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 올립니다

작성자
영대
작성일
2020-06-16 18:22
조회
521
<숲은 생각한다> 2장 - 발제

○ 129쪽 “그 혼동(개들이 황갈색의 큰 짐승을 보고 습격한 것)이 가져온 비극적 결말을 되짚어보려면, 어떻게 개들의 행위가 개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의해 유발되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 이른바 ‘숲은 생각한다’라는 주장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논의 혹은 질문이 필수적이다. 개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행위를 자유의지의 결과/산물>로 이해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저자가 1장에서 강조했듯이, 우리가 기호들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기호들을 그렇게 해석하는 게 우리다. 즉 우리는 기호작용의 산물이며 경유점(waypoint)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행동했다는 것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기호들을 해석하고 세계를 이해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세계의 이해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 근거로서 ‘자유의지’를 든다. 이 때 자유의지는, 이 책의 방식으로 말하면, 기호해석과 무관한/기호해석이 없는 상태다. 자유의지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게 필요하다.

○ 129쪽 “만약 사고가 살아있다면 그리고 살아있는 것이 사고한다면, 살아있는 세계는 주술화(enchanted)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것은 인간적인 것 너머의 세계란 인간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 무의미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의미-화(mean-ing) - 수단-목표 관계, 노력, 의향, 목적성, 의도, 기능, 유의미성 - 는 사고를 규정하고 제약하는 우리의 너무나 인간적인 시도에 의해 완전히 소진되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살아있는 사고의 세계 속에서 창발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빌라 주변의 숲은 활기에 넘친다(animate).”
→ 의미는 인간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에 있다. 세계 스스로가 자신을 의미화하고 있다. 이것이 (저자의) 애니미즘이다.

○ 131쪽 “개들이 숲에서 퓨마와 사슴을 혼동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는 사실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사고의 삶과 그에 머무는 자기들에게 무분별, 혼동, 망각이 그렇게나 결정적인 것일까? 살아있는 사고 속에서 혼동이 갖는 기묘하고 생산적인 힘은 사회이론에서 한편으로는 차이와 타자성이,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성이 수행하는 역할에 관한 기본 전제들에 이의를 제기한다.”
→ 앞으로 글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차차 확인해야겠지만, 저자는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를 망각하는 것”(푸네스)으로 여기는 듯 하다. 지난 시간에 나왔던 기호의 삼차성도 자연현상 안에서 특정한 패턴이나 경향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패턴과 경향성이 근본적으로 다양한 차이의 망각이라고 한다면, 경향성을 드러내고 파악한다는 것이야말로 ‘사고’이리라. 그러니 사고는 근본적으로 ‘혼동’일 수밖에 없다. 아니면, 기호해석이란 것도, 긍정적인 의미의 ‘혼동’이리라. 자기를 잡아먹는 천적이 있다는 사실과 나무가 연쇄적으로 쓰러진다는 실재를 서로 혼동해야지만, 나무가 쓰러지는 일이 기호로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저자가 암시하듯이 사회 안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야말로 사고하지 않게 만드는 것일지도?

비인간 자기들

○ 132쪽 “큰개미핥기는 오로지 개미만 먹는다. 가늘고 긴 주둥이를 개미굴에 밀어 넣어 개미를 포식한다. 개미핥기의 주둥이와 혀가 지닌 독특한 형상(shape, 모양)은 주어진 환경의 어떤 특색, 즉 개미굴의 형상(shape)을 포착한다(capture). 이 진화적응은 다음 세대에 의해 그것이 지향하는(-에 관한, about) 것의 측면에서 해석되는 하나의 기호이다. ...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개미핥기의 주둥이는 개미굴의 기하학적 구조를 한층 더 정밀하게 표상(재현, 재현전)해왔다.”
→ 이것이 생물의 ‘적응성’이다. 생물은 자신의 환경 또는 다른 생물과의 관계를 표상/재현하면서 적응도를 높여간다. 진화를 기호작용으로, 더 정교한 기호작용으로 설명하기. 그래서 저자는 생명(개별 생명체든, 전 생명이든)이 기호과정이라 묘사한다. 즉 생명으로서의 우리 존재는, 일종의 전달체이다. 기호들을 주고받는 프로세스/흐름 속에 내재하고, 그 속에서만 내재하고 있는 전달체다. 혹은 더 나아가, 고정된 전달‘체’로서의 이미지도 버려서, 전달방식 자체라고까지 해야하는 걸까?
주의할 점은, 자기가 일종의 주체로서(어떤 면에서 주체이긴 하지만) 기호를 해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가 누차 역설하듯이, “오히려 자기성은 앞선 기호를 해석하여 새로운 기호를 산출하는 과정의 결과물로서 이러한 기호적 역동성 내부에서 창발한다.”(134) 기호해석의 프로세스가 있고, 그것의 부산물, 부수적 효과(side effect)로서 ‘자기’가 드러나고 나타난다. 즉 이 부수적 효과가 반복되고 일정한 패턴화되면, 그 때 우리는 이를 두고 ‘자기’라고 인지하는 것이다.

기억과 부재

○ 134쪽 “하나의 자기로서 큰개미핥기는 자신의 형식을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하나의 형식이다. ... 요컨대 다음 세대의 개미핥기가 앞선 세대를 기억하거나 재-현전하는 방식은 ‘선택적’이다. 이것은 주둥이가 자신의 환경에 ‘들어맞지’ 않은 탓에 그에 따라 어떤 의미에서는 망각된, 과거의 선조 개미핥기의 자기들 덕분이기도 하다.
→ 입출력이 가능한 메모리로서의 유전자. 당대 환경이나 삶의 양식을 형식화해서 저장하는 저장소.

○ 134쪽 “자기란 개별적인 형식을 유지하고 영속시키는 생명에 고유한 과정의 결과물이며, 그것이 여러 세대에 걸쳐 반복됨에 따라 형식은 주변 세계에 점차 적합해지고 그와 동시에 자기가 아닌 것에 대해서(맞서서?) 형식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어떤 순환적 폐쇄성을 나타내게 된다. 개미핥기는 자신의 계통 속에서 개미굴에 대한 이전의 표상을 재-현전하지만,그렇다고 개미핥기 자체가 개미굴인 것은 아니다. 자신의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에서 그러한 자기는 스스로를 위해서 행동한다. ... 자기는 우리가 행위주체성(agency)이라고 부를 만한 것의 처소이다.

생명과 사고
○ 138쪽 “이러한 과정이 생명을 구성하는 것이다. 즉 모든 부류의 생명은 그것이 인간이든 생물이든 심지어 언젠가 무기물이 되든, 이 신체적이고 국지적이며 표상적인 미래-예측이 갖는 역동성을 자생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이 역동성은 자신의 미래를 구체화하는 가운데 습관 획득을 향한 경향을 포착하고 증폭하며 증식시킨다. 달리 말해 잠재적으로 미래로 확장할 수 있는 그러한 처소의 계통 내에서, 관여성(aboutness)의 처소로 나타나는 모든 개체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여기서 ‘과학적’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적이고 의식적이며 합리적이기도 한 지성이 아니라 단순히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지성이다.”
→ 과거의 기억(부재나 망각도 포함한 기억)을 미래로 투사하려는 것은 모두 살아있다. 즉 과거에 기호들을 해석했던 기억들을 바탕으로(바탕으로 하되 변형도 가능하다. 생물은 배우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패턴화하여 미래에도 그러하리라는 기대(어림짐작)를 갖고 이 패턴들을 미래를 향해 던지고 이를 짐작을 실현시키려는 노력, 이것이 생명이며 사고작용이다.

기호적 농밀함(density)

○ “그러므로 열대의 식물은 토양환경을 표상(re-present)하게 되는데, 이는 초식동물과의 상호작용 덕분이다. [왜냐하면] 이 상호작용이 토양조건의 차이를 증폭시키[기 때문이]고, 그 결과 이 [증폭된] 차이가 식물에게 중요한 것으로 된다. 즉 이 다른 생명-형식[이 예에선 초식동물]들이 없다면, 토양 형태의 차이가 식물에게서 차이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 저자가 상대(적)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환경결정론이다. 즉 생물의 생존방식이나 진화는 환경을 향한 적합성(fit)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는 논리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진화론이기도 하다(실제 다윈이 이런 식의 적자생존을 주장했는지는 미완의 과제다). 신다윈주의 진화론은 전형적인 환경결정론이다. 생물은 무분별하게/맹목적으로 다양한 자손들을 생산해내고, 그 중에 누가 살아남을지는 자연이 선택한다(자연선택설). 또는 환경이 이를 결정한다(환경결정론). 여기서는 모두 생물을 맹목적인 존재로 그려지며, 생물체 내부에서는 다양한 자손을 생산해내는 것 외에 다른 메커니즘이나 활동은 없다.
책에서 다뤄지고 있는 신기한 예시도, 대개는 환경결정론으로 해석되었으리라. 즉 토양의 상태(영양분의 많고 적음)에 의해, 식물의 삶-방식이 결정된다고. 여기서 식물은 그렇게 토양환경이 정해진 대로 살아가는 방법말고는 수가 없고, 그래서 수동적이다. 그런데 이는 저자가 역설하는 ‘기호의 해석작용’을 배제시킨다. 그러므로 저자의 논리 안에서는 다시금 생물이 ‘자기’로서 활동해야할 여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토양이라는 환경은 결코 생물의 생사여탈권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적인 관계를 뒤집어, “식물이 토양환경을 표상한다”. 식물이 주체적인 ‘자기’로서 토양환경을 표상/재-현전시키며, 자신의 삶-방식을 유지/개선시켜 나간다(이것이 진정한 자기 또는 생명의 의미다). 그러나 이는 식물이 아무 원인도 없는, 독립적인 주체임을 의미하진 않는다. 식물이 그렇게 표상하고 독특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초식동물과의 상호작용 덕분이다. (상호작용이니, 초식동물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와 다른 자기가 함께 표상활동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 상호작용이야말로, 토양 환경의 차이를 증폭시킨다. 증폭(amplify)이라는 말을 쓰고 있으니, 아마도 미세하거나 큰 의미가 없는 차이였던 것이 이제 유의미한 차이로 의미부여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즉 토양환경의 차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도록 존재했었지만, 초식동물과의 상호작용이 아니고선 식물의 삶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초식동물과 함께 있고서야 비로소 토양환경이 지닌 영양분의 차이도 부각될 수 있었다.
이렇게 부각된 토양환경의 차이가 그제서야 식물에게 중요해지고, 그 식물이 다른 식물과 다른 독특한 식물이 되게끔 만든다. 결론적으로 토양환경의 차이는 그 자체로 식물에게 의미있는 차이가 되지 못한다(여기서 환경결정론은 기각된다). 대신 생명들 간의 상호작용이 이 차이를 부상시켜서, 실질적인 생명의 차이를 생산하게끔 만들어준다.
척박한 토양에서 독성있는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것은, 척박한 토양 자체가 그렇게 결정지은 게 아니라, 초식동물의 존재였고, 그 함께-있음이 토양의 척박함을 독성으로 바꿔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식물의 유니크한 독성은 이러한 과정의 산물이다.
그 점에서 지난 시간에 짧게 얘기한 ‘용불용설’도 생물의 노력(자신의 삶-방식을 유지/개선시켜나가려는, 비의식적 노력)을 표현한 논의일 수 있다. 생물이 자신의 생존과 진화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당연히 일정한 역할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절의 제목인 ‘기호적 농밀함’도 이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호적 농밀함은 기호들이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다는 뜻이므로, 보다 많은 기호들로 보다 많은 것들을 표상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세세한 차이까지도 포착해서 증폭하고, 의미화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마존 열대우림이 지닌 수많은 상호관계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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