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2장 ‘이슬람교도’ 96-130p 발제문

작성자
etranger
작성일
2019-11-24 19:24
조회
692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2장 ‘이슬람교도’ 96-130p 발제문

아우슈비츠는 모든 의무적 의사소통이라는 원리에 대한 철저한 반박이다. 그중 ‘이슬람교도’는 가장 철저한 반박이며, 부정을 부정함으로써 존속하는 형이상학적 보루들을 철저히 파괴한다. 도덕철학이 도입된 인간의 ‘존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잃지 말아야 할 내면적 모델 또는 외면적 이미지이지만, 극한 상황에서는 삶과 규범 사이에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다. 이는 아우슈비츠가 종착점을 나타내는, 모든 존엄의 윤리(학), 규범에 대한 순응을 가르치는 온갖 윤리(학)의 파산을 고하는 이유다. 그것은 그 자체가 유일한 규범이며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종의 일원이라는 궁극적인 감정’은 결코 어떤 의미에서도 존엄 같은 것일 수 없다. 이슬람교도는 존엄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어떤 형태의 삶의 윤리(학)의 문턱을 지키는 문지기이다.

레비는 이슬람교도를 두고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 부르기를 망설인다.” 한 인간의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라 불릴 수 없다는 것은, ‘이슬람교도’가 수용소에 들여오고 수용소가 세상에 들여온 특별한 공포이다. 죽음이 죽음이라 불릴 수 없는 곳에서는 시체도 시체라고 불릴 수 없으며, 수용소에서 침탈된 존엄은 삶의 존엄이 아니라 죽음의 존엄이다. 아렌트는 ’시체의 제조‘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것은 어느 경우에나 죽음에 대해 진실하게 말한다는 게 더 이상 불가함을,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은 죽음이 아니라 그보다 더 지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아우슈비츠를 접근할 때면 언제나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모순들이 있다. 이는 아우슈비츠보다 수년 전에 이미 우리 시대의 죽음의 격하를 고발했던 저자들이 부딪혔던 문제였다. 릴케의 경우 대도시에서의 죽음의 격하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시인은 프로이트의 애도 도식에 따라 사라진 대상을 내면화함으로써 그에 반응한다. 그는 시종관 브리게의 죽음이 ‘훌륭하고’ 고유한 죽음인지에 대해서 어느 곳에서도 말하지 않고, 그가 자신의 하인들과 자기의 개들에 둘러싸여 자신의 집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것을 그려낸다. 죽음에 ‘고유한 존엄’을 되찾아주고자 하는 릴케의 시도는, 시인 자신의 억압된 욕망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불경의 느낌을 남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는 죽음에 독특한 기능이 배정된다. 죽음은 어떤 결단적 경험의 장소, 즉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이름하에 필경 하이데거의 윤리(학)의 궁극적인 의도를 표현하는 그러한 경험의 장소이다. 여기서 일어나는 ‘결단’에서는 일상의 비고유성이 고유성으로 전환되고 익명의 죽음이 가장 고유하고 앞지를 수 없는 가능성이 된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한 장소이다. 다시 말해 수용소는 비고유한 것의 어떠한 전유도 있을 수 없고, 비본래적인 것의 현사실적 지배에 반전도 예외도 없는 장소이다. 그것은 본래적 결단의 가능성 자체를 의문에 부치며, 그리하여 하이데거 윤리(학)의 기반 자체를 위태롭게 만든다.

수용소에 있던 누구라도, 참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심지어는 바라지 않았을 것까지도 참아냈다. 이 ‘극도의 인내’, 이러한 가능성의 소진에는 ‘인간적’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인간적인 힘이 비인간적인 것에 아주 근접해 있는 것이다. 나치 친위대에게는 이들만큼의 수용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인간적인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치 친위대가 거의 예외 없이 증언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극단적 인내의 귀결이 ‘이슬람교도’라면, 이제야 나치 친위대가 ‘이슬람교도’에 대해 증언은커녕 바라볼 수조차 없었던 이유가 설명된다.

서구의 죽음 문화에는 이중 세습(주술적·법률적 전통과 철학적·메시아적 전통)이 결합되어 함께 나타난다든지, 두 전통이 시대마다 번갈아가며 나타났다. 아감벤은 이를 근거로 죽음의 존엄성 문제와 관련한 서구 문화의 모호성을 언급한다. 이 모호성은 아우슈비츠 이후 발작에 이르렀다. “아우슈비츠 이후 우리는 시를 쓸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아도르노였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일종의 역사적 분수계로 만들고자 했으며, 고유한 죽음에 대한 릴케(하이데거)의 권리 주장을 비웃으며 비난한다. 아우슈비츠는 서로 명백히 모순되는 이유, 즉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죽음의 완벽한 승리를 실현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을 격하하고 비천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있다. 이 사이에서 아우슈비츠의 고유한 문제를 특정하지 못하는 이성의 무능력함이 드러난다.

아우슈비츠의 진정한 암호, 즉 ‘이슬람교도’, ‘수용소의 핵심’,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며’ 모든 증언 속에 하나의 공백으로 기입되어 있는 자는 명확한 위치를 찾지 못한 채 비틀거린다. 생존자[레비]가 ‘이슬람교도’에 대해 ‘온전한 증인’, 그의 증언이 보편적 의미를 가질 유일한 증인이라고 말할 때 그러한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의 이탈리아어 제목인 ‘이것이 인간이라면’ 또한 그러한 의미를 지닌다. ‘인간’이라는 명칭은 다른 무엇보다도 비인간에 적용되는 것이며, 온전한 증인은 인간성이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자이다. 레비의 책 제목이 암시하듯, 인간은 인간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자이다. ‘이슬람교도가 온전한 증인’이라는 진술에 ‘레비의 역설’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아우슈비츠를 이해하는 것(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면)은 곧 이 역설의 의미와 무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한편 미셸 푸코는 죽음의 격하를 근대 권력의 변형과 결부지어 설명한다. 이 모델은 근대 생명 정치학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살리거나 죽게 놔둔다는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과거 주권의 권리 속에서는 죽음이 군주의 절대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면, 이제 죽음은 개인이 모든 권력에서 벗어나 가장 사적인 것 속으로 다시금 침잠하는 순간이 된다. 두 가지 권력 모델은 한 시스템에서 다른 시스템으로의 이행을 규정하는 개념적 대립(개인/인구, 규율/조절 기제, 유형적 인간/유적 인간)을 야기한다. 푸코는 그 기술들이 어떤 경우에는 각자 상대방 안에서 서로 통합될 수 있음을 온전히 인식하고 있었다.

바로 이 이질성이 나치 국가에 대한 분석에 직면하는 사안일 때는 문제가 된다. 히틀러의 독일에선, 살리는 생명 권력의 유례없는 절대화가 주권 권력의 죽이는 일반화와 교차하며, 생명의 정치가 죽음의 정치와 직접적으로 일치한다. 여기서 정치적인 단위 집단인 인민people이 생물학적인 단위 집단인 인구population로 끊임없이 강등되고, ‘이슬람교도’가 되는 순간에 인종주의의 생명 정치는 인종을 초월하며, 더 이상 휴지를 설정하는 게 가능하지 않은 어떤 문턱을 뚫고 나간다. 그런 점에서 수용소들은 무엇보다도 생물학적 연속체에서 격리될 최종적인 생명 정치적 실체인 ‘이슬람교도’의 생산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이슬람교도’ 너머에는 가스실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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