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호] 「비극의 탄생」읽기

서평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8 21:08
조회
743
「비극의 탄생」읽기

김상범


1.

니체는 예술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들을 아폴론적인 힘과 디오니소스적인 힘으로 파악한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서로 대립되는데, 아폴론적인 것은 조형예술의 원리로서 아름다운 가상 속에서 형상을 보는 원리인 동시에 절제와 절도를 통해 개체를 광란의 바다 위에서 구원하는 ‘개별화의 원리’인 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일자와의 합일을 통해 세계의 모순과 고통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동시에 개체를 파괴하는 황홀경에 빠지는 원리이다.

이러한 아폴론적인 힘과 디오니소스적인 힘은 “자연 자체로부터, 인간 예술가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솟아”1)나온다. 따라서 인간의 주관성, 혹은 주체성에 기초한 근대적 미학을 니체는 거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니체는 서정시를 주관성의 표현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을 깨부순다. 서정시인은 근원적 일자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이 때 나타나는 형상은 객관화된 자기 자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서정시 또한 아폴론적인 힘과 디오니소스적인 힘이라는 개념들로 분석될 수 있다. 서정시인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서의 음악을 아폴론적인 형상언어로 번역하는데, 이것이 바로 서정시이다.

니체는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올림포스 신들로 상징되는 아폴론적 문화를 필요로 했던 것이 “실존의 공포와 경악”2)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즉, 거인 족이 상징하는 공포의 시대를 “올림포스의 환희의 질서”3)가 지배하는 시대로 변형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이 변형은 성공적이었고 그래서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정당화되었으며, 유일한 고통은 죽음이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들에게 가장 나쁜 것은 곧 죽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나쁜 것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이진우 옮김,「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책세상, 2012),p.43)

이것은 아름다운 ‘가상’과 ‘환영’, 즉 아폴론적인 것을 통한 고통과 공포의 망각이었고, 호메로스로 상징되는 서사문학과 그리스 조각품들이 이러한 아폴론적 문화를 대표했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예술을 가지고 “고통을 받는 재능, 고통의 지혜에 이르는 재능”4)과 싸웠던 것이다.

이렇게 아폴론적인 힘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는 오랫동안 고대세계의 많은 곳에서 행해졌던 디오니소스 축제를 통한 디오니소스적인 힘의 전파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거대한 물결에 결국 휩쓸리게 되는데, 이러한 물결이 휩쓸고 간 곳 대부분에서는 “아폴론적인 것이 지양되고 파괴”5)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물결을 버텨낸 곳에서는 아폴론적인 것이 더욱 강하고 위엄 있는 것이 되었다. 이 결과가 도리스 국가와 도리스 예술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도리스 국가와 도리스 예술을 아폴론적인 것의 진영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거인적이고 야만적인 본질에 끊임없이 저항함으로써 성벽을 둘러싸고 예술, 그토록 준엄한 교육, 그토록 잔인하고 가차 없는 국가조직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이진우 옮김,「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책세상, 2012),p.48)

이러한 대립되는 두 힘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나타난 것이 아티케 비극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그러나 아폴론적인 힘과 디오니소스적인 힘이라는 "두 적수의 화해"6)는 "둘을 갈라 놓은 심연"7)을 메우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화협정은 각 힘의 작용이 상대방을 파괴시키지 못하도록 했고, 이러한 파괴되지 않은 힘은 상대방 힘의 작용에 의해 결과적으로 더 강해졌다. 이렇게 두 힘은 결과적으로 "상호 강화시켜나가면서...그리스의 본질을 지배"8)했다. 이러한 상호 강화는 아티케 비극에서 정점에 이르는 것이다.

2.

아폴론적인 것이 조형예술의 원리인데 반해,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을 통해 대표된다. 앞서 아폴론적인 힘과 디오니소스적인 힘의 조화를 통해 아티케 비극이 탄생했다고 말했는데, 니체는 비극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서의 '음악'이었다고 말한다. 놀랍게도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본질이 '음악'으로서의 '합창'에 있지 연극이나 무대장치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이러한 '음악'속에서 합창단은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일자 속으로 들어가 자기 자신을 상실함과 동시에 자신이 '변신'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 앞에서 스스로 변신한 것처럼 생각하고, 마치 실제로 다른 사람의 몸으로, 다른 인물 속으로 들어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그러나 디오니소스 송가의 합창단은 변신한 사람들로 구성된 합창단이며, 이들에게서는 그들의 시민적 과거와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망각된다.”(「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p.72)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상태에서 합창단은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사티로스로 느끼는데, 여기에 아폴론적인 것으로서 무대와 형상 언어가 개입하여 합창단이 사티로스로서 무대 위의 환영으로서의 신을 보게 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즉, 그는 자신의 변신을 통해 자기 밖에서 새로운 환영을 자신의 현 상태의 아폴론적 완성으로서 보는 것이다. 이 새로운 환영으로 연극은 완전해진다."(「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p.73)

따라서 니체의 말대로 아티케 비극은 "아폴론적 형상의 세계 속에 스스로를 새롭게 표출시키는 디오니소스적 합창"9)인 것이다. 이렇게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맞물려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니체는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비극 무대 주인공은 유일하게 디오니소스였고, 무대 속에서 형상화된 인물들은 단지 이러한 디오니소스가 가장한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비극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아폴론적인 형상 언어로 번역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이렇게 아폴론적인 형상 언어로 번역되어야만 표현될 수 있다면, 사실 이러한 표현매체로서의 형상 언어가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닐까? 맥루언에 따르면 매체는 단순히 내용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며, 매체의 형식이 매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메시지를 규정짓는다.

실제로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이 “엄청난 양의 이미지, 개념, 윤리적 학설”10)을 통해 디오니소스적인 파괴의 과정을 보지 못하게 만들며, 이러한 형상 언어를 통해 “삶의 핵심을 사상적으로 포착”11)하도록 만듦으로써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아폴론적인 것에 봉사”12)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이것은 가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아폴론적인 것으로서의 연극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서의 음악의 본질을 모두 다 퍼낼 수 없으며, 따라서 비극은 “아폴론적 예술의 왕국에서는 울려 퍼질 수 없는 음을”13)내기 때문이다. 이로써 비극이 상연되는 도중에 아폴론적인 가상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가리는 기만임이 밝혀진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너무 강력해서 비극의 마지막에서 아폴론적인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지혜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 이로써 아폴론적인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표현매체가 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 또한 아폴론적인 것의 표현매체가 된다. 그렇지만 우위에 있는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3.

니체는 이후의 저작들에서 자신의 사상을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이라고 소개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개체가 파괴되는 황홀경을 통해 근원적인 일자와 합일함으로써 세계의 모순과 고통을 느끼게 만드는 힘이다. 그러나 ‘파괴’와 ‘고통’과 ‘모순’은 부정적인 것 아닌가? 어떻게 이것이 ‘긍정’의 원리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이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얻어지는 쾌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개체 원칙의 배후에 있는 전능한 의지, 모든 현상의 피안에서 모든 파멸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14) 을 표현한다. 이것은 “영원한 쾌락”15)을 선사하는데, 이러한 쾌락은 필연적으로 “투쟁, 고통, 현상의 파괴”를 불러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영원한 생명’의 생명력이 선사하는 쾌락을 긍정하는 것이 니체가 말하는 ‘초인’인 것이다.

따라서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은 생명의 약동과 이를 통해 얻게 되는 쾌락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철학인 것이다. 그것이 투쟁, 고통, 파괴를 부차적으로 불러올지라도 초인에게 있어 디오니소스적인 생명력의 고양과 이를 통해 얻게 되는 쾌락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니체가 아폴론적인 것을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은 ‘디오니소스적 야만인’과 아폴론적인 성향을 가진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을 구별하고 후자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각각 독립된 예술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대립 속에서 “서로 접촉하고 서로 고양시킨다”16)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이렇게 “공공연히 서로 대립한 채, ...대립의 투쟁을 자신들 안에서 지속하기 위하여 더 강력하게 재탄생할 수 있도록 상호 자극하면서 공존”17)하게 된다. 따라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괴하는 것은 그 힘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되는 두 힘의 상호 보완성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 못하게 되자 아폴론적인 것도 몰락하면서 그리스 비극이 몰락하게 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니체는 이러한 비극정신이 몰락하게 된 계기를 소크라테스와 그에게 큰 영향을 받은 에우리피데스에게서 가장 잘 표현된 반디오니소스적 경향에서 찾는다. 에우리피데스는 소크라테스가 사상에 있어서 그랬던 것처럼 전력을 다해 비극에 있어서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배제하려고 노력했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결과 아폴론적인 것마저도 변질되어버렸다.

이렇게 변질된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이성중심주의에서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이성적인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며 따라서 철학적 사상에 예술이 복종해야하는 것이다.

“여기서 철학적 사상은 예술을 감시하고 예술로 하여금 변증법의 줄기에 밀착할 것을 강요한다.”(「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p.111)

또한 소크라테스의 이성중심주의는 의식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에 기초한 것이고 본능은 이러한 의식적/논리적 인식에 대한 비판자로서 ‘주체 내부의 자연’으로 작동하게 된다. 여기서 아폴론적인 것은 ‘도식주의’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자연주의적 격정’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4.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이론적 낙천주의, 즉 논리와 이성에 의해 모든 것을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다는 낙천주의에 기반하는데, 소크라테스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학문적 인간들에 의해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낙천주의는 거부되고 있으며, 다시 ‘비극적 인식’이 고개를 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 논리가 이 한계점에서 빙빙 돌다가 결국 자신의 꼬리를 무는 것을 보고 몸서리칠 때, 인식의 새로운 형태, 비극적 인식이 터져 나온다.”(「비극의 탄생」,p.120)

또한 이러한 비극적 인식을 견뎌내기 위해 삶은 비극적 예술을 필요로 하게 된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적인 비극적 예술은 삶=생명의 절대적 긍정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식론적 낙천주의가 인식에 대한 체념과 예술에 대한 갈망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것보다 오늘날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철학이 직면한 상황을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인식론적 허무주의와 학문의 예술화. 그러나 니체는 이를 통해서 이른바 ‘학문’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니체는 학문이 소크라테스적인 것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결합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니체는 실제로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학문적’ 저서를 통해 마치 디오니소스 송가의 합창단이 그러한 것처럼 도덕 개념의 형성의 역사 속에 있는 인간의 무의식과 감성을 마치 니체 자신이 그 사람으로 변신한 것처럼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이를 자신이 창조해낸 개념과 이미지등의 형상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학문에도 디오니소스적인 경향과 아폴론적인 경향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비단 학문의 문제만이 아니다. 모든 삶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모두 필요하며, 우리는 ‘디오니소스적인 그리스인’이 되어 삶을 긍정해야 한다.

1)프리드리히 니체, 이진우 옮김,「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책세상, 2012),p.35
2)「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p.41
3)「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p.42
4)「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p.44
5)「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p.48
6)「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p.38
7) 같은 곳
8)「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p.48
9)「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p.73
10)「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p.158
11)같은 곳
12)같은 곳
13)「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p.159
14)「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p.127
15) 같은 곳
16)「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p.169
17)「비극의 탄생」,『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p.29
전체 0

전체 484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7
[48호] 「반 그리스도」읽기
자율평론 | 2018.02.28 | 추천 5 | 조회 774
자율평론 2018.02.28 5 774
6
[48호] 『도덕의 계보학』읽기
자율평론 | 2018.02.28 | 추천 2 | 조회 811
자율평론 2018.02.28 2 811
5
[48호] 「비극의 탄생」읽기
자율평론 | 2018.02.28 | 추천 2 | 조회 743
자율평론 2018.02.28 2 743
4
[48호] 「우상의 황혼」 읽기
자율평론 | 2018.02.28 | 추천 4 | 조회 737
자율평론 2018.02.28 4 737
3
[48호] 『선악을 넘어서』읽기 /김상범
자율평론 | 2018.02.28 | 추천 4 | 조회 726
자율평론 2018.02.28 4 726
2
[45호]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자율평론 | 2018.02.26 | 추천 3 | 조회 1418
자율평론 2018.02.26 3 1418
1
[45호] 질 들뢰즈,『니체와 철학』
자율평론 | 2018.02.26 | 추천 3 | 조회 1052
자율평론 2018.02.26 3 1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