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embly Chapter 2

작성자
evadongpachloe@gmail.com
작성일
2018-07-28 15:11
조회
532
Assembly Ch.2
< 켄타우로스의 전략과 전술>
현대정치의 공간- 혁명적인 기관에서 관료제 구조, 정당에서 민간기구까지- 몇몇이 리드하고 다른이들이 그를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리더는 전략을 follower는 전술을 나누어 맡는다. 리더는 전략에 책임이 있다. 그리스 어원학에 따르면, 전략은 장군의 명령을 뜻하는데, 이런 차원에서 정치와 전쟁의 비유는 우연이 아니다. 전략가의 첫 번째 필수 조건은 전체 사회를 조망하고 넓게 보는 것이다. 언덕 꼭대기에서 리더들은 적의 장점과 단점을 분석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한다.
전략가들은 보편적 이익을 대변하는 관점을 가져야 하며, 부분이나 파벌의 이익을 제쳐 두거나 균형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전략적 리더십의 역할은 시간 감각, 신중함,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야 하고, 활동들이 계속해서 생성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리력의 배치를 포함하는 전술은 follower들의 영역으로 이 follower들은 특정 단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그들의 관심사는 단기적인 것에 한정된다. 그들의 작전은 즉각적인 시간과 공간의 상황을 알아내는 것을 요구한다. 전략적인 전망과 함께 어우러질 때 전술 작전은 장기적으로 전체적인 성과에 이바지 할 수 있다.

반인반수의 켄타우로스는 리더와 추종자를 한 몸에 구현하고 있는 상징물이다. 인간 형상의 상체는 전략적 역량의 표현인데, 지성 사회전체에 대한 지식 그리고 전체의 이익에 대한 이해, 그리고 전반적인 장기 계획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낸다. 짐승 형상의 하반신은 전술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즉시 전략을 수행할 수 있는 지식만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파편적이고 전술적인 투쟁들은 우리를 지배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격렬한 반응이거나 자유에 대한 갈구의 표현이다.


<과거 혁명들의 박물관>

현대 혁명 이론가들은 끊임없이 리더십, 전략과 전술 담론을 형성해 왔다. 그들의 결론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큰 분류로 나뉘는데, 두 가지 다 자발성과 권위사이의 변증법 담론을 취한다.
그 중 첫 번째 그룹은 두 가지 성분의 양적인 조합에 집중하였다. 자발성과 권위는 알맞게 조절되어 사람들의 역량이 대의제 구조 아래 표출되기도 하고, 억제되기도 해야 한다. 대중 투쟁과 노동자 봉기는 정치적 과정을 추동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견해를 가지고 본다면, 대중의 진의라는 것은 항상성, 지혜, 전문성, 그리고 지식이 부족한 것이다. 정치적 리더는 인민을 대표해야 하지만 동시에 인민의 뜻의 표출이 필요시에는 그 표출을 억제할 안전장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비밀주의와 공개주이의 균형이 요구된다. 켄타우로스는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인간부분은 이성과 법에 따라 기능하여 인민의 동의를 얻어내고 인민의 행위를 얻으려고 고군분투 한다. 반면에 짐승부분은 필요시 권위와 강요를 쓸수 있음을 나타낸다. 한쪽 없는 한쪽은 마키아벨 리가 주장했듯이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둘 사이의 균형이 있어야 한다. 지도자에 편중된 권위나 인민에 편중된 권력은, 즉 지나친 강압이나 지나친 동의에의 의지, 지나친 비밀주의나 공개주의는 재앙적 결과를 불러올 뿐이다. 관건은 올바른 균형인 것이다!

레온 트로츠키는 현대 정치 사상가들 중 대부분이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주장하기를 꺼린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프로레타이아는 자발적 동요 이상이 필요하다. 그들은 합당한 조직, 계획 그리고 공작을 필요로한다.”
사실상 현대 혁명 조직의 문제는 일반적인 공식으로 도출된다.
혁명=자발성+공작
트로츠키의 관점에 따르면 제일 먼저 논의해야 할 것은 그 비율이다. 그는 블랑키가 너무 많은 공작에 치중한 것과, 바쿠닌이 자발성에 지나치게 경도되었던 점을 모두 비난했다.

두 번째 그룹은 기관 문제의 현대적 해결책으로 두 가지의 시간적 순서를 강조한다. 자발성과 인민이 원하는 것이 먼저이고, 따라서 리더들에 비해 인민의 의견이 우선하고, 더 많은 권위를 가진다. 로자 룩셈부르그를 예로 들면 정치적 행위는 위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최고 기관의 결정으로부터 수행되어야 한다고 보는 “질서 정연하고 잘 훈련된 애호가들의 투쟁”을 조롱한다. 그는 지도자들이 권력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고, 인민 봉기와 노동 투쟁의 지적 자산으로부터 항상 배우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대중의 행위가 교육 효과가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을 투쟁 현장에 부른다고 보았다. 게오르크 루카치는 룩셈부르그가 “ 혁명의 중요 요소로서의 자발성”을 너무 과대평가하였다고 비난하였지만, 룩셈부르그는 대중의 정제되지 않은 행위는 권위와 변증법을 통해 적절한 시기에 표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정당이 정치적 저항 행위를 선제적으로 계획해서는 안되지만, 저항행위가 무르익으면, 정당이 그 혁명의 기간 동안 정치적 리더십을 맡고, 책임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반면에 봉기나 민란이 자발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중들의 행위는 헌법의 범위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도 하였다: 정당 지도부의 전략적 방향이 운동들을 매듭짓고, 보편적 이익을 향해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대중 행위가 먼저 일어나더라도 종국에는 지도력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의 시간적 순서도 결국 첫 번째 그룹의 자발성과 권위의 변증법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노동자들을 그 한 가운데에 놓고 시도되었던 현대 혁명 프로젝트들도 결국 같은 리더십 프레임의 문제로 귀결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로레타이아의 “기술적 구성” 이 경제적 생산의 노동력의 혁명 기관에서의 “정치적 구성”을 이끌어야 하고, 현재의 기술적 구성을 인지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생산하고 생산적인 협력을 하는지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요구한다. 바로 이 기술적 구성이 정치적 구성을 선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노동자들이 자신을 대변할 수 없다는 기존의 관념을 희석하고 있다. 노동 현장에서 협력과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그 역량이 정치적 행위에도 추분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시도들이 정상적인 감각에 의해 나타나게 되었더라도 현대 노동자 투쟁 상황에 적용되었을 때 도착적 결과를 초래하여 리더와 팔로워의 전통적 관계로 후퇴하고, 계층과 대의를 야기하게 변화할 수도 있다. 현대 노동자 저항의 오랫동안,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기둥으로 여겨져 온 도시의 백인 남성 공장 노동자를 대변하는 것이 정기적인 임금을 받는 또는 비 정기적인 임금을 받는 다양한 형태의 노동 - 즉 소작농, 페미니스트, 유색인종 원주민의 정치적 입장까지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이러한 그룹들은 배제되어 왔다. 자본주의 생산 내의 계층구조가 혁명 조직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지도부와 인민,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다양하고 현대적인 혁명, 진보의 개념들은 “민주주의 중심주의”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용어간의 긴장은 그 둘 사이의 분리와 가능한 혹은 발전적인 종합을 둘 다 나타내준다. 그람시는 이 두 가지- 구분과 종합의 관계를 동역학적으로 파악하였다. 민주주의 중심주의는 그람시에 따르면 운동 내부의 중심주의이다, 진정한 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관들의 끊임없는 적실화이고, 위로부터의 지도와 지속과 반복되는 경험의 축적으로 방향을 단단한 아래로부터의 기운을 조화롭게 가져가는 것,

a continuous insertion of the elements that bloom from the depths of the masses in the solid frame of the apparatus of direction that assures the continuity and regular accumulation of experiences



민주주의 중심주의는 반대들의 합일체이고, 변증법 과정의 결과이다. 이 두 반들은 인민 혹은 지도부의 이니셔티브인데 그것들은 정말로 반대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다른 역량인 것이다. 전술과 전략, 자발성과 정치적 계획은 그람시에게 잘 맞아 떨어지는 두 가지인 것이다.


혁명과 자유 운동에서 리더와 팔로워 특 전략과 전술 사이의 정치적인 노동의 분업은 각기 다른 요소는 다른 역할을 하는 데에 적합하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소수만이 지성, 지식 그리고 전략적 계획에 대한 비전을 가지므로, 중앙에서 의사 결정으로 하여 수직적으로 전달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우리가 만약 오늘날 전략을 펼칠 능력이 일반화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어떨까?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사회 운동이 전체 사회적 장에서 그 가능성이 발전되고 지속가능한 정치 프로젝트를 주조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는 결코 중앙 집중 방식의 의사결정 구조가 폐지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거나 순전한 수평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점으로는 현재의 조건 아래서는 수직성과 수평성, 중앙집중이나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의 역동적 구조가 아직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적 역량의 변화를 인지하는 것은 그 역동구조의 양 쪽을 전복시키고 그 전복이 탁월한 효과를 낼 수도 있게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그 동안의 역할을 바꾸어 운동이 전략을 리더십이 전술을 맡기로
근현대를 거치면서 물론 운동은 계속적으로 지도부의 역할이 거부되는 모습을 보여왔다. 1807년 이후, 프로이센 왕의 군대가 실패하고, 조직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소작농들이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싸운 것이 한 예이다. 물론 결과는 프로이센 왕조의 전 세계적인 용병을 모집하여 게릴라 군을 국가 이데올로기에 종속시켰지만 말이다. 1808년터 1813년에 일어난 스페인 인민 봉기의 경험은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우리에게 더 의미가 있는 것은 프랑스와 미국에 대항했던 베트남 인민 항거인데, 20세기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과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인민들의 항거는 반식민 투쟁의 초석인데, 하지만 그들은 결국 정당과 군 조직의 아래로 흡수되었다. 오늘날은 자발적이고 지속가능한 정치 전략을 펼칠 수 있는 운동이 가능하고 선호된다.


-Tactical leadership

사회운동과 민주적 의사 결정 구조가 장기적으로 계획되고, 반면에 리더십은 특정한 사태와 결부되어 단기적인 계획에 한정되어야 한다. 리더십은 전술적이고 따라서 특정적이고, 부분적이고, 변동적이다. 따라서 상설 조직이 필수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조직 문제 자체는 더 많은 관심을 필요로 하고, 새로운 조직의 형태가 필요한데, 그는 운동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돌아와서 전술적 리더십에 관한 개념을 더 자세하게 분석할 것이다. 지금은 범범하게 침범의 위협을 포함하는 상황에 대한 재빠른 대응 정도로 생각해 보자.
최근 상당수의 사회 운동들이 많은 부분에서 수평적 의사 결정을 실험하고 있지만, 아직은 직접적으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민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전술적인 리더십이 필요한 한 가지 위협은 그 대응물의 성격에 따라 나뉠 수 있다. 직면하고 있는 권력구조, 특히 물리력이나 폭력과 관련된 문제들은 종종 신속한 의사 결정을 요구한다. 가장 민주적인 거리 시위에서 활동가들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보안 팀을 배치하지 않고 경찰이나 폭력배들의 공격을 받을 때, 경로를 수정하는 것으로 대응하는 결정하는 전술적 의사 결정이 그 경우이다. 진보나 혁명 운동이 과두제, 암살단, 언론의 공격, 민병대, 우익 반응 등에 의해 위협에 처할 때, 같은 것이 더욱 적용될 필요가 있다. 단체들을 유지하고, 이끌어가기 위해 효과적인 정치적 조직에 리더십이 요구된다는 전통적인 관념에 직면할 때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치적인 조직과 기관이 여전히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더욱 그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양쪽 모두의 입장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한 편으로, 어떻게 다중이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조직되어 갈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기관을 유지하고 혁신할 수 있는지 볼 것이다. 예를 들어, 다중이 사회와 정치에서 혁신적 사업가적 능력을 수행하고 있는지이다. 다른 한 편으론, 리더십 구조는 조직들과 기관들 안에서 필요할 때, 그들의 기능은 전술적 판단에 한정되어야 하는데, 보편적인 전략을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적용할지, 그리고 리더십은 다중에 완전히 종속되고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위험한 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모습을 한 이들이 어떻게 말하고 당신들을 속이는지. 당신들은 그가 얼마나 정직한 리더인지와 상관없이 결코 리더들의 권력을 제한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조금 양보하는 순간 리더들은 더 많은 것을 빼앗아 갑니다. 얼마나 많은 독재 정치가들이 그들이 인민의 봉사자라고 하는 것을 들었나요? 얼마나 많은 정치 활동가 사회 운동의 권력적 자리에 가게 되면 오만하게 그 운동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았습니까? 이러한 친구들은 그들의 권력 남용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법적 규제나 공식 기구 권력 분립이 없다. 이것은 심지어 같은 편 사이에서의 종국의 힘의 관계이다. 리더십을 그저 전술적인 역할에 가두어두는 한 가지 확실한 수단은 다중이 전술적인 위치를 완벽히, 견고하게 차지하고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지켜내는 것이다. 우리는 다중의 전략적 능력을 배양시키는데 온힘을 다해야 한다, 즉 리더십을 전술에 제한하고 다중을 따라오도록 말이다.

운동과 운동이 이미 가지고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한 지식을 동일시 하는 것이 장기적인 정치적 방향성을 갖는 얼개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한 편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조직적 능력과 지식을 인식하고, 다른 한 편 전체 다중이 지속할 수 있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구성하고 이행하는 데에 활발히 참여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또한 인식해야한다. 그들은 그들의 반대 세력을 인지하는 것과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사회 운동에 이미 만연한 전략을 위한 역량은 종종 바로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역량을 발굴해 내는 데에 좋은 첫걸음은 “자발성”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아는 것이다. 사회운동이나 자발적 항거를 깎아 내리려는 누구든 신뢰하지 말자. 정치영역에서든 물질세계의 영역에서든 자발성에 대한 믿음은 대의를 무시하는 것을 기초로한다. 1960년 2월 네 명의 흑인이 백인만 출입가능한 북캐롤라이나 그린스보로의 울월스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앉아 있었는데, 나가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언론인들과 학자들은 이것을 하나의 자발적인 항의라고 서술한다. 밖에서 보았을 때 이는 분명 외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동 안을 살펴보면, 알돈 모리스가 주장했듯이, 그러한 운동이 출현하게 된 풍부한 조직적 구조가 있었다. 학생 조직, 교회, 지역 사회 단체, 그리고 NAACP(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의 조직들 그리고 미국 남부 50년대를 관통하며 sit-in 형태의 운동이 퍼져 있었다. 그린스보로 sit-in은 완전히 자발적이지 않았으나 진행되는 조직적 활동의 넓은 네트워크의 발현이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유럽 전역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는데 이를 유니온과 정당 지도자들이 그것들을 깎아 내리기 위해 “자발적”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투쟁들은 지속적이고 지치지 않는 공장 내부 외부에서의 동요의 결과였다. 자발성대한 믿음은 이상적이라고 치부되어 왔는데, 그것이 노동, 지식 그리고 항거와 봉기의 뒤를 받치는 조직 구조를 신뢰하게 되지 않거나 가려버리는 작용을 한다고 보여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발성”이 일어나는 경험과 구조를 파악하고, 사회기관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밝혀내야 한다. 전략을 위한 역량들이 산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활동가 조직이나 정치의 영역을 넘어서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것 보다 넓게 사회 구석구석에 천착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2,3part에서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경제적 협력 관계로 관심의 영역을 넓힐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만 우리는 인민의 현재적 역량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존재하는 부와 결핍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므로 무엇이 수행되어야 하는지를 계획 할 수 있다.

Toward a new problem
전략과 전술의 전도는 새로운 문제를 또 다른 문제를 몰고 왔다. 대중과 리더십, 자발성과 중앙집권,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의 적절한 관계를 구축하기보다는 현대의 혁명적이거나 진보적인 자유주의 전동의 이론에서 보여주듯이 이 전도는 근본적으로 자발성과 중앙집권이라는 두 가지 대척점의 의미를 바꾸고 전체 정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고 있다. 다중의 행위는 이제 더 이상 전술적, 근시야적이지 않고 전략적이다. 그리고 따라서 리더십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 개별 상황에 따라 무기를 쓰고 배치하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와 남부 유럽의 진보 정당들은 격렬한 사회 운동들과 함께 등장했는데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부분이 이미 우리의 전략과 전술의 역할의 전도에 대응되는 모습을 보인 것 같다. 1990년대부터 2010년까지 라틴 아메리카는 연이은 진보 정당이 사회 운동에 힘입어 권력을 잡았다. 2002년 처음으로 집권한 브라질 노동당은 군독재를 반대하고 오랫동안 유니온을 조직하면서 등장하였다. BMS는 2005년에 처음으로 집권하였는데, 앞선 몇 년의 반신자유주의와 원주민(?) 대규모 투쟁을 통한 것이었다. 특정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 다양한 한계점을 가지고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에서 당선된 진보 정당들은 사회 운동을 배경으로 한 집권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스의 급진 좌파 연합에서도 더욱 명확하게는 2014년 스페인에서 창립한 포데모스 정당은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을 따르고 있다. 포데모스는 2011년 여름 큰 도시의 많은 기지에서 15m운동을 포함하는 사회 투쟁의의 물결 속에서 탄생했는데, 긴축 정책과 사회적 불평등에 분노를 표출하였다. 건강보험, 교육 그리고 다른 분야의 예산 감축에 반대하고 모기지 때문에 퇴거 반대 운동 등이다. 또한 다양한 대도시적 그리고 풀뿌리 운동의 신호탄을 쏘았다. 이 정당들은 수평적 그리고 수직적 요소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실험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새로운 조직의 형태를 형성했는가, 정말 전략과 전술사이의 전도는 일어났는가? 우리는 아직 이런 특정한 경험들의 귀결을 평가할 입장이 아니고, 그것들 중 몇몇은 아직 열린 결말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보면, 우리는 이 실험들을 평가할 몇 가지 기준과 그들이 직면한 위험에 관한 경고를 제시할 수 있다. 이런 프로젝트들이 직면한 한 가지 위험은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로 표현될 수 있다. 포퓰리즘은 “인민”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헤게모니를 주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포퓰리즘적 정치 집단들은 그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원천이 운동 단체에 있다는 것을 인식했더라도 항상 그 원천적인 세력과 자신들을 구분하고, 자신들이 보다 넓은 보편적 이익을 대변하고, 그 세력들에게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하는 모습을 보인다. 포퓰리스트들은 국가 권력의 중요성을 과대 평가하고, 사회 운동 단체의 정치 구호들- 그들의 정당성이나 그 계획들의 효과성마저도 과소평가한다. 포퓰리즘은 따라서 역설적인 성격을 띤다. 인민에게 끊임없이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몇 몇 소수의 정치가들의 통제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좌파적 포퓰리즘과 우파적 포퓰리즘은 종종 불편하게도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먼저 국가 권력을 잡아 운동이 바로 잡힐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는 운동 출신이라고 정치인을 신뢰하지 마시라. 포퓰리즘은 이러한 프레임으로 보면 지도부 손 안에 전략을 쥐어주고, 운동을 전술적 행위에 한정시킨다.

최근 라틴아메리카와 지중해 지역에서의 일단의 정치 경험들은 리더십과 운동의 관계가 내부의 계속되는 권력 다툼이 가끔 중요한 시너지를 빚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15M 운동에 깊게 연루되었던 스페인 활동가들이 포데모스를 지지하기 하기로 한 것은
리더의 “정치적 자율성”에 관한 경향이나 리더십이 그들의 전략과 의사 결정에 자율권을 행사하는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예였다. 더 특기할 만한 것은 국가 조직과 성공적인 지역사회의 자발적 움직임의 상호작용이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에서 일어난 것이다. 확실히 결과는 세력의 관계로부터 결정된다. 각 분야의 활동가들 중 완전히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패배에 것이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 하나를 보면서 이 챕터를 마치고자 한다. 역사적 참고가 여느 때처럼 부적적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 약간의 진실을 살펴보자.
1848년의 유럽지역의 혁명기간은 사회적 공명을 일으켜 특히 지중해와 중부 유럽의2007-2008 경제위기가 촉발한 2011년 혁명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들의 결과도 비슷했다. 1848년 유럽의 민주적 봉기는 혁명적인 운동으로 정착시키지 못했다. 권리와 부의 분배를 요구하며 사회적 권력을 쟁취하기는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집권 세력에 철저히 패배당하거나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뿌리를 뽑히거나 국가나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결탁하여 근대 국민 국가를 형성하는데 일조하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봉기와 저항 운동은 비슷한 형태의 억압이나 보다 위험한 협박에 굴복한다. 몇몇 경우에 경제 개발을 앞세운 군부나 독재 정권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이들이 이제 종교적 신화, 환상주의, 종교적 맹신자 그룹과 싸우던 쪽이었다. 한 쪽과 싸우는 것이 원하든 원치 않든 다른 쪽과도 싸우게 되는 것이다. 다중을 명명백백 항거할 권리를 가지지만, 잔혹한 위험들을 항해하려고 하다보면 완전히 파괴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맑스는 프로레타리아가 처음으로 1848년 6월 조직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하고 파리 바리케이트에 나타났을 때, 그것이 순식간에 와해되었어도 그 역사적 투쟁의 중요성은 빛이 바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오늘날 싸우고 패배하더라도 지속되는 이들의 역량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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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일 토요일 5시 페데리치 번역 모임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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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치
evadongpachloe@gmail.com | 2019.11.30 | 추천 0 | 조회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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