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8/24 자크라캉 <세미나11> 9장

작성자
rara
작성일
2018-08-24 10:32
조회
877
삶과 예술 세미나: 2018년 8월 24일 / 발제자: 김선미
자크라캉, 『세미나11』, 맹정현 이수련 옮김, 새물결, 9장 163~184쪽

9. 그림이란 무엇인가?

존재와 존재의 허울
사물의 균형은 표면과 그 너머의 것 사이의 변증법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출발점은 자연 상태에서부터 존재의 균열, 이분화, 분열을 초래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존재는 그러한 분열에 적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의태라는 큰 제목아래 다양하게 변주되는 일련을 현상들을 통해 관찰된다.
이때 존재는 존재와 허울로, 다시 말해 존재 자체와 그것이 내민 종이호랑이(가면)로 확연히 분해된다. 존재는 구애행위(과시)나 싸움놀이를 할 때 가면, 분신, 껍데기, 등딱지처럼 몸뚱이를 감싸기 위해 떨어져 나온 피부 등을 스스로 만들어 내거나 상대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존재가 삶과 죽음의 효과 속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형태들을 통해서이다.

스크린의 미혹
미혹은 여기서 어떤 본질적 기능을 수행한다.
수컷과 암컷의 가장 강렬하고 격렬한 만남은 의심의 여지없이 가면을 매개로 이뤄진다.
그러나 인간 주체는 동물과 달리 상상적 포획에 완전히 사로잡히지는 않는다. 주체는 거기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낸다. 실제로 인간은 그 너머에 응시가 존재한다는 듯이 가면 놀이를 할 줄 안다. 여기서 스크린은 매개의 장소이다.

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참조했던 사례들은 사물을 그것의 실재적인 모습으로 복원시켜주는 스크린의 기능이 이미 단순한 지각 수준에서부터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좀 더 근본적인 기능이란 욕망과의 관련 속에서는 현실이 가장자리에 있는 것으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회화 창작에서 지금까지 거의 지적된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는 특징 중 하나이다.
시각에서 눈의 식별 능력이 최대로 발휘되는 곳은 바로 중앙 부분이다. 반면 어떠한 그림에서도 중앙은 부재할 뿐이고 구멍으로-요컨대 뒤에 응시를 감추고 있는 눈동자의 반영으로-대체되어있다. 그 결과 욕망과 관계를 맺게 되는 한 항상 중앙에는 스크린의 자리가 각인되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그림 앞에서 기하광학적 차원의 주체로서 삭제되어 버린다.

응시 길들이기와 눈속임
시관적장에서는 모든 것이 이율배반적으로 작용하는 두 개의 항 사이에서 분절된다. 사물이 나를 응시하고 반면에 나는 사물을 본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니’ 라는 말씀은 바로 사물들이 우리를 응시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작품은 흔히들 말하듯이 사람들의 영혼을 고양시킨다(프로이트가 말한 승화). 다시 말해 포기를 부추긴다는 거다. 이것이 바로 응시-길들이기라 부른 기능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는 응시-길들이기가 또한 눈속임이라는 측면으로 나타난다고 언급한바 있다.
플라톤이 왜 회화의 환영에 반박했는지의 핵심은 바로 회화의 눈속임은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이 다른 어떤 것이 바로 대상 a이며 이 대상 a를 중심으로 눈속임을 제 영혼으로 하는 어떤 전투가 펼쳐지는 것이다.
화가에게는 항상 소작농 협회(후원자 등)가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대상 a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대상을 창조자로서 화가가 대화를 나누는 상대인 하나의 a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성화상의 가치는 그것이 표상하고 있는 신 또한 그것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성화상은 신을 기쁘게 한다고 여겨진다. 신은 창조자, 더구나 몇 가지 이미지들을 창조한 창조자다.
그러나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신이 단 한분 있다. 이 문제는 아버지의 이름들의 원천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 중 하나로 이어진다. 이는 어떤 류의 협약은 모든 이미지를 뛰어넘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배후의 응시
코뮌 단계라 부를 다음 단계
팔라초 두칼레 중앙 홀에는 종교족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 기능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장소에 오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레츠’가 ‘시민’이라 불렀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보는 것은 자신이 없을 때 그 홀에서 토의하던 사람들의 응시이다. 그림 뒤에는 바로 그들의 응시가 존재한다. 그림 뒤에는 항상 응시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응시는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제스처와 붓터치
퐁티는 제스처의 역설을 강조하는데 붓터치 하나하나가 극히 완벽한 심사숙고의 결과라고 상상하게 만든다는데 그것은 단지 환영일 뿐이라고 말한다.
회화의 경우 쌓이는 것은 응시를 내려놓는 제1의 행위이다.(새의 깃털, 뱀의 허무, 나무의 송충이나 이파리들-응시)
화가의 붓터치는 하나의 동작이 끝을 맺는 곳이라는 사실을 유념하기 바란다.
이 최종적인 순간 덕분에 우리는 행위로부터 제스처를 구별해낼 수 있다. 붓터치가 가해지는 것은 제스처를 통해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응시가 어떤 하강, 아마도 욕망의 하강 속에서 작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욕망에 부여했던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공식을 변형시켜 말하자면,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타자 쪽의 욕망이며 그러한 욕망의 끝에는 볼거리를-주기 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질의문-볼거리로 주어진 동작으로서의 제스처)

볼거리를-주기와 invidia(질시)
어떻게 해서 이 볼거리를-주기가 무엇인가를 달랠 수 있는 것일까? 응시하는 자가 눈의 욕심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닐까?
눈의 욕심이 바로 회화의 매혹적 가치를 만든다. 사악한 눈의 기능이 보편적인 반면 선한 눈에 대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이는 결국 눈은 분리 능력을 타고나며 이 분리 능력은 시각적인 식별 기능을 훨씬 넘어선다.
가령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동물의 젖을 고갈시키거나 질병이나 재앙을 야기하는 힘을 질시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질시는 통상 질시하는 자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으며 그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이가 소유하고 있을 때 부추겨지는 감정이다.
주체가 질시로 하얗게 질리게 된다는 것은 그 바로 앞에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는 충만함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매달려 있는 분리된 소문자 a가 어떤 타자에게는 그 타자를 만족시키는 소유물, 만족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림 기능의 원천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이렇듯 응시에 의해 절망에 빠진 눈이라는 영역이다. a와 욕망의 근본적 관계는 전이와 관련해 이제부터 도입하려는 본보기로 사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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