)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이러한 철학을 추동하는 의지가 ‘창조의지’로서의 권력의지라고 말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결국 철학이란 이러한 전제적 충동 그 자체이며 힘에의, <세계창조>에의, 그리고 제일원인에의 가장 정신적인 의지인 것이다.”(「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선악을 넘어서』(청하, 1982),p.32)

이와 같이 진리는 ‘발견’되기보다는 ‘발명’되고 창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고정된 가치의 대립을 통해서 새로운 철학의 창조를 통제하려고 한다. 니체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고정된 이분법적인 가치의 대립을 철학에 의해 재생산된 엄숙한(권위주의적인) ‘신앙’이라고 말한다.

“그 들의 <지식>에 대한 관점과 그들이 마침내 엄숙하게 <진리>라고 명명한 것에 대한 관점 등은 바로 이러한 <신앙>에서 비롯된다. 형이상학자들의 신앙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상반되는 가치의 대립에 대한 믿음이다.”( 「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선악을 넘어서』,p.24)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 속에서 고정된 이분법 속에서의 가치 없는 것과 가치 있는 것이 실제로는 “본질적으로 하나”3)일 수 있음을 시사하며, 이러한 “위험한 가정”4)을 수용하는 철학자들을 지금까지의 철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철학자”5)라 고 명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철학자’들도 니체가 「우리 학자들」이라는 장에서 ‘미래의 철학자’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리고 ‘철학적 노동자’ 혹은 ‘비판자’와 구분되는 이러한 ‘미래의 철학자’들에게 주어진 과업은 “가치를 창조하는 일”6)이다. 니체는 이러한 ‘미래의 철학자’, ‘진정한 철학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제까지 존재해왔던 것과 또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들을 위한 수단, 도구, 망치가 된다. 그들의 <지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하나의 입법이며, 그들의 진리에의 의지는 권력의지이다.”( 「우리 학자들」 ,『선악을 넘어서』,p.144)

그렇 다면 왜 그들의 지식은 “하나의 입법”이고 그들의 과업은 “가치를 창조하는 일”인 것일까? 그것은 앞에서 말한대로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논리와 판단은 그 배후에 있는 가치판단에 의해 지배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가치의 창조는 새로운 앎을 창조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치의 창조는 새로운 삶의 창조와 맞닿아 있는데, 왜냐하면 가치판단은 “일정한 형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생리적 요구”7)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렇게 철학적 사고가 “생리적 요구”의 지배를 받는 “본능적인 행위의 영역”8)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니체에게 있어서 ‘본능’은 ‘권력의지’이다. 니체는 이와 같이 권력의지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고와 행위와 의지의 주체로서 ‘자아’를 상정하지만, 니체는 자아가 <명령하는 권력의지>들과 <종속의지>들의 관계 맺음을 통해서 발생하는 ‘결과’라고 말한다.

“결과, 그것이 나인 것이다.”(「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선악을 넘어서』,p.43)

니체는 또한 자연과학의 ‘합법칙성’을 이러한 권력의지 이론에 입각해서 비판한다. 니체에 의하면 자연과학에 있어서 “자연법칙 앞에서의 만인의 평등“에는 ”평민계급의 적개심“9)(으로서의 권력의지)이 숨어있으며, 자연법칙은 일종의 ‘해석’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 쩌면 상반되는 의도와 해석방식을 가진 누군가가 나타나 동일한 <자연> 혹은 동일한 현상으로부터 무자비하고도 가차 없이 적용되는 권력의지를 판독해낼 수 있을 것이다.”(「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선악을 넘어서』,p.46)

이렇 게 권력의지 이론은 기존의 형이상학과 자연과학 모두를 극복하는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권력의지는 정신에 종속되거나 신체에 종속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신과 신체라는 유기체적 기능들은 권력의지의 “분화와 전개로서 설명”10)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권력의지가 자아(의식)에 종속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아(의식)는 권력의지들의 상호관계의 결과물임을 보았다. 그런데 이것은 ‘신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니체에 의하면 “<의지>는 <물질>(예를 들어 <신경>)에는 작용할 수 없고 오로지 <의지>에만 작용할 수 있”11)는데, 이러한 의지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신체>는 구성되는 것이다.

모든 유기체적 기능(힘)들은 권력의지의 "분화와 전개로서 설명"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권력의지는 서로 차이가 나는 힘들로 분화되고 전개되어나가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의지는 그 자신은 들뢰즈의 말대로 "힘들의 미분적 요소"(『니체와 철학』)로서 이러한 힘들의 관계 속에 함축된 것인 요소인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미분화된, 권력의지들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그것은 오히려 정념과 같은 종류의 실체를 의미하고 유기체적 과정 속에서 각기 분화하고 전개되어 나가기 이전에 모든 것이 강력한 통일성을 유지한 채 내재되어 있는 정념계의 보다 원초적인 형태를 의미하며, 자기 제어와 동화, 섭취, 배설, 신진대사 등과 함께 모든 유기체적 기능들이 여전히 함께 뒤섞인 본능적 생명을 뜻하며, 생명의 원형을 뜻한다."(「자유정신」,『선악을 넘어서』,p.62)

이것 은 들뢰즈-가타리의 '기관 없는 신체'의 개념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관없는 신체'가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잠재적 '실체'이며, 힘(강도, 혹은 기관의 기능)들이 그 위에서 생성, 분배, 소멸되는 미분화된 강도=0의 제로베이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체의 작용하는 힘을 권력의지라는 하나의 용어로 정리"12)할 수 있다.

2.

인식 조차도 이러한 권력의지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인식을 구성하는 권력의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인식할 때 정신이 어떠한 의지들에 의해 작동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정신을 움직이는 “정신의 근본의지”13) 들이 존재한다.

첫째로 이질적인 것, 외부적인 것을 자신에 동화시키려는 의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의지는 이질적인 것이나 <외부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맞게 수정하거나 왜곡”14)한다.

둘째로 이러한 이질적인 것, 외부적인 것을 배척시키려는 의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의지는 “자신의 창문을 폐쇄”15)하며 “외부 사물의 접근”16)을 거부하고 “암흑과 제한된 지평선에 만족”17)하려는 의지이다.

첫 번째 의지와 두 번째 의지 중에 어느 것이 강한가는 “정신의 동화력”, “정신의 <소화능력>”18)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셋째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려는 의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의지는 "근시안적이고 피상적인 태도로 모든 것을 제멋대로 확대하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하고 재배치하고 미화하는데서 오는 넘칠 듯한 자기만족"19)을 느끼려는 의지이다.

넷째로 다른 정신을 속이고 자신을 위장하려는 의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니체는 지식에 대한 의지가 이러한 "표면적인 것에의 의지"20)들에 맞서서 이러한 의지들에 폭력을 행사하는 의지라고 말한다. 니체는 이러한 폭력의 '잔인성'을 강조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끊임없이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것에 집착하기 마련인 정신에 대해 심오함과 철저함을 가하도록 고집한다는 것은 정신의 근본의지에 대한 폭력이며 학대이다. 모든 알고자 하는 욕망 속에는 한 방울의 잔인성이 용해되어 있다."(「우리의 미덕」,『선악을 넘어서』,p.166)

3.

니체 는 이러한 '잔인성'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잔인성'이 제대로 된 학문뿐만 아니라 고급문화 자체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폭력적인 훈련을 강요하는 것은 "더 강한 힘과 더 높은 <도덕>이 요구"21)되는 것이다.

이처 럼 문화의 발전에는 '폭력'과 '잔인성'이 필수조건인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모든 문화의 발전은 "되는대로 내버려두려는" 의지에 대해 폭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인간을 훈련시키려는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과거와 현재를 불문하고 사상 그 자체의 면이나 정치, 수사학, 신앙, 예술, 윤리 등의 어느 면에서고 가장 자유롭고 정교하고 대담하고 활기차고 대가답게 견실한 모든 것들은 오로지 <그러한 자의적인 법칙의 억압>에 힘입어 발전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해서 되는대로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바로 이러한 억압이 이 세상의 <본질>이요 보다 <자연스러운> 것일 가능성이 많다."(「도덕의 박물학」, 『선악을 넘어서』 ,p.110)

뿐만 아니라 니체는 인간의 성장 자체가 온실 속 화초와 같은 평온하고 안락한 환경에서가 아닌 끊임없이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위험하고 잔인한 환경 속에서라고 말한다. 니체는 그렇기 때문에 평온과 안락을 추구하는 이들을 '가축'이라고 부르며 비판한다. 『도덕의 계보학』에서 니체는 이러한 이들을 '노예'라고 부른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이런 자들에게 행복이란 본질적으로 마취, 마비, 안식, 평화, '안식일', 긴장을 풀고 사지를 뻗어 휴식을 취하는 것, 요컨대 수동적인 것으로 나타난다."(프리드리히 니체, 홍성광 옮김,『도덕의 계보학』(연암서가,2013),p.45)

반면에 '주인'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환경과의 투쟁, 그리고 자신과의 투쟁 속에서 더 강한 존재가 되는 능동적인 활동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 유형, 즉 ‘주인’의 유형과 ‘노예’의 유형은 동일한 환경의 서로 다른 결과일 수 있다. 니체는 현대사회와 같은 여러 가치들이 혼재된 “분열의 시대”22)에는 한 개인의 몸속에서 여러 가치들이 서로 투쟁을 벌인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이러한 투쟁의 중단으로서 평화와 안락을 바라게 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러한 말기 문화적, 해체기적 인간들은 대체적으로 보다 허약한 인간들이기가 쉬우며 그들의 가장 간절한 소망은 그들이 겪고 있는 전쟁 상태가 한시바삐 종식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들의 행복관이란 진정제적 사고법...과 유사한 것으로 주로 휴식, 안정, 충족, 그리고 궁극적으로 화합에 이르는 것... ”(「도덕의 박물학」,『선악을 넘어서』,p.121)

그런데 이러한 “대립과 투쟁이 삶의 동기가 되고 삶을 보다 매력적으로 만드는 작용”23)을 하게 만드는 힘과 의지를 가진 정신에게는 이러한 자신과의 투쟁이 자신을 지배하고 자신을 조절하는 능력을 훈련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서 “매혹적이고 승리할 운명을 타고난 수수께끼 같은 인간들”24) 이 출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수수께끼 같은’ 강력한 인간이 나타나는 것은 허약한 노예와 같은 유형의 출현과 “출현의 배경을 이루는 환경”25)이 동일할 수 있다.

이처럼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인간 자신이 어떠한 힘과 의지를 가지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은 니체가 ‘자연법칙 앞에서의 만인의 평등’을 비판하는 것과 서로 통한다.
그런데 환경이 공동체에 의해 장려되는 미덕과 인간 유형을 결정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인간을 “자주 무서운 위협에 직면”26)하도록 만들고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살아나올 수 없는”27) 환경, 즉 “혜택이나 영양과잉, 과도한 보호”28)등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에서는 모험정신이나 과감성, 그리고 독자적이고 강력한 개인이 존중받아 왔으나,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29) 이러한 억세고 강력하며 위험스러운 충동들은 <악>이 되어버린다. 반면에 유순하고 평범하며 온화한 정신은 도덕적인 것으로 장려되기 시작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가 장 왕성하고 강력한 충동이 맹렬히 터져나와 그 개인으로 하여금 평범하고 단조로운 떼거지적 양심을 이탈하게 만들 때 그 공동체의 자기 확신과 자기 신뢰는 척추가 부러져 나가듯 붕괴되고 말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이러한 충동들은 최악의 것으로 낙인 찍혀지고 배척을 당하는 것이다. 고상하고 독립적인 정신, 뛰어나게 되려는 의지, 강한 이성조차도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개인을 떼거지보다 높은 위치에 올리고 이웃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악이라고 불리우는 반면, 정중하고 겸손하고 유순하고 순응적인 정신과 평범한 욕망은 도덕이라는 명칭과 명예를 얻게 된다. ”(「도덕의 박물학」,『선악을 넘어서』,p.123)

드디 어 우리는 떼거지=노예, 독자적인 개인=주인 이라는 선명한 대비의 이미지를 얻게 된다. 이렇게 유순하고 순응적인 떼거지=노예는 기본적으로 복종하는 자이고, 독자적이고 강력한 개인으로서의 주인은 명령하는 자이다. 명령하는 자로서의 독자적인 개인은 언제나 예외적 소수이고 재생산되지 못하며 복종하는 자로서의 떼거지는 언제나 ‘정상적인’ 다수로서 재생산되기 때문에 사회에서 명령하는 기능은 발전되지 못하고 퇴행하기 마련이다. 근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퇴행은 심해져서 지배자조차도 명령할 능력이나 본능을 가지지 못해서 “더 높은 명령”30)(헌법, 법률, 정의)등의 수행자로 자기 자신을 제시한다. 이들은 “떼거지적 사고방식에서 떼거지적 격언을 빌려 <국민의 첫째가는 공복>이라든가 <공공복리의 도구>라고 자처”31)하 기도한다. 그래서 근대 민주주의는 지배자도 노예, 피지배자도 노예로서 모두가 노예인 정치체제인 것이다. 이러한 떼거지의, 떼거지에 의한, 떼거지를 위한 체제로서의 근대 민주주의 하에서는 떼거지의 도덕, 노예의 도덕이 지배하게 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오늘날 유럽의 그 떼거지적 인간은 자기만이 존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종류의 인간인 것처럼 자처하고 나서며 유순하고 협조적이며 떼거지에게 유용한 자신의 특성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적 미덕이라고 찬미한다. 그들이 미덕으로 보는 것은 공공심, 자비심, 사려, 근면 온건, 겸양, 관용, 연민 등이다.”(「도덕의 박물학」『선악을 넘어서』,p.120)

니체는 이러한 떼거지로부터의 독립이 강자에게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니체는 가축 떼로부터 이러한 강자의 독립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강자 스스로도 “타인에게 매여서는 안 된다.”32)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보존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독립성에 대한 가장 어려운 시험이다.”(「자유정신」,『선악을 넘어서』,p.65)

니체는 "선악을 안다고 믿는 것, 선을 찬양하고 악을 비난함으로써 스스로를 미화하는 것, 스스로를 선이라 부르는 것 등은 바로 가축떼, 혹은 가축떼적 인간의 본능"33)이 라고 말한다. 따라서 가축 떼를 극복하는 것은 노예의 도덕, 즉 선악의 도덕을 극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악을 넘어서는 것'이 건강한 권력의지와 강력한 힘을 추구하는 존재론, 인식론, 문화론, 윤리학을 건설하는 데 필수조건이다.

니체는 때거지의 도덕이 "나는 도덕 그 자체이며 나 이외의 다른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34)라고 주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떼거지의 도덕보다 더 차원 높은 도덕은 언제나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가축 떼, 혹은 떼거지의 도덕이 이와 같이 주장하는 것은 단지 이러한 주장이 가축 떼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니체의 말대로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35)는 것이다. 그리고 니체에게 있어서 욕망은 곧 권력의지이다. 이렇게 도덕조차도 욕망=권력의지에 의해 설명하는 것이 바로 니체의 사상인 것이다.

더 차원 높은 도덕은 가축 떼가 아닌 '주인'의 욕망=권력의지에 의해 형성되는 도덕인 것이고, 이것이 바로 '주인의 도덕'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책에서 기존의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 문화론, 정치론은 극복되고 있으며 '권력의지'에 기반한 철학, 문화론, 정치론으로 대체되고 있다.

1) 프리드리히 니체, 김훈 역, 「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선악을 넘어서』(청하, 1982),p.27
2)「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선악을 넘어서』,p.25
3)「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선악을 넘어서』,p.27
4) 같은 곳
5) 같은 곳
6)「우리 학자들」 ,『선악을 넘어서』,p.144
7)「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선악을 넘어서』,p.27
8) 같은 곳
9)「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선악을 넘어서』,p.46
10)「자유정신」,『선악을 넘어서』,p.62
11) 같은 곳
12) 같은 곳
13) 「우리의 미덕」,『선악을 넘어서』,p.166
14) 같은 곳
15) 같은 곳
16) 같은 곳
17) 같은 곳
18) 같은 곳
19) 「우리의 미덕」,『선악을 넘어서』,p.167
20) 같은 곳
21) 「도덕의 박물학」, 『선악을 넘어서』 ,p.114
22)「도덕의 박물학」,『선악을 넘어서』,p.121
23) 같은 곳
24) 같은 곳
25)「도덕의 박물학」,『선악을 넘어서』,p.122
26)「고귀함이란 무엇인가」,『선악을 넘어서』,p.214
27) 같은 곳
28) 같은 곳
29)「도덕의 박물학」,『선악을 넘어서』,p.123
30)「도덕의 박물학」『선악을 넘어서』,p.120
31) 같은 곳
32)「자유정신」,『선악을 넘어서』,p.65
33)「도덕의 박물학」, 『선악을 넘어서』 ,p.125
34) 같은 곳
35)「도덕의 박물학」, 『선악을 넘어서』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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