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12/14 <베를린 연대기>_무력감

작성자
bomi
작성일
2018-12-14 19:15
조회
570
삶과예술 세미나 ∥ 2018년 12월 14일 금요일 ∥ 발제자: 손보미
텍스트: 발터 벤야민 『베를린 연대기』, 윤미애 옮김, 도서출판 길, 2010


아마도 어떤 일에서든 무력함이 무엇인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일에서 결코 장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에 수긍한다면 그러한 무력함이 처음에, 혹은 노력을 시작하기 이전이 아니라 그러한 노력의 와중에 생긴다는 점 또한 이해할 것이다. 유년시절의 끝 무렵부터 대학시절의 초기에 걸친 시기인 내 삶의 중간에 나는 베를린과 그러한 관계에 놓였던 것 같다. 도시 베를린에 대한 나의 무력감은 두 가지에 근거한다. 이 도시에서의 나의 방향감각이 아주 형편없었다는 점이 한 가지이다. ... 나의 미숙함을 인정하는 것도 오랫동안 내게는 쉽지 않았다. (자신의 미숙함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마도 두 번째 근거인것 같다.) 나의 미숙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이 세진 것은 내게 그 점을 인정하도록 억지로 시키신 어머니의 집요함 덕분이었다. (157)


어떤 일에 대한 무력감은 그 일을 시작한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이다.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하지도 않거나 노력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은 무력감도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쓰고 보면 매우 당연한 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무력감이 무능함의 동의어라고, 따라서 무력감은 애초에 그 일을 해 본 적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의 투정이라고 쉽게 착각하고 오해한다.
오랜만에 대학캠퍼스를 산책했다. 여기저기 걸려있는 커다란 현수막들이 눈에 띄었다. 동아리 홍보, 어학 학원 광고, 학생회장 선거 플래카드.... 그런데 현수막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특정 문구가 반복되고 있었다. "어차피 안 생겨요." "원래 안 생겨요." "절대 안 생겨요." ... 요즘 대학생들은 왜 연애도 못 할까? 왜 해 보지도 않고 투정만 부릴까? 문구들을 보고 순간 떠오른 의문이다. 하지만 이는 착각에서 비롯된 틀린 물음이다. 반복되고 있는 이 문구는 무력감의 표현이다. 시도하고 노력했지만 좌절한 이들의 비명이다.
벤야민은 도시 베를린에 대한 자신의 무력감 근거를 두 가지 든다. 첫째는 아주 형편없었던 방향감각이다. 두 번째는 그러한 미숙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태도였다. 벤야민은 이러한 태도의 원인이 어머니의 집요함 때문이었다고 부연한다. 자신의 미숙함을 스스로 인정하도록 강요한 어머니의 집요함이 되려 자신의 미숙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두 번째 태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어린 벤야민이 도시에서 방향을 찾는 데 미숙했듯, 젊은이는 사랑, 애인 관계에 미숙하다. 그리고 그 미숙함은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움과 함께 무력감과 좌절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자신의 미숙함을 인정하라고 그들을 집요하게 몰아붙이는 어머니는 과연 누구였을까?

벤야민은 시도하고 노력하고 좌절했다. 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과정속에서 자신의 지도를 욕망하고 그려나간다. 비명이 펄럭이는 저 대학캠퍼스 어딘가에도 자신만의 사랑의 지도를 욕망하고 또 이미 그려나가고 있는 수많은 청년들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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