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유병록

작성자
youngeve
작성일
2018-10-30 13:48
조회
1047
딱,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을 자르자 붉은 대야에 더 붉은 피가 고인다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갈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힘
오리는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돈다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때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의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툰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런 날로 돌아가자고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데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숨과 울음이 오가던 구멍에서 비명처럼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뜻한 호수에 도착했나
발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 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
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바라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

물 아래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은 바닥난 듯 잠잠하지만
기울어 그래도 몇 모금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
전체 0

전체 59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공지사항
시詩 읽기 모임 참가자를 모집합니다! ― 2023년 2월 6일 시작!
ludante | 2022.09.15 | 추천 3 | 조회 1612
ludante 2022.09.15 3 1612
공지사항
세미나 홍보 요청 양식
다중지성의정원 | 2022.01.11 | 추천 0 | 조회 526
다중지성의정원 2022.01.11 0 526
공지사항
[꼭 읽어주세요!] 강의실/세미나실에서 식음료를 드시는 경우
ludante | 2019.02.10 | 추천 0 | 조회 1643
ludante 2019.02.10 0 1643
공지사항
세미나를 순연하실 경우 게시판에 공지를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ludante | 2019.01.27 | 추천 0 | 조회 1533
ludante 2019.01.27 0 1533
공지사항
비밀글 시 읽기 모임 참가자 명단 (2019년 1월)
다중지성의정원 | 2018.02.26 | 추천 0 | 조회 27
다중지성의정원 2018.02.26 0 27
54
SONG OF MYSELF (Walt Whitman)
點心 | 2023.02.10 | 추천 0 | 조회 227
點心 2023.02.10 0 227
53
셔츠의 노래 (1)
點心 | 2023.01.30 | 추천 0 | 조회 316
點心 2023.01.30 0 316
52
그림 <시인의 정원> 시리즈를 그린,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시인들
點心 | 2023.01.26 | 추천 0 | 조회 336
點心 2023.01.26 0 336
51
인생 찬가
點心 | 2023.01.26 | 추천 0 | 조회 395
點心 2023.01.26 0 395
50
별빛 The Light of Stars (2)
點心 | 2023.01.18 | 추천 1 | 조회 293
點心 2023.01.18 1 293
49
아 선장이여, 나의 선장이여/ 월트 휘트먼 (1)
점심 | 2023.01.18 | 추천 0 | 조회 310
점심 2023.01.18 0 310
48
숟가락
點心 | 2020.05.08 | 추천 0 | 조회 916
點心 2020.05.08 0 916
47
목구 (백석)
點心 | 2020.05.07 | 추천 0 | 조회 1218
點心 2020.05.07 0 1218
46
미신/박준
youngeve | 2018.10.30 | 추천 0 | 조회 1894
youngeve 2018.10.30 0 1894
45
바라보다/장옥관
youngeve | 2018.10.30 | 추천 0 | 조회 1101
youngeve 2018.10.30 0 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