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반복" 357-368 발제문.

작성자
영수
작성일
2022-07-10 11:28
조회
312
의미만 이념적인 것이 아니며, 문제들 역시 이념들 자체이다. 그러나 문제와 명제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와 간격이 있다. 하나의 명제가 특수하고, 규정된 대답을 대신하며, 명제들은 명제 각각에 영감을 주고 있는 배후의 문제 안에서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오직 이념과 문제만이 보편적이다. 문제가 해결을 통해 일반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통해 해결이 일반성을 띠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석적 요소들의 역할의 단순 경우들에서가 나아가, 그 문제의 조건들을 규정해야만 한다. 이 조건들 안에서 문제는 최대의 내포와 외연을 획득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신에게 고유한 이념적 연속성을 해결들로 전달할 수 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이념으로 기능하는 어떤 연속성을 바탕으로 불연속성을 낳는 것이다. 문제를 '망각'해 버린다면 우리는 어떤 추상적인 해결만을 목전에 둘 수 있을 뿐이다. 명제들은 문제들로부터 분리되면 특수한 명제들의 상태로 전락하고, 이 특수한 명제들은 오로지 지칭적 가치만을 가지게 된다. 의식은 문제를 질문, 의심, 추정, 가설들과 같은 중성화된 분신, 그리고 방정식, 정리, 이론들과 같은 일반적 명제들의 공허한 형식을 통해 재구성하려고 한다. 그로 인해 이중적 혼동이 시작되면, 그 혼동은 문제들을 가언적인 것에 동화시키고, 정언적인 것들/범주적인 것들에 종속시킨다. 문제나 이념은 참된 보편성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 독특성이기 때문에, 본편적인 것의 본성이 상실되면 독특한 것의 본성 역시 상실된다.
명제들과 문제들은 분리될 수 없다. 모든 종류의 사건들, 즉 “어떻게(the how)와 상황들" 속에서 명제는 자신의 의미를 발견한다.

문제는 문제가 가진 해결들의 바깥에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해결들을 통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해결들 속에서 내속하고 존속하면서 자신을 주장한다. 문제는 해결됨과 동시에 규정된다. 그러나 문제의 규정과 해결은 구별되어야 한다.

로트망.
문제들은 어떤 플라톤적인 이데아들이고 변증법적인 기초개념들 사이의 어떤 이념적 연관들이며, 이 이데아나 연관들은 “실존하는 것의 돌발 가능한 상황들"과 관련되어 있다. 나아가 문제들은 어떤 결합관계 안에서 현실화되고, 이 결합관계는 수학적, 물리학적 장에서 탐구되는 그 이해를 구성한다. 로트망은 과학이 언제나 자신을 뛰어넘는 어떤 변증법, 어떤 메타수학적이고 명제외적인 역량에 참여한다고 본다.

헤겔 변증법 비판.
문제들이 항상 변증법적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것. 변증법이 문제들이라는 형식 안에 이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망각할 때, 명제들로부터 문제들을 쫓아다니는 것에 만족할 때 자신만의 진정한 힘을 상실하고 부정적인 것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고, 필연적으로 문제제기적인 것이라는 이념적 객체성을 대신해 상반적이거나 모순적인 명제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단순한 대결 상황으로 대체하게 된다. 이러한 변질은 변증론 자체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헤겔주의에서 그 극단적 형식을 찾을 수 있다. 문제라는 것이 변증법적이고 문제들의 해결이 과학적이라면 다음을 구분해야만 한다.
초월적 심급으로서의 문제; 문제라는 내재성의 운동이 자기 자신의 조건들을 표현하고 있는 상징적 장; 문제가 구현/육화되고 상징성이 정의되는 과학적 해결가능성의 장.
문제와 문제에 상응하는 이념적 종합에 대한 일반이론만이 이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명시할 수 있을 것이다.

6절. 여덟 번째 공준 - 결과로서의 앎/앎이라는 결과
문제들과 문제들에 존재하는 상징적 특성들은 기호와 관계가 있으며, 기호들이 '문제들을 만든다.' 기호들은 상징적 장 속에서 전개되는데, 기호 안에서 감성의 사용은 이념들에 의존하며, 이 이념들은 모든 인식능력들을 주파할 뿐만 아니라 일깨운다. 역으로 이념은 인식능력들에 의존하고, 언어에 의미를 제공한다. 이념을 탐험한다는 것과 인식능력들 각각을 초월적으로 실행한다는 것은 동일한 일이다. 배움의 첫 번째 측면.

배움이 문제(이념)의 객체성과 마주하여 일어나는 주관적 활동들에 부합하는 이름이라면, 앎은 개념의 일반성을 지칭하거나 해결들의 규칙을 소유하고 있는 평온한 상태를 지칭함. 그러나 '오류들'의 횟수가 줄지만 해결할 수 있는 '앎'이나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닌 시기가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때 이념적 학습의 연속성을 바탕으로 대답들의 불연속성이 분만되는 방식, 구체적으로는 참과 거짓이 문제에 대한 이해도에 따라 분배되는 방식, 획득된 상태의 진리(궁극적 진리)가 전적으로 이해되고 규정된 문제의 한계로 어떻게 떠오르는지 엿볼 수 있다. 배운다는 것은 이념을 구성하는 보편적 관계들과 이 관계들에 상응하는 독특성들 안으로 침투하는 것이다.(수영을 배운다는 것- 우리 신체의 어떤 특이점들을 객체적인 이념의 독특한 점들과 결합하여 어떤 문제제기의 장을 형성한다는 것.) 이때 결합은 우리에게 어떤 의식의 문턱을 규정하고, 이 문턱의 수준에서 우리의 현실적 행위들은 대상의 현실적 결합관계들에 대한 지각에 맞추어 조정된다.
문제제기적 이념들 - 자연의 마지막 요소들인 동시에 미세 지각들의 대상, 의식 이하 차원의 대상들.
대상들.
그 때문에 '배움'은 무의식의 단계를 거치고,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며, 그러면서 자연과 정신 사이에 깊은 공모 관계를 수립하고 있다.

배움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배우는 자는 감성을 통해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것을 파악하는 이차적 역량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감각들의 교육")
하나의 인식능력에서 또 다른 인식능력으로 폭력이 전달되는데, 이 폭력은 각 인식능력의 완전성을 통해서 절대적 다름(the Other)을 이해하게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유는 도대체 감성상의 어떤 기호들로부터, 기억상의 어떤 보물들을 거쳐 일어나는가? 사유를 일으키는 비틀림은 어떤 이념상의 독특성들에 의해 규정되는가?”라는 물음을 가지게 된다.

인식능력의 한계들은 서로 맞물려 있고, 깨어진 형식들을 통해 이어져 있는데, 이 형식들이 차이를 담지하고 전달한다. 우리에게 배우기 위해 따라야할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개인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affect) 어떤 폭력적인 훈련, 도야, 파이데이아가 있을 뿐이다. 방법이란 인식능력들이 협력할 수 있도록 규율하는 앎의 수단에 불과하다. 방법은 공통감이 외현된 것이거나 자연적 사유가 실현된 것이며, 사유 주체가 '미리 숙고해서 내린 결정'이 있는 것처럼 선의지를 전제한다. 교양이란 비자발적 모험, 즉 어떤 감성, 기억, 그리고 어떤 사유를 “사유자들을 훈련하고, 정신을 훈육(니체)"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잔혹성들과 폭력들을 연결하는 배움의 운동이다.
우리는 앎의 경험적 조건들에 경의를 표하지만, 배움은 앎과 무지 사이의 중간 단계, 무지에서 앎에 이르는 활력에 찬 이행 정도로 여겨진다. 학습은 미로 속에서 탈출하려는 쥐의 상황과 같다면, 동굴 바깥의 철학자는 앎이라는 결과만을 취하여 초월론적 원리들을 이끌어내려고할 뿐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마저 절대지로서의 앎의 이상에 종속되어 있을 뿐이다.
플라톤은 사유의 초월론적 조건들을 앎이 아닌, 배움을 토대로 끌어내고 있다. 그 때문에 플라톤은 본유성이 아닌 상기의 형성들을 통해 그 조건들을 규정한다. 사유 안에 도입되는 경험적 시간이 아니라, 순수사유의 시간, 원리적 조건이라는 형식 속의 시간이다.
상기는 학습의 특별한 내용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대상, 기억되어야 할 것을 발견한다. 즉 상기는 문제들과 물음들 자체에서, 문제들의 해결들과 무관하게 문제들의 위급성 속에서, 이념이라는 영역 속에서 자신의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시간을 통해 사유 속으로 차이를 끌어들이고 학습을 통해 이질성을 끌어들인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차이와 이질성을 유사성과 동일성의 신화적 형식에 종속시키고, 앎 그 자체의 이미지에 종속시키기 위해 끌어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여전히 경험적인 것과 초월론적인 것 사이에 가정된 관계나 할당/분배들을 전복해야할 필연성에 부딪히게 된다.

사유란 무엇인가.

차이와 반복의 철학을 막는 장애물이 되는 8가지 공준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을수록 더 효과적으로 힘을 발휘한다. 이 공준들은 모두 함께 사유의 독단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 재현 안의 동일성과 유사성의 이미지를 통해 사유를 압살한다. 이 이미지들은 차이와 반복이라는 역량을 소외시키면서 사유하기의 의미를 왜곡한다.

사유는 사유 안에서/사유하면서 태어난다. 사유하기의 활동은 본유성 안에서 주어지지 않으며, 상기 안에서 가정되지도 않는다. 사유의 활동은 사유의 생식성 안에서 분만될 뿐이다. 이러한 사유는 이미지 없는 사유이다. 그러나 이미지 없는 사유란 어떤 사유인가? 이러한 이미지 없는 사유는 어떤 과정을 통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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