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호] 여덟 개의 격문 / 김명환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7-02 16:23
조회
315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10

여덟 개의 격문


1926년 6월 1일, 병인의용대원 김광선, 이영전, 고준택, 김석룡은 중국 상선 ‘순천호’를 타고 상해를 떠났다. 4월 25일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승하하자 국내에서는 망곡과 봉도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해 1월 노병회, 의열단, 정위단 등을 기반으로 상해에서 결성된 병인의용대는 일제의 기관 파괴, 일제의 밀정, 주구배, 주요 요인 처단 등 의열투쟁을 위한 결사였다. 2월부터 3월까지 박제건 등 일제의 밀정 5명을 처단하고 4월 8일에는 일본총영사관 건물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순종 승하 소식을 접한 병인의용대는 5월 9일 최고간부회의를 열어 국내 잠입, 일본 대관 처단, 국내 종교세력과 연결 ‘일대 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중국 상인으로 변장한 병인의용대원 4명은 황포탄 하류에서 사전 정보를 탐지한 일제 수상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권총 2정과 빵 속에 숨긴 폭탄 2개, 그리고 격문 다수가 압수되었다.

이때에 울음을 가진 자는 모두 망곡단·봉도단의 일단이 되어 전국적으로 총단결하자. 그리하여 울 때는 같이 울고 울음을 그칠 때도 같이 그치자. 고함을 부르면 같이 부르자. 싸울 때가 있으면 같이 싸우자. 사지에 임할 때는 같이 들어가자.
   우리들은 이와 같이 우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들을 모두 단결하여, 즉 울지 않으면 안 되는 전 조선민중의 단결에 의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대항하여 싸움을 시작하자.
   통곡하는 민중들이여! 일단이 되어 혁명단체 깃발 밑으로 모이자!
   금일의 통곡·복상의 충성과 의분을 돌려 우리들의 해방투쟁에 바치자!
   일본제국주의를 박멸하자!

- 불꽃사, 「복상 통곡하는 민중에게 격함」 부분

압수된 격문 「복상 통곡하는 민중에게 격함」은 2천5백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김단야가 쓴 것이다. 임시상해부 기관지 『불꽃』을 간행하던 ‘불꽃사’ 명의로,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 최창식이 운영하던 ‘3·1인쇄소’에서 제작되었다.

김단야는 격문 5천부를 경성으로 보냈다. 격문은 5월 28일 중국 안동에 도착했다. 운송을 맡은 김항준은 격문을 낡은 상자에 담아 경성으로 발송했다. 6월 3일 경성에 온 김항준은 화물인환증을 조선일보 지방부장 홍덕유에게 전달했다. 홍덕유는 조선공산당 조선일보사 야체이카(세포조직) 책임자였다. 홍덕유는 화물인환증을 고려공산청년회 권오설에게 전달했다.

조선공산당 자매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는 조선공산당 결성 다음 날인, 1925년 4월 18일 경성 훈정동 박헌영의 집에서 결성되었다. 1925년 11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박헌영이 일경에게 체포되자 중앙위원 김단야는 국외로 도피하고, 후임 책임비서는 권오설이 맡았다. 권오설이 상복을 입고 국경을 넘어 안동에서 김단야를 만난 것은 5월 1일이다.

“이번 국장은 우리에게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국장일에 격문을 뿌리며 대대적으로 봉기를 일으킵시다. 이번 일은 민족운동의 선봉이 된다고 비난이 있을지도 모르나, 원래 조선사회주의자의 대부분은 민족주의자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이 민족해방운동 투쟁에서 전위로 나서는 것은 현계단에 있어 옳은 노선입니다. 그러니 이번 국장을 강 건너 불 보듯 하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김단야는 6월 10일 거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준비금 천 엔을 건넸다. 임시상해부는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일 대중시위를 계획하고 4월 중순에 김단야를 파견했다. 김단야는 신의주와 중국 안동현을 오가며 국내 거사를 준비하던 중 순종이 승하하자 거사일을 국장일로, 대중시위를 ‘만세운동’으로 변경하였다.

5월 2일 권오설은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 ‘순종 국장일 거사’ 안건을 올렸다.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17일 경성 황금정 중식당 ‘아서원’에서 결성되었다. 그해 11월 신의주에서 일어난 폭행사건을 수사 중인 일경에게 고려공산청년회의 주요 문건들이 입수되며, 조선공산당 결성 사실이 드러났다. 지도부가 대부분 체포되거나 도피 중이었다. 당을 재건하기도 힘든 상태에서 거사는 무리였다. 거사는 당과 분리된 ‘투쟁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거행하고, 당은 ‘지원’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투쟁특별위원회는 고려공산청년회의 권오설, 이지탁, 박민영 3인으로 구성되었다. 투쟁특별위원회는 세 가지 투쟁방침을 결정했다.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를 망라하여 ‘대한독립당’을 결성할 것, 대한독립당은 우선 6월 10일을 기해 시위운동을 실행할 것, 시위운동의 방법은 장례행렬이 지나는 연도에 시위대를 분산 배치하였다가 격문을 살포하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할 것 등이었다. 투쟁특별위원회는 천도교·조선노농총동맹·인쇄직공조합·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과 연대를 이루며 만세시위를 추진해갔다.

5월 3일 권오설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이병립을 만나 국장일 만세 선창과 격문 살포를 맡겼다. 연희전문 학생 이병립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이며 조선공산당 학생야체이카에서 활동했다.

5월 10일 권오설은 인쇄직공조합 출신인 천도교청년동맹 박래원에게 자금 6백 원을 건네며 인쇄를 맡겼다. 인쇄와 함께 지방 조직 임무도 주었다. 박래원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으로 조선공산당 경성야체이카 언론기관 프랙션에서 활동했다.

박래원은 천도교의 손재기, 백명천, 양재식과 인쇄직공조합의 민창식, 이용재와 함께 격문 인쇄를 준비했다. 소형 인쇄기 2대와 종이를 구입하고, 활자를 구해왔다. 5월 15일 권오설이 쓴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 본위」, 「산업은 조선인 본위」 등 4종의 격문과 「격고문」을 받았다. 5월 17일부터 안국동 백명천의 집에서 인쇄에 들어갔다. 이웃에 위조지폐를 만든다는 소문이 돌자, 5월 27일 민창식의 집으로 옮겼다. 5월 31일 인쇄작업이 완료됐다. 격문들을 경운동 천도교당에 숨겼다.

지방은 『개벽』, 『신여성』, 『신민』 등의 잡지에 끼워 넣어 우송하고, 경성 시내에는 6월 8일 밤부터 배포할 계획이었다. 나머지는 거사 당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만세시위를 선도할 때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6월 1일까지 상해로부터 오기로 한 거사 자금이 늦어지면서,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다.

6월 5일, 일본 대판에서 만들어진 중국 위조지폐 용의자 이동규를 쫓던 일경에게, ‘대한독립당’ 명의의 「격고문」 1부가 입수되었다.

형제여! 자매여! 눈물을 그치고 절규하자! 전세계의 피압박민족과 무산자대중은 모두 함께 정의의 깃발을 들고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춰 나갈 것이며, 붕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하나인 일본지배계급도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은 지자가 아닐지라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보라! 그들 관청의 기강은 혼란에 빠져들고 있지 않은가! 그들 정당은 인간사냥의 도구로 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군비는 살아있는 인간을 어육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형제여! 자매여! 속히 전진하자! 최후까지 싸워 완전 독립을 쟁취하자!
   혁명적 민족운동자 단체 만세! 조선독립만세!

- 대한독립당, 「격고문」 부분

일경은 격고문의 출처를 추적했다. 지폐위조범 이동규는 양말제조업에 종사하는 안정식에게서 격고문을 받았다. 안정식은 천도교 도사 이상우에게서 격고문을 받았다. 이상우는 그의 아내인 ‘개벽사’ 제본부 직원 고우섭에게서 격고문을 받았다. 고우섭은 ‘개벽사’ 제본부 책임자 손재기의 아내에게서, 천도교당에 격문들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 한 고우섭이 격고문 2부를 빼냈다. 고우섭은 격고문을 남편에게 보여줬다.

6월 6일 천도교당에 숨겨져 있던 격고문 1만265부, “대한독립만세!” 등 6개 구호가 적힌 격문 2만530부,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등 11개 구호가 적힌 격문 7,973부, ‘대한학생회’ 명의로 6개 구호가 적힌 격문 4,231부, ‘대한농민의용단’ 명의로 4개 구호가 적힌 격문 7,670부 등 도합 5만669부가 압수되고, 박래원과 천도교 교주 박인호가 체포되었다. 6월 7일 권오설과 박민영이 체포되고 경성역에 도착돼 있던 상해에서 온 격문 5천부도 압수되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긴급집행위원회를 소집했다. 거사를 중단하고 몸을 숨길 것인지, 일경의 추적을 피하면서 거사를 독자적으로 추진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집행위원회는 만세시위를 강행하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기밀 유지를 위해, 만세시위와 격문 배포에 동원될 인원만 준비했지만, 이제는 시위와 배포에 쓸 물품을 준비해야 했다.

2천만 동포야!
   원수를 몰아내자!
   피의 값은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

이병립이 격문을 썼다. 김락환이 명함인쇄기 1대를, 김규봉이 종이를 구해왔다. 사직동 이석훈의 집에서 학생 5명이 격문 1만부를 인쇄했다. 태극기 2백장과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30개를 만들었다. 6월 9일, 태극기와 깃발과 격문이 각 구역 시위 책임자들에게 배부되었다.

6월 10일 오전 8시가 조금 지나 순종 국장 행렬이 수은동 단성사의 파조교에 이르렀다.
   “대한독립만세!”
   중앙고보 이선호가 뛰어나오며 외쳤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뛰어나오며 격문을 뿌렸다.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 깃발이 펄럭였다. 일경 수백 명이 학생들을 덮쳤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순식간에 짐승처럼 끌려갔다.
   “대한독립만세!”
   국장 행렬이 관수교를 건너자 연희전문 이병립이 뛰어나오며 외쳤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뛰어나오며 격문을 뿌렸다.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 깃발이 펄럭였다. 일경 수백 명이 학생들을 덮쳤다.
   “대한독립만세!”
   국장 행렬이 경성사범학교 앞에 이르자 청년학원 생도 박두종이 뛰어나오며 만세를 외쳤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뛰어나오며 격문을 뿌렸다.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 깃발이 펄럭였다. 일경 수백 명이 학생들을 덮쳤다. 시위대와 일경이 충돌하며 경성사범 담벽이 무너졌다. 호각소리 만세소리가 뒤엉켰다. 국장 행렬이 훈련원에 이르자 천세봉의 선창으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국장 행렬이 동대문에 이르자 시대일보 배달부 김락환이 만세를 외쳤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뛰어나오며 격문을 뿌렸다.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 깃발이 펄럭였다. 일경 수백 명이 학생들을 덮쳤다.
   국장 행렬이 동묘에 이르자 중앙고보 박용규가 뛰어나오며 만세를 외쳤다.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수십 명이 격문을 뿌렸다. 일경 수백 명이 학생들을 덮쳤다.

조선 민족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엄을 결단코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들이 뿌린 격문은 ‘조선민족대표 김성수 최남선 최린’ 이름으로 되어있었다. 5월 29일 중앙고보 박용규, 이동환, 중동학교 김재문, 황정환, 곽대형 등 5명이 함께 격문을 썼다. 널리 알려진 인사들의 이름을 차용했다. 황정환과 김재문이 등사판을 구해왔다. 이동환이 종이를 구해왔다. 5월 31일까지 통인동 박용규와 김재문의 하숙집에서 5천부를 인쇄했다. 6월 8일과 9일, 경성 시내 학교에 배부하고 지방 주요 학교에 발송했다. 거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앙고보에 다니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이선호가 거사 계획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거사 장소를 분담하는 것으로 연대했다.

6월 10일 만세시위를 위해 모두 여덟 개의 격문이 준비됐다. 여섯 개는 일경에게 압수되어 배포하지 못했다. ‘투쟁특별위원회’ 권오설은 1930년 4월 17일 옥사했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그의 시신은, 고문의 흔적을 은폐하기 위해, 납땜으로 봉인된 철제 관에 담겨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다. 고향 풍산에 묻혔다. 녹이 슬어 시뻘건 철제 관에서 납땜을 뜯어내고, 그의 시신을 꺼내는데 78년이 걸렸다.



* 이글은 장석흥의 『6·10만세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년), 최백순의 『조선공산당 평전』(서해문집, 2017년), 임경석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역사비평사, 2008년), 김성동의 『현대사 아리랑』(녹색평론사, 2010년), 이덕일의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사』(역사의 아침, 2013년)를 참조해서 썼다. 이 글을 쓴 김명환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사화집 『시여 무기여』에 시 「봄」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월간 『노동해방문학』 문예창작부장, 2000년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기관지 『바꿔야 산다』 편집장, 2007년 철도노조 기관지 『철도노동자』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같은 제목의 시집과 산문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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