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240p 「이야기하는 기술」의 다른 해석?

작성자
etranger
작성일
2018-12-02 11:23
조회
640
이 단편에서 벤야민은 정보와 이야기의 차이를 말합니다.

정보의 경우 그것이 새로웠던 순간이 지나면 그 가치가 사라지지만,

이야기는 내부에 자신을 그러모아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펼쳐지는 능력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로 든 게 헤로도토스 『역사』에서 언급된 이집트의 사메니투스 왕에 대한 이야기인데

사메니투스 왕은 페르시아에 패전후

딸이 하녀가 되어 물동이를 지고 우물가로 가는 모습을 봤음에도

아무런 말도 미동도 없이 눈을 땅에 고정시킨 채 서 있습니다.

주위의 모든 이집트인들이 탄식하고 절망하는데 납득이 가지 않는 풍경이죠.

왕의 침묵은 아들이 처형되기 위해 끌려가는 와중에도 계속됩니다.

그러다 다음 차례로 하인들 가운데 하나인 늙고 초췌한 남자가 행렬 속으로 끌려가자

왕은 주먹으로 머리를 치고 온갖 방식으로 깊은 슬픔을 표현합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몽테뉴는 "왕은 슬픔으로 이미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미량의 증가만 있었어도 슬픔의 댐이 무너질 판이었고"

주위의 누군가는 "이미 왕가의 운명 자체가 왕의 운명과 같았기 때문에 감정을 복돋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또 누군가는 "커다란 슬픔은 쌓였다가 긴장이 풀리는 순간 터져 나오는 법이다." 로 해석했다고 하네요.

벤야민은 이런 다양한 해석들을 두고

헤로도토스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옛 이집트에서 전해오는 이 이야기는 수천 년이 지난 뒤에도

발아력을 보존해 살아남았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벤야민 파트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신형철 씨 본인도 벤야민의 위와 같은 말을

십수 년 동안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실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언급된 이야기는 벤야민의 것과 조금 다르다고 합니다.

사메니투스 왕이 머리를 때리며 통곡한 이야기 속 노인은 사실

'시종'이 아니라 왕의 '친구'였으며,

왕 자신의 해명도 생략된 게 아니라

이미 이야기 안에 있었다고 합니다.

"제 집안의 불행은 울고불고하기에는 너무나 크옵니다. 하지만 제 친구의 고통은 울어줄 만하옵니다."(천병희 옮김, 숲, 2009,281쪽)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신형철 씨는 이렇게 글을 맺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벤야민에게 속은 것인가? 아니, 오히려 그가 소개한 해석들로 우리는 슬픔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됐다. 이런 것이 슬픔에 대한 공부다."



벤야민이 이미 이야기와 정보가 갖는 가치를 전제하고

그것에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를 끼워넣다보니

이런 생략이 발생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벤야민은 헤로도토스 이야기의 생명력을 두고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했지만,

실은 벤야민 자신 또한 의도치 않게?

사메니투스 왕의 해명과 끌려가는 노인에 대한 정보를

생략함으로써 슬픔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이야기의 발아력을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제목 그대로 「이야기하는 기술」 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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