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상태 5장 발제문

작성자
heron
작성일
2020-05-12 00:10
조회
815
5
축제, 추도, 아노미

5.1
아감벤은 로마법에서 유스티티움이라는 용어를 예외상태의 원형적 개념(동란에 대처하기 위한 법의 효력 정지)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아감벤이 이 책을 썼을 때까지 유스티티움이란 연구자들의 저서(4세기 말 문법학자 카리시우스 등) 속에서 주권자와 측근들의 죽음에 대한 공적추도의 의미로 주로 쓰이고 있었다. 아감벤은 이를 비판적으로 보며 니센과 미델의 저서로 인한 논쟁, 1980년 버스넬의 추도와 아노미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 등 의미적 진화(라기보다는 사실상 축소)가 일반화되게 된 학문적 계기들을 짚어본다. 그에 따르면 추도와 일시적인 아노미 및 감정들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표출은 분명 유사성이 있으나 심리학적 환원에 불과하며 증명되어야 할 것을 증명을 위한 전제로 쓰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아감벤은 아노미의 일종인 예외상태가 법적 개념 안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두고 논증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썼으므로, 아노미가 법이나 사회 질서와 긴밀하고 복잡한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흥미로운 주제라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뒤르켐의 <자살론>(1897)과 같이 아노미를 사회 전반적인 ‘심리적’ 불안으로 등치하는 관점은 아감벤의 입장에서 불만족스러운 것이 된다.

5.2
몇 년 뒤의 세스턴 역시 주권자의 장례식을 예외상태로서 드라마틱하게 그려내며 유스티티움을 공적 추도로 취급한다.
“황제들의 장례식에서는 동원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유스티티움의 선포는 장례 의식을 일종의 총동원으로 형식화하고 도시 전체의 모든 공적인 사안과 정상적인 정치적 삶을 효력 정지시킴으로써 한 인간의 죽음을 국가적 파국으로, 싫든 좋든 누구나 말려들어가게끔 되어 있는 드라마로 변형시켰다.”(Seston 1962, 171~172)
프라스케티는 여기서 유스티티움의 두 측면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주권자의 장례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동란의 가능성 때문이라고 지적함으로써 아감벤의 합의점을 이끌어낸다. (이제까지 언급한 연구들이 극한 상황이나 아노미 속에 이미 추도의 특징이 내재한다고 전제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비판이었다.) 프라스케티가 찾아낸 역사적 기원은 카이사르의 장례식과 함께 무질서한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한편 아감벤은 유스티티움을 공적 추도로 만들어온 것이 주권자가 예외상태를 일가의 일로 변형시킴으로써 예외상태를 전유하려고 한 시도일지도 모른다며 역사적 관점에서 다른 각도의 비판 역시 시도하고 있다. 원수정체라는 체제는 주권자의 인격 속에서 예외상태와 아노미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새로우며, 이미 상례가 되었기 때문에 사라져버린 예외상태이다. 왕은 법률에 묶여있지 않고 성문법은 아니지만 그 자신이 법을 행사하는 주체이기 때문인데, 아우구스투스의 죽음에 대한 수에토니우스의 기술은 죽음이 먼 것처럼 볼에 화장을 하는 늙은 원수가 얼마나 동란을 염려하는지에 대한 일화를 통해 아감벤의 관점을 예시하고 있다.

5.3
최고 권력의 새로운 형상인 원수정체는 가장 깊은 곳에서 이미 아노미적 본성을 내장하고 있다. 주권자를 살아있는 법률로 보는 이론은 원수정체가 들어선 해에 신피타고라스 학파가 고안했다. 디오토게네스의 주권론에 등장하며 스토바에우스가 이를 부분적으로 계승했다. 디오토게네스의 논저에서 주권자를 살아있는 법률로 보는 것이 곧 주권자에게 아노미적 성격이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짚어내지 못한 것은 현대판 편집자들의 잘못이라는 것이 아감벤의 생각이다.
1)왕은 가장 정의로우며, 가장 정의로운 것이 가장 합법적이다.
2)정의롭지 않은 자는 누구도 왕이 될 수 엇다. 그러나 정의로운 것은 법률 없이도 가능하다.
3)정의로운 자는 정당하다. 그리고 주권자는 정의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법률이다.
이 문제의 문장은 완벽히 일관된 논리구조를 갖고 있는데, 아감벤에 따르면 이는 오직 주권자가 법률의 구속을 전혀 받지 않으며, 주권자 안에서 법률의 생명이 전면적인 아노미와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하지만 왕은 법률과 동일시되는 한 법률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으며(비록 그가 디오토게네스의 말과 같이 인간들 사이에서 신과 같은 존재일지라도) 나아가 자신을 법질서의 아노미적 토대로 제시한다. 즉 주권자와 법률의 동일시는 주권자의 아노미적 성격을 주장하면서 법질서와 주권자의 연관성을 주장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게 아감벤의 생각이다. 주권자는 살아있는 노모스이므로 아노미와 노모스는 주권자의 인격 안에서 일치하며, 무정부 상태는 예외상태를 공적 추도로, 또 이 추도를 유스티티움으로 전환하는 것을 통해 반드시 의례화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주권자의 살아있는 신체 안에서 노모스와 아노미가 구분될 수 없는 것은 도시 안에서 예외상태와 공적 추도가 구분될 수 없는 것과 상응한다.

-주권자는 살아있는 법률이라는 명제를 최초로 정식화한 것은 위 아르키타스의 <법과 정의에 관해>이다. 위 아르키타스는 스스로가 법률인 주권자와 스스로를 법률을 준수하는 사람으로 한정하는 정무관을 구분함으로써 주권 개념의 토대를 찾고 있다. 아노미적 요소는 겉으로 노모스의 우선성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지만 주권자의 인격을 통해 폴리스에 도입된다.

5.4
아노미와 법 사이의 은밀한 제휴 관계는 로마 제정기의 유스티티움과 대칭적이면서 어떤 의미에서 전도되기도 한 형상을 한 다른 현상 속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민속학과 인류학에서 익숙한 주제인 정상적 법질서와 사회적 위계의 효력 정지 및 전복을 특징으로 한 주기적 축제이다. (안테스테리아 축제와 사투르누스 축제, 중세와 근대의 샤리바리와 카니발 같은) 연구자들은 질서정연한 사회 내부에서 아노미적 폭발을 종교적, 세속적 권위가 허용한 까닭을 설명하는 데 오랫동안 어려움을 느껴왔다. 아노미적 축제를 태양력과 결합된 농경적 순환으로 보는 해석(만하트와 프레이저), 주기적인 정화기능으로 보는 해석(베스테르마르크)과 달리 고대의 법제도를 특징짓는 법률의 효력 정지 상태(고대 게르만법에서 규정한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나 고대 영국법의 방랑자)와 연관시킨 칼 모일리는 아감벤의 찬사를 받고 있다. 14세기 초엽 작자 미상의 프랑스 가곡에서 나오는 샤리바리의 광대 짓은 <바이에른 부족 법전>과 중세 도시의 형법전에서 그에 상응하는 고유한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가면 축제 기간의 치근덕거림이나 오늘날 할로윈으로 계승된 아이들의 구걸 의식에 대해서도 나올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한다.
“주의 깊게 분석해보면 얼핏 단순히 거칠고 야만스러운 만행으로만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는 전통적 관습과 법률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이런 형식에 힘입어 태고적부터 추방과 재산 몰수가 실행되었던 것이다.”(Meuli 1975, 473)
아감벤에 따르면 이 아노미적 축제는 법률 속의 아노미, 노모스 자체의 한가운데에 자리하는 아노미적 충동으로서의 비상 상태를 패러디 형식으로 드러내준다.

아감벤은 법의 장을 규범에서 아노미로 가는 힘과 아노미에서 법률과 상례로 가는 힘이 길항하는 본질적인 양의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 아노미적 축제는 법질서에 내재하는 환원 불가능한 양의성을 위한 무대를 마련해주며, 두 힘 사이의 변증법에서 결정적인 것이 법과 생명 사이의 관계자체임을 보여준다. 자신을 엄격한 규범적 체계로 순화하려는 경향이 있을 때 그것이 삶과 맺은 연관성은 문제적인 것으로 남게 된다. 한편 예외상태 혹은 살아있는 법률로서의 주권자라는 생각으로 이끄는 아노미적 경향은 어떤 규범도 갖지 않는, 법률 없는 법률의 힘으로서 생명을 남김없이 포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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