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호] 어두운 범심론을 향한 모험ㅣ문규민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2-12-01 21:05
조회
424
 

어두운 범심론을 향한 모험


문규민 (중앙대 인문콘텐츠연구소 HK연구교수)


‘사변적’이라고 하면 보통 근거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사변을 불가피하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 스티븐 샤비로의 『탈인지: SF로 철학 하기 그리고 아무도 아니지 않은 자로 있기』는 바로 그런 것에 대한 책이다. 샤비로의 주제는 인지도 아니고 의식적 접근도 아닌 감수성(sentience)이다. (6-7) 감수성은 인지를 넘어서지만 의식적 접근에는 미치지 않는 무엇이다. 그것은 인지를 넘어서기에 정보처리에 대한 3인칭적 탐구로 접근할 수 없고, 주체의 의식적 알아차림에 미치지 않기에 1인칭 내성(introspection)으로도 접근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여기서 요청되는 것이 사변(speculation)이다.

그런데 샤비로는 사변의 렌즈로 과학소설을 채택한다. 샤비로에 따르면, 과학소설과 사변은 현실의 기술과학적 성취와 사회적 조건들을 가상적 상황에 밀어 넣는 외삽(extrapolation)을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는 점에서 그리 다르지 않다. 과학소설은 전개된 사변이며, 사변은 일종의 허구나 우화인 것이다. 물론 사변은 제멋대로 행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실제 실천적 차원에서 단순히 몰아내 버릴 수 없다. 비록 절대적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화이트헤드가 “즉각적 과거에 대한 현재 사실의 순응”이라는 부르는 것을 상당부분 받아들일 필요가 있고, 따라서 사변이 화이트헤드가 “피할 수 없는 완강한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언제나 제약을 받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113) 왜 반드시 “순응”해야하는지, “피할 수 없는 완강한 사실”이 무엇인지는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샤비로는 과학소설을 통해 “심리철학과 신경생물학 양쪽의 최근 연구에서 발견되는 과도하게 제한된 인지주의적 가정들”을 넘어서고자 한다. (22) 『탈인지』는 과학소설을 사변적으로 활용하여 인지를 벗어나는 감수성에 접근하고자 하는 책이다. 본 서평에서는 감수성과의 관련이 상대적으로 약한 5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들을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장 ‘철학자처럼 생각하기’는 프랭크 잭슨의 유명한 지식 논변 또는 메리 이야기를 다룬다. 이야기에 따르면, 빨강에 대한 모든 물리적 지식을 다 알지만 평생 흑백방에 갇혀 빨강을 본 적 없는 슈퍼과학자 메리가 난생처음으로 빨간 토마토를 본다. 샤비로는 메리 이야기에 대한 철학적 논쟁이 빨강을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지식’과 그 ‘형이상학적 함축’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정작 질적 경험의 본성 그 자체는 간과되는 상황을 꼬집는다. 논쟁이 놓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개념화가 불가능한 질적 경험의 미학적 본성이다. 칸트가 말하는 “한정되지 않은” 미적 이념에 비교될 수 있는 이 미학적 본성은, 개념화를 거부하기에 “개념적 지식이라는 형태로 이 감각을 보존할 수 없다.” (58) 주체 자신도 개념화하여 접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질적 경험은 ‘어둡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샤비로는 그것을 데이비드 로덴의 암흑 현상학(dark phenomenology)과 연결시킨다. 로덴은 빨강을 보는 질적 경험은 그것을 경험하는 바로 그 순간에만 주체에게 드러날 뿐 그 직후부터 빨강 일반이라는 개념의 한 사례로만 기억되고 상상될 수밖에 없으며, 질적 경험의 상당 부분이 “직관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경험의 주체조차 그 본성을 매우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게 파악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60) 로덴에 따르면, 그 접근 불가능한 어두운 경험에 대해서는 “인지과학자, 신경과학자, 인지 모델 제작자들이 채용하는 … 자연주의적 조사방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61)

샤비로는 로덴의 암흑 현상학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그가 결과적으로 3인칭의 과학적 방법에 호소하는 것을 못마땅해한다. 비록 샤비로가 명시적으로 설명하진 않지만, 이는 아마도 앞서 말한 미학적 본성의 개념화 불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질적 경험인 이상, 어두운 영역 속의 질적 경험들도 개념화를 거부하는 미학적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학적인 개념화도 거부할 것인데, 로덴은 그렇게 과학적인 개념화를 거부하는 영역을 과학적으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는 것이다. 이 곤란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은 사변적 미학(speculative aesthetics)으로서의 과학소설이다. 샤비로가 보기에 과학소설의 역할은 1인칭으로도 3인칭으로도 조사할 수 없는 경험의 어두운 영역에 대한 사변을 가능한다.

2장 ‘컴퓨터처럼 생각하기’에서는 모린 맥휴의 소설 『눈먼 자들의 왕국』을 통해 소프트웨어 체계인 DMS의 감수성을 다룬다. DMS가 오작동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환경을 시험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 시드니와 데미안은, DMS의 ‘내면’이 어떠한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DMS의 내면이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오직 데이터 스트림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이 “맹목성(blindness)과 무심함(deafness)” 속에 있으리라고 추론한다. (78) 그러나 DMS는 정보를 처리할 뿐 아니라 에너지 변화가 일정 정도를 넘어설 경우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자폐적인 주체인 것처럼 보인다.” (87) DMS는 모든 것을 0과 1로 구성된 데이터로 만드는데, 어떤 선험적 규제도 없이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디지털화의 무차별성은 칸트가 말하는 “개념 없는 직관”의 맹목성을 닮았다. DMS는 반복되는 자극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 통상적인 결과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 자극에 반응하기를 갑자기 멈추고, 주인공들은 이를 DMS가 감수성을 가졌다는 증거로 간주한다. DMS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바꿔보려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식으로 말하자면, DMS는 “주체적 정향”을 가지고 있다. (93) 주인공들은 DMS의 자폐적이고 완고한 감수성이 인간과는 절대적으로 무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율한다. 소설은 결국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DMS는 실제로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 무언가가 시드니 자신이 아니었을 뿐이다.” (98)

3장 ‘아바타처럼 생각하기’에서 샤비로는 테드 창의 소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를 통해 가상의 존재인 디지언트의 감수성을 다룬다. 디지언트들은 사회적으로 학습하고 성장하는 가상현실 속 유사-동물인데, 주인공 애나와 데릭은 그들을 애지중지하며 돌보고 기른다. 디지언트의 정신은 정보를 처리하는 모듈이 아니라 휴리스틱들(heuristics)로 구성된다. 휴리스틱은 모듈에 비해 투박하지만 모듈보다 유연하다. 휴리스틱으로 구성된 디지언트의 지능은 물질적 제약 안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즉 세상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다.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샤비로는 전반적 감각력(overall sensibility)이라고 부른다. (115) 디지언트의 지능 또한 전반적 감각력인 셈이다. 심지어 디지언트는 장난기가 있고, 지루한 일을 싫어하며, 이것저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다. 이렇게 정서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디지언트는 화이트헤드가 말한 “자기향유의 일정한 절대성”을 가지는 것 같다. (142)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디지언트는 순종적이고 효율적이지 않다. 그것의 지능은 전반적 감각력이자 정서의 파생물일 따름이다. 디지언트에게서는 감각력 또는 감수성이 인지나 지능에 앞선다. 디지언트의 감수성은 탈인지적(discognitive)이다.

4장 ‘인간 존재자처럼 생각하기’에서는 스콧 베커의 소설 『뉴로패스』를 소재로 인간 의식을 고찰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심리학 교수인 토마스인데, 그는 “논증A”라 불리는 기묘한 논증을 제시한다. 논증의 요점은 우리가 경험하는 의식이 사실은 자신의 정보처리과정을 꿰뚫어 볼 수 없는 뇌의 무지를 가리기 위해 뇌가 스스로 만들어낸 “만화” 또는 작화(confabulation)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만화가 뇌가 자신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정보처리과정 이외에 뭔가를 더 알아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보처리과정을 결코 알지 못해서 만들어진다는 데 있다. 논증A는 우리의 의식이 ”근본적 결핍의 결과”라는 것, 우리는 정보의 과잉이 아니라 오히려 “정보적인 빈곤으로 인해 보고 듣고 느낀다”라는 것을 시사한다. (155) “내 일인칭 관점에서 풍부해 보이는 것은 이 근본적인 희박함에 따르는 환각적 효과다.” (156) 논증A의 열렬한 신봉자인 닐은 논증을 제시하고도 정작 그것에 충실하지 않은 토마스를 비난하면서, 그를 경험을 조작하는 기계에 묶어놓고 ‘자아가 없어지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토마스는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결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을 느끼도록 강요”받는다. (186) 그 경험은 정의상 탈인지적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인지가 “망상적인 작화증”이나 “사후적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187) 아무도 아닌 자가 된다는 것(being no one)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범람하는 비인격적 정동, 무아(無我)의 감수성과 같을 것이다. 내가 아무도 아닌 자가 되는 곳, 그 속에는 “검정보다 어두운 동요가, 단순한 휘청거림”이 있다. 암흑 현상학이 있는 것이다.

6장 ‘외계인처럼 생각하기’에서 샤비로는 피터 와츠의 소설 『블라인드 사이트』를 분석하면서 의식과 그 효용, 그리고 사변의 문제를 다룬다. 『블라인드 사이트』는 ‘훼방꾼들(scramblers)’이라고 불리는 외계인 종족을 조사하기 위해 보내진 우주선 테세우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시리는 어린 시절 한쪽 대뇌 반구를 들어낸 이후 극단적인 자폐를 겪게 되는데, 공감을 완전히 상실한 나머지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공감하지 못한다. 시리는 모든 것의 표면만을 볼 수 있고, 그 표면을 단서로 모델을 구성하고 알고리즘을 연역하여 그들의 속을 ‘상상’해야만 한다. 접근이 차단된 타자의 내면을 정밀하게 재구축한다는 점에서, 시리의 상상은 사실상 사변과 다르지 않다. 드디어 시리는 강력한 방사선 속에서 살아가는 거대한 혐기성 군집 생물인 훼방꾼들과 조우한다. 그들은 인간을 훨씬 능가하는 인지능력을 가지고 튜링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언어를 정밀하게 모의하지만, 어떤 것도 느끼거나 감각하지 못한다. 훼방꾼들이 압도적인 지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애당초 감수성을 버렸기 때문인데, 이는 뒤집어 말하면 감수성이 기능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역기능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리는 자신이 훼방꾼이라고 상상함으로써 훼방꾼들에게는 감수성을 표현하는 메시지가 아무런 효용도 없으며 오히려 해로운 “바이러스” 또는 “스팸메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아낸다. (262-66) 감수성은 효용이 아니라 미학의 문제, 칸트가 말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 “개념 없는 합목적성”의 문제이다. (266) 효용을 추구하는 인지의 측면에서 보자면, 미적 향유를 본질로 하는 감수성은 그야말로 탈인지적이다.

7장 ‘점균처럼 생각하기’에서 샤비로는 묻는다. “원형질성 점균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269) 황색망사점균(Physarum polycephalum)은 하나의 세포체 안에 다수의 핵이 우글거리고 있기에 단일 개체로도, 여러 개체로 구성된 초유기체로도 정의될 수 없다. 그것은 탈중심화된 존재로서 하나의 개체군(population)이자 들뢰즈적인 다양체(manifold)이다. 이 점균은 실로 놀라운 인지능력을 보여준다. 그것은 공간에 표시를 남겨 미로를 탈출하고, 생화학적 진동자들로 리듬을 생성함으로써 시간 감각을 가지며, 이를 통해 온도 변화를 예측하여 자신의 활동 속도를 조정할 뿐 아니라 도쿄의 지하설 노선 같은 복잡한 패턴에서 최적 경로를 찾아내기까지 한다. 이런 능력은 “비관습적 계산(unconventional computation)”에 의해 가능한데, 이 계산은 선험적 규칙이 아니라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법칙”과 “휴리스틱적인 역동성”에 따라 이루어진다. (284) 황색망사점균이 보여주는 유연하고 상황적인 행위성은 모든 생물체가 ‘자발적인 결단’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291) 점균의 분산된 인지는 복잡한 의사결정을 위해 의식이 반드시 통일될 필요는 없음을 보여준다. 칸트가 의식의 통일성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초월론적 통각은 필수적이지 않다. 게다가 점균에게 뇌가 없다는 사실은 인간이나 동물의 뉴런에 호소하지 않고서 복잡하고 자발적인 의사결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통일된 의식과 뉴런의 정보처리를 대신해서 점균을 인도하는 것은 “주변의 객체, 장, 그리고 에너지 흐름과 조우하면서” 생성되는 느낌이다. (295) 이쯤 되면 황색망사점균이 감수성을 갖지 않는다고 하기 힘들다. 물론 그것의 감수성은 우리의 인지적 접근을 벗어나 있는 탈인지적인 감수성이다. ‘점균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는 여전히 암흑 현상학의 영역에 속한다.

『탈인지』는 의식, 감수성, 경험, 느낌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이라면 꼭 한 번은 읽어봐야 할 책이다. 철학적 논쟁과 과학소설, 과학적 발견을 종횡무진하는 샤비로의 솜씨는 일품이다. 그런데 바로 그 솜씨가 책 읽기를 쉽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많은 배경지식을 요구하는 쉽지 않은 책이지만, 샤비로의 서술을 충실하게 따라가다 보면 분명히 얻는 바가 있으리라 확신한다. 『탈인지』는 근래 나온 어떤 책보다도 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사변이 가진 힘을 보여주고 있다. 철학, 과학, 소설을 쌓아 올린 높은 장벽을 넘었을 때, 독자들은 사변이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를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샤비로가 그리는 세계는 감수성을 가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비인간 존재자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감수성을 품고 있는 기묘한 세계, 어두운 범심론(dark panpsychism)의 세계다. 물리적 우주의 대부분이 암흑 물질로 채워져 있다면, 감수성과 경험의 세계는 대부분 암흑 현상학 속에 잠겨 있을 것이다. 최첨단 우주선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 암흑 물질을 가로지르듯이, 과학소설에 고취된 사변은 경직된 상식을 벗어나 암흑 현상학을 횡단한다. 그것은 어두운 범심론 속으로 자신을 외삽하는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인 것이다.


*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2년 11월 30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https://bit.ly/3uyGy2h )에 게재되었습니다.


*


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사물들의 우주』(스티븐 샤비로 지음,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1)


이 책은 비상관주의적 사고에 대한 사변적 실재론의 일반적인 주장, 즉 인간 정신이 관계하고 이해하는 방식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사물 및 객체에 대한 주장을 탐구한다. 스티븐 샤비로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현재에 지배적인 사변적 실재론 사상을 예상했고 그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한 세기 동안의 형식화와 정화를 향한 집요한 근대주의적 시도를 거쳐, 어쩌면 애초에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 시대에 화이트헤드는 마치 우리의 뇌리에 스며들듯이 돌아온 것이다.


예술과 객체』(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2)


미학을 제일철학으로 주장하면서 예술의 자율성과 아름다움에의 귀환을 선언하는 책! 하먼은 실재적 객체와 감각적 성질 사이의 균열로 규정되는 ‘아름다움’의 규준 아래에서 ‘아름다운 것’으로서 ‘예술적 객체=객체+감상자’의 혼성 객체라는 테제를 제시한다. 이 테제를 기반으로 그는 비근대주의적이고 비관계주의적인 객체지향 미학으로서 ‘기이한 형식주의’를 도발적으로 제시한다.


에일리언 현상학, 혹은 사물의 경험은 어떠한 것인가』(이언 보고스트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2)


이질적인 ‘사물들의 은밀한 삶’을 ‘경험’하고 ‘소통’하기 위한 실천으로서의 ‘실용주의적 사변적 실재론’을 모색하고 있는 책. 이 책에서 이언 보고스트는 사물을 존재의 중심에 두는 객체지향 존재론을 전개한다. 여기서 인간은 유일한 관심사도 아니고 심지어 근본적인 요소도 아니다. 철학적 주제는 인간과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물들에 더는 한정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철학적 주제는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존재의 지도 :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레비 브라이언트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자연주의와 유물론을 당당히 옹호하는 한편으로, 이들 친숙한 관점을 변화시키고 문화 자체가 어떻게 자연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브라이언트는 범생태적 존재론을 지지하는데, 요컨대 사회는 담론과 서사, 이데올로기 같은 기표적 행위주체들과 더불어 강과 산맥 같은 비인간의 물질적 행위주체들도 고려함으로써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생태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브라이언트는 새로운 기계지향 존재론의 토대를 구축한다.


비유물론 : 객체와 사회 이론』(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사회적 세계에는 어떤 객체들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특정한 피자헛 매장은 그 매장을 구성하는 종업원과 탁자, 냅킨만큼 실재적일 뿐만 아니라, 그 매장이 종업원과 손님의 삶에 미치는 사회적 및 경제적 영향과 피자헛 기업, 미합중국, 행성 지구만큼 실재적이기도 한가? 이 책에서 객체지향 철학의 창시자인 저자 그레이엄 하먼은 사회생활 속 객체의 본성과 지위를 규명하고자 한다. 객체에 대한 관심은 유물론의 한 형태에 해당한다고 흔히 가정되지만, 하먼은 이 견해를 거부하면서 그 대신에 독창적이고 독특한 ‘비유물론’ 접근법을 전개한다.

전체 0

전체 487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363
[81호] 도시에서 다른 삶과 연대는 가능할까ㅣ권수빈
자율평론 | 2024.04.06 | 추천 0 | 조회 37
자율평론 2024.04.06 0 37
362
[81호] 들뢰즈라는 바다, 그리고 나름의 부표일 수 있는 『대담』ㅣ이윤하
자율평론 | 2024.04.06 | 추천 0 | 조회 32
자율평론 2024.04.06 0 32
361
[80호] 상호-비평(inter-criticism)의 수행을 따라가는 흥분의 정동ㅣ임대근
자율평론 | 2024.03.26 | 추천 0 | 조회 60
자율평론 2024.03.26 0 60
360
[80호]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국가 폭력의 관점에서』를 읽고ㅣ유건식
자율평론 | 2024.03.25 | 추천 0 | 조회 53
자율평론 2024.03.25 0 53
359
[80호] 관찰자들의 다중우주ㅣ이수영
자율평론 | 2024.03.14 | 추천 0 | 조회 123
자율평론 2024.03.14 0 123
358
[80호] 『초월과 자기-초월』을 읽고ㅣ강지하
자율평론 | 2024.03.12 | 추천 0 | 조회 93
자율평론 2024.03.12 0 93
357
[80호] 아직도 신이 필요할까?ㅣ김봉근
자율평론 | 2024.02.23 | 추천 0 | 조회 424
자율평론 2024.02.23 0 424
356
[80호] 그라디바를 통한 동아시아의 ‘여성’ 정체성 모색ㅣ백주진
자율평론 | 2024.01.28 | 추천 0 | 조회 203
자율평론 2024.01.28 0 203
355
[80호] 살아있는 체계이자 인지 과정으로서, 개별적인 인간의 자율성을 논증하는 혁명적 생물학 연구ㅣ정경직
자율평론 | 2024.01.05 | 추천 0 | 조회 681
자율평론 2024.01.05 0 681
354
[80호] 『자기생성과 인지』를 읽고ㅣ신현진
자율평론 | 2024.01.05 | 추천 0 | 조회 264
자율평론 2024.01.05 0 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