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상태 4장 요약발제문

작성자
Jeon solbee
작성일
2020-05-12 14:48
조회
843
4. 공백을 둘러싼 거인족의 싸움

예외상태를 둘러싸고 발터 벤야민과 칼 슈미트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다시 주목하며, 아감벤은 슈미트의 주권론이 벤야민의 폭력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완전히 법의 ‘바깥', ‘저편'에 자리하면서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의 변증법을 끊어낼 수 있는 ‘폭력’의 가능성을 확증하고자 하면서, 벤야민은 이러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순수한’ 폭력, ‘신적' 폭력이자 인간의 영역에서는 ‘혁명적’ 폭력이라고 불렀다. (법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데 그중 법 정립적 폭력은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법 보존적 폭력은 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법은 ‘법 바깥에 폭력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 를 용납하지 않는다. 벤야민은 그러한 폭력의 존립을 증명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105) 이러한 ‘순수하고', ‘신적'이며 ‘혁명적인' 폭력의 본질적 특징은 법을 만들어내지고 보존하지도 않으며 그저 법을 탈정립시켜 새로운 역사 시대를 연다는 것이다.
벤야민이 순수하고 아노미적인 폭력의 존재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슈미트는 반대로 그런 폭력을 법적 맥락으로 되돌려놓으려 한다. 슈미트에게 예외상태란 아노미를 노모스의 총체 속에 기입하려 할 때 설정하는 공간이다.(106) 예외상태 속에서 순수한 폭력(법 바깥의 폭력)은 바로 배제를 통해 법 안에 포섭된다고 슈미트는 말한다. (법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데 그중 법 정립적 폭력은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법 보존적 폭력은 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 <정치 신학>에서 슈미트는 제헌 권력과 헌법 권력 사이의 구분을 폐기하고 결정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는데, 이것은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에 대한 벤야민의 구분과 대응된다는 점에서 연관된다. 슈미트가 주권론을 발전시킨 것은 제헌 권력과 헌법 권력 사이의 변증법을 벗어나 있는 순수한 폭력이라는 새로운 형상을 무효화하기 위함이었다. 주권 권력은 법을 효력 정지시키는 벤야민의 순수한 폭력에 대응한다. 또한 모든 법적 문제의 궁극적 결정 불가능성이라는 벤야민의 사유에 응답하면서 슈미트는 주권을 극한적 결정의 장소로 파악한다. 이 장소는 법의 외부도, 내부도 아니며 이런 의미에서 주권은 ‘한계 개념'이다. (107) 또 벤야민이 결정을 통해서는 절대로 순수한 폭력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슈미트는 그러한 불가능성이야말로 거꾸로 주권적 결정이 절실하게 필요한 근거라고 주장한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벤야민의 바로크적 주권은 슈미트의 주권론에 대한 응답이다. 벤야민은 바로크적 주권은 “예외상태를 둘러싼 논의로부터 발전한 것이며, 예외상태를 ‘배제하는 것'을 군주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108) ‘결정하다'를 ‘배제하다'로 뒤바꿈으로써 벤야민은 슈미트의 주장에 결정적인 수정을 가한다.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하는' 주권자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것을 법질서 안에 포섭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그는 예외상태를 배제해야 하며, 법질서 바깥에 남겨두어야 한다. 슈미트에게 결정이 주권과 예외상태를 결합하는 연결점이라면 벤야민은 역설적이게도 주권자의 권력을 그것의 집행에서 분리시키며 바로크의 주권자가 구성상 결정불가능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109) <정치 신학>에서 슈미트는 결정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제헌 권력과 헌법 권력 사이의 변증법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에 대응했고, 다시 이에 대해 벤야민은 슈미트가 규범과 그것의 집행을 구분한 것을 끄집어내 응수한다. 권력과 능력(그것의 집행) 사이에는 어떤 결정으로도 메꿀 수 없는 하나의 틈새가 있다.
이 때문에 예외상태라는 패러다임은 <정치 신학>에서와 달리 기적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위치를 바꾸어 파국이 되기에 이른다.(110) 슈미트에게는 ”주권자가…… 신과 동일시되고, 데카르트적 체계에서 세계가 신에게 귀속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주권자에게 귀속"되었지만 벤야민에게 주권자는 “여전히 피조물의 영역에 갇혀 있을 뿐이며 피조물의 지배자라 하더라도 그 자신은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11) 주권자의 기능에 대한 이러한 재정의로 인해 예외상태는 이제 그것이 효력을 정지시키는 법에 힘입어 내부와 외부 사이의, 아노미와 법적 맥락 사이의 절합을 보증하기는 문턱이기를 그친다. 오히려 예외상태는 아노미인지, 법인지 결정할 수 없는 지대가 되며, 그러한 지대 안에서 법질서와 피조물의 영역은 하나의 동일한 파국 속에 빠져들어간다.

벤야민-슈미트 관련 자료 중 결정적인 것은 벤야민이 작성한 ‘역사 개념'의 여덟번째 테제이며 거기서 벤야민은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예외상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고 말한다. 이것은 결정 불가능성으로 나타났던 예외상태가 극한에 도달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며 여기서 벤야민과 슈미트 모두 1933년에 선포된 예외상태가 결코 해제되지 않은 하나의 국가-나치 제국-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112) 슈미트는 독일이 주권 독재 상황에 있다고 보았고 새로운 헌법의 성격을 정의하려 애썼으나,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예외상태가 전면적으로 상례와 혼동되는 일이었다. 슈미트의 말대로 “상례가 예외 속에서만 살 수 있다면”, 예외와 상례가 결정불가능하게 될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슈미트의 관점에서 법질서의 기능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장치-예외상태-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것의 목적은 규범의 효력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킴으로써 규범을 적용 가능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외가 상례가 되면 이것은 작동하지 않는다.(113) 예외와 상례 사이의 혼동은 실제로 존재했는데 제3제국에서 히틀러가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지 않은 채 이중 국가를 조직하려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114) 예외상태를 통해 아노미를 붙잡아두려는 국가 권력의 시도는 벤야민에 의해 정체가 밝혀져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법률-의-힘으로 법을 효력 정지시키면서 법을 유지토록 강요하는 최상의 법적 픽션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대신해 내전과 혁명적 폭력, 즉 법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린 행위가 들어선다.
예외상태를 둘러싼 벤야민과 슈미트의 논쟁의 지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폭력과 법 사이의 관계이며 최종적으로는 인간 행동의 암호로서의 폭력이 갖는 지위이다. 폭력을 법적 맥락 속으로 계속해서 기입하려는 슈미트의 시도에 벤야민은 폭력이 순수한 폭력으로서 항상 법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하는 식으로 응수한다.(115) 아감벤은 이러한 아노미를 둘러싼 싸움이 서양의 정치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듯 보인다고 말하며, 법과 로고스가 생명의 세계에 가닿을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효력 정지라는 아노미적 지대가 필요한 것인 양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116) 이 지대-규범과 관계없이 인간이 행동하는 지대-는 법의 극한적이고 유령적인 형상과 일치하며, 거기서 법은 적용 없는 순수한 효력(법률-의-형식)과 효력없는 순수한 적용, 즉 법률-의-힘으로 분리된다. 예외상태의 구조의 복잡성에 대해 강조하며 아감벤은 순수한 폭력 또한 언젠가 포획되어 법적 맥락 속에 기입되어야 할 인간 행위의 어떤 원초적 형태가 아니라 예외상태를 둘러싼 싸움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되는 것으로, 바로 이 싸움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오직 이런 식으로만 법보다 앞선 것으로 전제된다고 말한다. (117)

벤야민의 에세이에서 핵심용어인 ‘순수한 폭력'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벤야민은 에른스트 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존재의 순수성은 결코 무조건적이거나 절대적이지 않으며 모든 존재의 순수성은 존재 자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순수성이 폭력 행위 자체에 내재하는 실체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118) 순수한 폭력과 신화적, 법적 폭력 사이의 차이는 폭력 자체가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폭력 비판의 과제는 폭력이 법 및 정의와 맺고 있는 관계를 서술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신화적, 법적 폭력이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인 반면, 순수한 폭력은 어떤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 벤야민의 테제이다.(119) 폭력 비판은 그 기준을 “폭력이 봉사하는 목적에 대한 고려 없이 수단 자체의 영역을 구분해내는 데서” 찾으려 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주제는 ‘순수한 수단', 즉 ‘목적 없는 수단성'이라는 역설적 형상으로서의 폭력이다. 여기서 문제는 목적들에 대한 수단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관계하는 다른 종류의 폭력을 찾아내는 것이다. 폭력은 하나의 목적을 향한 수단이라는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수단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순수한 것이 된다.(120) 순수한 폭력은 오로지 폭력과 법 사이의 관계를 폭로하고 폐기함으로써, 통치하거나 집행하는 폭력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순수하게 작동하고 현현하는 폭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121) -벤야민이 순수한 폭력의 예로 든 '분노'

아감벤은 카프카의 가장 카프카다운 몸짓은 아무 의미없는 법을 유지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법이기를 멈추고 모든 점에서 삶과 구별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데 있다고 말한다. 폭력과 권력 사이의 연결망이 절단된 후에도 여전히 가능한 법의 형상이 있는데 그것은 효력을 발휘하지도 적용되지도 않는 법이다. 그런 식으로 일체의 관계에서 해방된 후에도 살아남는 법은 어떤 것일까? 여기서 벤야민이 마주친 어려움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는 문제에 대응한다.(122) 즉 메시아의 완성 이후 법은 어떻게 되는가? 계급 없는 사회에서 법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문제는 무한한 탈구축과정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법이 정의가 아니라 단지 정의로 이끄는 문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정의에 이르는 길을 여는 것은 법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법에서 활력을 빼앗고 작동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법률-의-힘이 저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카프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흥미로운 까닭이며 그들은 각자에 고유한 전략에 따라 법을 궁리하고 법에서 활력을 빼앗고 그것과 놀려고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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