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호] 고물장수, 석양에 지다ㅣ김명환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9-07-01 15:53
조회
422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14


고물장수, 석양에 지다






1939년 10월, 경성콤그룹 대구지역책 정재철이 아지트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늘을 가득 채운 커다란 태양이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정재철은 이리저리 골목을 꺾으며 미행과 잠복을 확인했다. 정재철은 경북 문경 출생으로, 보통학교를 나와 인쇄노동자가 되었다. 경성지역에서 적색노조 조직 활동 중 체포되어 징역 2년 6개월 형기를 마치고 39년 3월 출옥, 운동일선에 복귀했다.


길을 두어 번 꺾자, 뒤통수에 눈초리가 꽂힌다. 연락, 아니면 미행이다. 짐수레를 단 자전거가 정재철을 앞지른다. 자전거에 탄 사내가 살짝 얼굴을 돌리는데 두 눈이 마주쳤다. 정재철을 지나친 자전거가 아지트와는 반대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정재철은 자전거를 따라 걸었다. 곧게 이어진 길 끝 붉은 태양 바로 아래 자전거가 멈추고 사내가 털썩 주저앉는다. 짐수레에는 양은냄비와 무쇠솥, 가래와 삽 등이 실려 있다. 짐수레 철망에 ‘고물삼니다’라고 쓴 판자가 걸려 있다.


“예배당 잡지가 있는데……, 50전이오.”

고물장수가 말했다. 무심히 지나치려던 정재철이 돌아섰다.

“한번 봅시다.”

고물장수가 짐수레를 뒤적이더니, 책더미 속에서 등사판 잡지를 꺼낸다. ‘정동예배당’에서 발행한 『신약전서』다.

“30전밖에 없는데…….”

“40전!”

고물장수의 까무잡잡한 얼굴에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잔주름이 잡혔다. 정재철이 씩 웃고 주머니를 뒤졌다. 고물장수의 얼굴에 잡혔던 잔주름이 콧잔등에서부터 옹졸한 이마까지 쫙 펴진다.

“예배당은 잘 되시오?”

고물장수가 말했다.

“신도가 넷이요.”

세 개조 네 명이 학습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학습은 1대 1로 진행하는 것이 보안수칙이었다.


고물장수가 자전거를 끌며 걷는다. 정재철이 조금 뒤처져 걸으며 활동보고를 한다. 고물장수가 경성과 지역 소식을 전한다.

“언제 막걸리라도 한사발 합시다.”

자전거에 올라탄 고물장수가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정재철은 자전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걸었다. 길 끝에 걸린 붉은 태양 속으로 짐수레를 단 자전거가 사라졌다.


1939년 1월, 이관술은 수원 화홍문(수원화성 북문)에서 동생 이순금을 만나, 수려선(수원여주선) 협궤열차를 탔다. 버스와 배를 갈아탔다. 34년 1월 “조선공산당재건 경성트로이카 사건”(“이재유그룹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김삼룡이 병보석으로 출옥, 충주군 엄정면 미내리에 귀향해 있었다. 이순금은 같은 사건으로 구속, 집행유예로 출옥했다. 33년 1월 “반제동맹 사건”으로 검거된 이관술은, 34년 3월 말 예심이 종결되면서 보석으로 출감했다. 34년 10월 운동일선에 복귀, 이재유그룹 활동 관련 도피 중이었다. 김삼룡과 이관술과 이순금은 당재건운동을 결의했다. 이들은 운동을 청산하지 않은 비타협적 활동가들을 결집해가기 시작했다.


1939년 4월, 이관술과 김삼룡을 지도자로 하는 일군의 활동가들이 “무명의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39년 9월, 기관지 『공산주의자』를 창간했다. 기관지는 “조직의 존재를 알려 더 많은 운동가를 조직하고, 사상과 이론을 통일하고, 정세와 투쟁방침과 임무를 공유”하게 하는 선전·선동가이자 조직가였다. 기관지 발행처를 ‘경성공산주의자그룹’(“경성콤그룹”)이라고 붙였다. 이관술이 편집과 출판을 맡았다. 순한글 월간지였다. 표지 제호는 『신약전서』, 발행처는 ‘정동예배당’이었다. 일제의 검문검색을 피하기 위한 위장이었다. 지역 배포를 맡은 이관술은 고물장수로 변장,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누볐다.

1939년 12월, 경성콤그룹은 박헌영을 지도자로 영입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국제선”) 전권 파견원으로 활동하던 박헌영은 1933년 7월 5일 상해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조선으로 압송되어 징역 6년 형기를 마치고 1939년 9월 출옥했다.


경성콤그룹 지도자 박헌영은 기관지부를 맡았다. 조직부 김삼룡 장규경, 출판부 이관술 김순룡, 인민전선부 김태준 정태식 이현상, 노동부 김삼룡, 가두부 이남래 김한성 이종갑, 학생부 조재옥 김순원 김영로, 일본유학생부 김덕연 고우도, 금속노조책 김재병 홍인의, 섬유노조책 김응빈 이위상, 전기노조책 조중심, 출판노조책 이복기 이인동, 함남도책 김진, 함북도책 장순명, 마산책 권우성, 대구책 정재철, 부산책 이기호 등이 활동했다.


경성콤그룹은 이관술 김삼룡 이순금 이현상 정태식 박진홍 등 이재유그룹 출신, 이인동 서중석 이복기 등 상해파 출신, 박헌영 권오직 장순명 등 화요파 출신들이 계파를 초월해 집결한 결사체였다. “운동을 청산하지 않은 사람들을 운동선상에 총궐기시킨” 조직이었다.


경성콤그룹 기관지 『공산주의자』는 1940년 4월호까지 월간으로 20부씩 발행되었다. ‘경성형무소 반항 사건을 보라’, ‘남해제사의 동요 사건’, ‘염전인부 40명의 단결’, ‘조선제강 양성직공의 단결’, ‘예방구금령에 대하여’ 등 일반 신문에 보도되지 않는 투쟁소식들과 투쟁방침을 전달하고 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다. 4월호부터 박헌영이 편집을 맡았다. 5월호부터 제호를 『콤무니스트』, 발행처를 ‘경성콤무니스트그룹’(“경성콤그룹”)으로 바꿨다. 1940년 11월 ‘러시아혁명 기념호’까지 매월 거르지 않고 20~30부씩 발행했다.


『콤무니스트』에는 조선혁명의 이론과 전술, 조직문제에 관한 경성콤그룹의 견해가 표명되었다. 기관지의 지면 가운데 가장 자주 제기된 문제는 무장봉기의 이론과 전술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반전투쟁의 필요성과 통일전술에 대한 글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추이와 전망을 분석한 논설이 게재되었으며, 노동대중 속에서의 활동방식에 대한 글과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강령, 슬로건 등이 비중 있게 실렸다.


경성콤그룹은 조직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수사망에 걸렸다. 40년 10월 이현상, 12월 김삼룡 정재철, 41년 1월 이관술과 김태준이 체포됐다. 6월까지 박진홍 김재선 여권현 이병희 이현우 이장남 등이 검거되었다. 9월에 이주상 여운철 김재범 조희영 김재병 등이 체포되었다. 12월에 이종갑 홍인의 등이 체포되었다.


『콤무니스트』는 1940년 12월 “서대문사건”(경성콤그룹 제1차 검거사건)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1941년 8월 『선전』이라는 제호로 복간호를 냈다. 주의나 주장을 알리는 ‘宣傳’이 아니라 전쟁을 선포하는 ‘宣戰’이었다. 김재병과 홍인의가 만들었다. 1941년 9월 “종로사건”(경성콤그룹 제2차 검거사건)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김재병은 ‘적색노동조합 원산좌익위원회’ 선전담당 김재갑의 동생이다. 1941년 9월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1942년 6월 13일 옥사했다.



* 이글은 최규진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년), 변은진의 「1930년대 경성지역 혁명적 노동조합연구」(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30년대 연구반, 『일제말 조선사회와 민족해방운동』, 일송정, 1991년), 임경석의 「국내 공산주의운동의 전개과정과 그 전술(1937년~45년)」(한국역사연구회 1930년대 연구반,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한길사, 1991년)과 「국제선 공산주의그룹과 박헌영」(『진보평론』 제24호, 2005년)과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사, 2004년), 안재성의 『이관술 1902-1950』(사회평론, 2006년), 이애숙의 「일제 말기 반파시즘 인민전선론」(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 126호, 2004년), 강만길·성대경의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 비평사, 1996년)을 참조해서 썼다.

** 김명환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사화집 『시여 무기여』에 시 「봄」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월간 『노동해방문학』 문예창작부장, 2000년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기관지 『바꿔야 산다』 편집장, 2007년 철도노조 기관지 『철도노동자』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같은 제목의 시집과 산문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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