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호] 성범죄의 ‘증언’은 왜 진실을 의심받는가?ㅣ이수영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0-04-07 14:51
조회
535
 
 

성범죄의 ‘증언’은 왜 진실을 의심받는가?


이수영 (미술작가)


 

 

파국의 자리에서 새롭게 솟아나는 것이 있다. 이 새로운 힘을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라 불렀고, 사회학자 김홍중은 ‘사회학적 파상력’이라 이름 붙였다. 성범죄의 증언자 윤지오가 마녀사냥으로 무너졌을 때, 저자는 그 무너짐의 힘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언어를 갖지 못하고 쓰러져간 소리들에 미지의 몸을 부여하는 미학적 수행을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 책은 증언문학이다. 이때 미지의 몸은 주어진 진실에 복종하여 배제당하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진실을 구성해 내는 윤리적 주체이다.


철학자인 조정환은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신문, 진술조서 등 모든 현장 언어들을 데이터화하고 분석하고 논박하며, 증언자 윤지오의 증언을 거짓으로 만드는 ‘증언혐오’의 메커니즘을 성찰한다. 500쪽에 달하는 책 두 권(『증언혐오』와 『까판의 문법』) 합이 1000쪽인 이 증언 대서사시는 작가가 직접 까판의 전장에서 까댓글의 포탄을 뒤집어쓰며 쓴 현장문학이다.


윤지오의 증언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논박하는 데 그가 사용한 무기는 이성과 논리인 듯 보이지만, 그 모두를 가동시킨 화력은 당파성과 정동(affects)이다. 케케묵은 386 용어 ‘당파성’이 아니라, 어떤 특정 시점에 서야만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마녀사냥의 서사가 보인다는 의미에서다.


그 특정 시점은 언어를 갖지 못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 조르조 아감벤이 설명한 ‘벌거벗은 생명’, 어떠한 시민적 권리도 없어서 희생시켜도 죄가 안 되는, 신성하면서도 동시에 저주받은 존재)의 시점이다. 교육받은-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시민의 말과 무직자-지적장애-성소수자-여성-난민의 소리 중 이 사회는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하는가. ‘진정성’이라는 말은 이미 당파적이다.


우리가 객관적이어서 누구에게나 공평할 것이라 믿었던 그 진실은 이미 임자가 따로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 더러운 년이라고 손가락질당할까 봐 가족과 이웃에게 자신들이 당한 폭력을 증언할 수 없었다. 한국 대 일본이라는 국가의 언어, 역사의 언어로 번역되고 나서야, 이미 2차 피해의 60년을 보내고 나서야, 자신들이 당한 폭력을 증언할 수 있었다. ‘양공주’라 불리며 멸시받던 여성들은 미군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갑자기 겨레의 누이가 된다. 민족, 국가라는 말은 이미 당파적이다.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피해자들에게 ‘너의 가족, 친구, 학교에 알리겠다’는 말이 어떻게 협박이 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을 어떻게 가로막는지를 생각해 보자. 가족의 신성함과 피해자다움이라는 순수주의는 이미 당파적이다. 젠더는 이미 당파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성폭력은 권력형 성폭력이다.


계약직 연예 노동자로서 자신이 당한 성착취를 고발하고자 한 故 장자연의 증언(장자연 문건)은 나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사법의 언어로 번역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증언자 윤지오는 오히려 사법적 언어(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후원금 사기 등)로 고소당하고, 국가의 언어로 국경을 넘는 적색수배까지 당했다. (윤지오는 “이 정도 수사 의지였다면 장자연 사건은 10년 전에 해결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기자, 작가, 변호사, 교수, 신문, 방송, 경찰, 검찰, 법원 등 진실체계의 독점자들이 총 출동되어 증언자 한 명을 몰락시킨다.


윤지오의 음란, 허언, 사기에 대한 풍문으로 시작된 ‘까판의 문법’이 결국 어디에 복무하게 되는지는 자명하다. 저자는 ‘까판의 문법’이 비단 하위담론 영역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주류 담론으로 지배적 논리로 작동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진실 담론을 독점하고 있는 가부장적 가족-국가 질서는 누군가를 배제하는 원리로 작동되며 본질적으로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때문에 고통을 증언하는 진정성에 이미 켜켜이 엉켜있는 이 모든 당파성 투쟁은 청군과 백군처럼 같은 운동장에서 등질적인 힘으로 벌일 수 있는 투쟁이 아니다. 작가는 가해의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은폐하려는 자 사이의 투쟁은 ‘그 관계 자체의 해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비(非)조정적 관계’라고 말한다.


따라서 고 장자연의 증언과 윤지오의 증언이 사법적 언어를 획득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언어를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인을 단순히 성착취 피해자로 보지 않고, 자신이 당한 폭력을 증언하여 폭력체계를 고발하고 자신의 고통을 종식시키고자 노력한 적극적 증언자로 시점을 전환하려는 저자의 노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고인의 증언과 윤지오의 증언이 연대하고 있으며, 이 연대 공통장에 저자 역시 연대하고자 노력한 것이 이 책이다.


고 장자연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 부르는 것은 누구의 시점에 서서 이 목숨 건 증언을 바라볼 것인가라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독점된 진실체계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진실 주체로 세우려는 다중의 이런 노력에 ‘공통진실’이라는 신생의 이름을 저자는 만들어 낸다. 그것은 가부장 권력의 진실 독점에 맞선 진실 공통체이다.


그러니 우리는 ‘n번방’ 피해자들을 이 신생의 윤리에 초대해야 한다. 당신들 잘못이 아니다. 가족의 신성함, 우정의 순수성, 순결한 여성이라는 파시즘 안에서 두려워하지 말기를. ‘너의 가족, 친구, 학교에 알리겠다’라는 협박 얼마든지 해봐라. 가족도 우정도 여성도 그 이름들을 우리는 다시 새로 만들 것이다.


[필자 소개] 이수영 미술작가. 탈진실 시대의 진실연대자, 복면증언자이다.
“복면증언” 캠페인 인스타그램 https://bit.ly/39NmHzy
“복면증언” 캠페인 유튜브 https://bit.ly/2x0Vg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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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0년 4월 5일 <일다>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s://bit.ly/39LvK3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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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권명아 지음, 갈무리, 2019)

정동과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젠더 정치의 정동 효과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이자, 온 힘을 다해 무언가 '다른 삶'을 만들어보기 위해 부대낀 날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페미니즘과 젠더 어펙트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실천적 개입은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부대껴 만들어내는 힘.마찰.갈등에서부터, 개별 존재의 몸과 사회, 정치의 몸들이 만나 부대끼는 여러 지점들까지, 그리고 이런 현존하는 갈등 너머를 지향하는 '대안 공동체'에서도 발생하는 '꼬뮌의 질병'을 관통하면서 진행된다.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 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서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산파 여성들·점쟁이 여성들·식민지의 원주민 여성 노예들·여성 마술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마리아 미즈 지음, 갈무리, 2014)

『에코페미니즘』,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의 저자로 알려진 에코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의 고전적 저작. 가사노동, 비공식 영역의 노동, 식민지에서의 노동과 자연이 만들어 내는 생산(물)이 경제의 수면 아래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4, 5백년 동안 여성, 자연, 식민지는 문명사회 외부로 축출되고, 가려져 왔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이 ‘빙산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 왜 가려졌는지, 이 부분의 가치와 비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정동 이론』(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J. 시그워스 엮음,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아프꼼 총서 2권. 정동 연구라는 이제 막 발아하는 분야를 정의하는 시도이자, 이 분야를 집대성하고 그 힘을 다지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정동 이론의 주요 이론가들을 망라하고 있다. 정동이란 의식적인 앎의 아래와 곁에 있거나 그것과는 전반적으로 다른 내장[몸]의 힘으로서, 우리를 운동과 사유, 그리고 언제나 변하는 관계의 형태들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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