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호] 난민이 된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노수복 그리고 배옥수ㅣ이유경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0-07-27 20:57
조회
585
 

난민이 된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노수복 그리고 배옥수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기자


나는 다수의 필진들이 참여하는 단편 묶음책에 편견이 좀 있다. 이 묶음책 중에는 통상 특정 주제나 키워드를 내걸고 '네임드'(유명인사)의 글을 모아 놓은 경우가 많은데, 저자들의 경험 세계가 때로는 파편적으로, 때로는 유려한 문체의 수기로 묶여 나온다. 후자의 글이 압도적이라면 대중서로서는 장점이 있지만 그렇더라도 반드시 양질의 콘텐츠를 보장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난민' '분쟁'과 같은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슈를 기반으로 한 책들은 심금을 울리는 감성 콘텐츠에 기우는 경향이 뚜렷하다(단, 역서는 좀 다르다. 외국저자의 책은 무거운 주제를 무겁게 쓴다. 번역이 서툴러도 출판 가능성이 국내저자보다 커 보인다). 내가 한국 출판계에 갖는 유감 한 토막이다. 쉬운 출판으로 균형추가 너무 기울면 자칫 해당 이슈를 '불쌍 프레임'에 가둘 우려가 있다. 불쌍함도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난민과 분쟁을 바라보는 관점이 시혜적 이상을 넘어서는데 방해 기제를 형성할 수 있다.


제 아무리 눈물과 분노를 자극하는 이슈도 과학적 접근이나 분석이 없으면 배움이 덜하다는 사실, 감성과 이성을 균형적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거미줄 같은 국제분쟁과 그 분쟁의 온갖 파편조각들, 숙명적으로 따라붙는 난민문제 등 여러 문제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건 내가 국제분쟁 이슈를 15년 넘게 취재하고 학습하며 얻은 결론이자 뼈저린 경험이다. 나의 이런 편견과, 나의 이런 유감 두 가지를 동시에 깨뜨린 책이 바로 <난민, 난민화되는 삶>이다.


<난민, 난민화되는 삶>은 '난민'을 키워드로 하여 병역거부, 위안부, 동물의 난민성, 이주민의 패션, 그리고 독일 이주민 커뮤니티와 이 시대 최대 난민이슈인 미얀마의 로힝야 난민 이야기에 이르는 주제를 전방위적으로 아우른다. '난민을 매개로 이슈와 공간의 확장성이 너무 과한 건 아닌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집어든 책인데, 읽다보면 각 챕터가 선을 과하게 넘지 않고 어느 순간 다시 난민문제로 충실히 돌아오는 구도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구간은 현학적·추상적 수사가 과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감수성 짙은 고민과 끝없는 질문, 그리고 아카데믹 방법론으로 무장한 연구자들의 논리적 분석이 조화를 이룬 책이다. 어찌보면 단행본이라기 보다는 모저널의 '난민 특집 에디션' 같은 책이다. 당연하게도 인용 및 참고문헌 출처와 기 연관 연구물들의 적극적 소개가 각 페이지 하단에 주석으로 꼼꼼히 달려 있다. 주석 달린 책에 대한 거부감을 깰 수 있고 유익한 소 논문 몇 편을 읽은듯한 지적 포만감을 독자들에게 선사해 줄 것이다. 참여한 저자들은 마치 '난민문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장님 코끼리 등 만지기식이어서는 안됩니다'라고 끝없이 주입하는 듯하다.


이 책을 집어 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게 있다. 누구라도 우선은 '여는 글 - 마주침의 한계-접점에서'를 통해 책의 소개와 요약을 일별할 것이다. 그 다음은 '3부 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들'(261쪽)로 우선 건너가 보라 말하고 싶다. 이 출판물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난민 X 현장' 프로젝트 팀의 배경과 활동이 여는 글에서 3부의 첫 장으로 잘 연결되어 있다.


동시대 현안에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아는 현직 교수, 독립 연구자들이 팀워크를 이뤘고, 그렇게 탄생한 팀워크 프로젝트 난민 X 현장은 2018년 10월 한국사회에 난민 화두를 소란스레 던졌던 '예멘 난민 사태' 이후 첫 모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1년여 '티치인'(Teach-In)이라는 형식의 대중적 공론장을 만들고 그 장에서 배우고 토론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모든 노력이 이 책의 밑천이다.


여기에 해당 분야에서 다년간 뛰어온 활동가들이 그 다년의 활동을 기반으로 주류 언론들이 절대 외면해온 뜨거운 감자들을 글에 담아 보탰다. 병역거부 운동이나 예멘에서 발견된 한국산 무기를 고발하는 '제3회 반군사주의와 난민'이 그런 챕터다. 이 책은 한국산 무기가 수출된 사례들을 통해 한국이 난민생성 매커니즘에 연루된 진실을 재차 확인한다. "1991년 인도네시아로 수출된 최루탄은 민주화 열기를 탄압하고 동티모르 독립운동을 유혈 진압하는데 쓰였다"는 대목이나 터키 쿠르드 지역 아프린 공격에 쓰인 한국 방산물자 사례 등이 그에 해당한다.


개인적으로 난민 X 현장 팀 고민의 하이라이트는 타자화에 대한 질문을 거듭 던지는 제3부에서 가장 잘 읽을 수 있었다. 3부 1장이 그 하이라이트인데, 팀은 우리가 난민과 이주민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을 배제하려는 노력조차도 또 다른 편견일 수 있음을 거듭 자문하고 토론한다. 그 좋은 예가 현재까지 총 3회에 걸쳐 진행한 티치인이라는 공론장을 기획 홍보하는 과정에서 홍보물의 대표 이미지 사용을 두고 난민 X 현장 팀 구성원들이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고민과 토론을 벌여온 데서 잘 나타난다.


첫 티치인 홍보포스터를 보자. 팀은 인형 들고 있는 아이 사진을 최종적으로 선정했다. 그 과정에서 "(어찌보면 그냥 평범할 수 있는) 인형을 들고 있는 아이가 갖는 이미지가 난민의 상황과 만나면 (불쌍 프레임의) 강력한 전형성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p 268)고 적었다. 결국 팀은 "비참함을 직시하는 것과 대상화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p. 270) 이와 같은 고민은 현장을 찍는 사진가는 물론, 펜기자들을 끝없이 사로잡는 괴로운 질문이다. 내 카메라에 담는 이 이미지는 내가 현실을 직시하기 때문에 찍고 전하는 것인가? 아님, 나는 그저 저 난민들을 불쌍한 개체로 대상화하는 중인가? 나도 끝없이 물었고, 동료 기자들도 끝없이 맴도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 고민의 과정에서 우린 대상화 이미지와 직시하는 이미지에 구분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도 또 다시 같은 고민은 매번 계속될 것이다. 같은 고민을 토론으로 승화한 난민 X 현장 팀이 토론을 거듭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책이 내게 던진 가장 핵심적 문제의식은 제목에 등장하는 단어 '난민화'였다. 난민화는 '난민처럼'을 의미하는 은유법이자, 난민이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로도 읽힌다. 이 은유법을 가장 기묘하게 반영한 부분은 바로 '위안부'를 다룬 장이다. '난민과 '위안부'가 도대체 어떻게 연결된다는 거지?'와 같은 질문에 이 부분을 집필한 문학평론가 이지은은 아주 수준 높은 분석으로 답을 줬다. 그가 쓴 장의 제목이 이렇다.


"민족국가 바깥에서 등장한 조선인 '위안부', 그녀들의 귀향의 거부 혹은 실패"


이 강렬한 제목을 파고 들어가면, 한국사회에 익숙치 않은 '위안부' 3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배봉기, 노수복, 그리고 배옥수. 배봉기는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후 ‘불법재류자’가 됨으로써 일본 사회에 우선 알려지게 되었고, 배옥수는 전후 어찌어찌하여 베트남까지 흘러간 후 70년대 베트남전 시국통에 베트남 난민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와 여타 베트남 난민들과 함께 한국에 거류하고 있었다. 노수복은 중국인 남편과 태국에서 자식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이지은은 '위안부' 3인을 통해 난민화라는 은유의 세계를 역사 속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세 명의 '위안부' 모두 두가지 난민화를 겪었다.


첫째, 귀향을 거부 혹은 실패하며 그들의 '포스트-위안부' 생은 고향 밖 난민의 삶으로 이어졌다. 은유가 아니다. 현실에서 그들은 난민이었다. 난민화된 현실이 그랬다.


두번째, 이들은 민족국가 프레임 밖에 있었다. 그 자체가 '위안부' 주류담론 밖으로 밀려나는, 말하자면 '담론의 난민화'를 겪었다. 난민화된 이들은 자신들이 조선태생의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알렸음에도 지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민족국가 밖에 재류하고 있다는 이유로 '위안부'로서 적극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외부에서 거듭 난민화된 생을 이어갔다. 그런 3인의 '위안부'가 한국사회안으로 들어오고 다뤄지는 과정에 한국언론이 이들을 어떻게 선정적으로 표상하고 기삿감으로 전락시켰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도 이 챕터에서 놓쳐선 안될 중요한 지점이다. 아래 인용은 그와 같은 논평 일부다.


"노수복의 우려대로 대중매체의 관심은 노수복이 겪은 끔찍한 위안소 생활에만 집중되었고, 현재의 삶은 오직 민족이라는 울타리를 중심으로 가늠되었다... 그러나 오키나와, 태국, 베트남 등 아시아 각지에서 등장한 조선인 '위안부'의 삶은 민족국가의 서사로 말끔하게 회수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배옥수는 베트남에 남편과 시가 식구가 있고 그녀와 아들들은 한국에서 베트남 난민 커뮤니티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p 131~132)


'난민화'의 은유가 현실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절묘한 내용 전개는 정의연 사태 속 '위안부' 운동의 성찰이 거론되는 요즘 시의적으로도 매우 적절한 주제였다. 읽는 흥미가 갑절로 컸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흥미로운 챕터를 꼽으라면, 이지은의 '위안부' 글과 김현미의 '어떻게 국민은 난민을 인종화하는가?'이다. 김현미는 '신 인종주의(Neo Racism)'를 키워드로 이 시대 업그레이드된 인종주의에 대해 날카로운 설명과 사례와 맥락을 쉬운 문장으로 풀어썼다. "한국 개신교 우파는 무슬림의 가부장제를 비판하며 마치 자신들이 한국 여성의 인권과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p 284)는 대목은 신인종주의 현상의 대표적 사례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의 신인종주의는 "1990년대 이후 유럽에서 등장한 '이슬람 포비아'의 신인종주의와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대단히 중요한 지적이다. 김현미는 'race'에 집착하는 기존의 인종주의 잣대로 이시대 차별과 혐오가 인종주의가 아닌 것처럼 방어하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반박한다. "신인종주의란 피부색이 아닌 '문화적 차이'를 내세우면서 추방과 배제를 합리화하는 것"(p 285)이라는 지적이다. 단언컨대, 한국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인종주의의 실체는 사실 'race'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바로 이 문화적, 고로 출신 지역을 잣대로 삼는 신인종주의가 보다 광범위하고 뿌리깊다. 어찌보면 신인종주의는 한국사회에서 그냥 신인종주의가 아니라 '한국형 인종주의'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 최대 난제 로힝야 난민 이야기를 보자.


'제2회'(P.333~399)에서 사단법인 아디의 김기남 변호사는 "생존하는 것만으로 저항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작은 김기남의 "여섯 살 어머니". 외할아버지에 대해 한번도 말한 적 없는 어머니가 "한국 전쟁 때 국군이 살해한" 아버지를 잃은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그리고 김기남은 집단학살(제노사이드) 생존자인 로힝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또 다른 여섯 살 어머니를 만나는 듯"했다고 말한다. 한국전 세대의 (수많은) 여섯 살과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의 과반을 이룬다는 로힝야 어린이들이 마구 연동되고 넘나들었을 듯 하다. 읽는 누구라도 마음이 동할 스토리를 전하는 김기남의 글은 간략한 로힝야 역사, 미얀마 근대사, 그리고 2012년 폭력 사태를 지나 2016~2017년 제노사이드 역사까지 포괄하며 이 문제에 대한 유익한 정보와 로힝야를 둘러싼 토론들을 쉽고 군더더기없는 세련된 문체로 전한다.


이어 신지영, 심아정, 이지은, 전솔비 등 난민 X 현장 팀 4인의 공동저술 '지금-여기에 '로힝야'는 어떻게 도착해 있나'는 로힝야 난민 대량 발생의 계기가 됐던 2017년 대학살과 이후 상황, 그리고 우연치고는 기묘한 타이밍으로 겹쳤던 예멘 난민 이슈를 교차시키며 로힝야와 예멘 난민 두 그룹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난민에 대한 물음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그 핵심 질문 중 하나는 혐오다.


"로힝야에 대한 학살, 그중에서도 2016년 이후의 학살은 페이스북에 의한 혐오 발언이 제노사이드로 이어진 예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한 지적이다. 그 울림이 결코 가볍지 않다. 로힝야 제노사이드 40여년의 흐름을 보면 온전히 국가폭력에서 시작됐던 대로힝야 박해는 현재시점에 가까워 올수록 국가폭력뿐 아니라 (대 로힝야) 인종주의, 그리고 앞서 김현미가 소개한 신인종주의에 해당하는 이슬람포비아가 맞물려 가능했다. 물론 이 후발 변수들은 과거 식민 역사를 왜곡하고 재생하며 분리정책(divide and rule)에 공 들여온 미얀마 국가정책이 불지핀 종족 갈등의 영향을 받는다. 2016~2017년 학살이 유독 '대' 학살일 수 있었던 건 미얀마 불특정 다수의 집합적 대로힝야 혐오가 체계적이고 잔혹한 국가폭력과 화학작용을 일으켰기에 가능했다. 그 어떤 대학살도 국가폭력의 학살 의지(intention)에 환호하는 대중 없이는 가능치 않다. 그 환호의 접점은 로힝야에 대한 혐오이고, 그 혐오는 로힝야가 아니라 '벵갈리 불법이민자' 혹은 '칼라'(Kalar, '검둥이' 정도에 해당하는 인종차별적 경멸어로 미얀마 시민들 다수가 로힝야들을 지칭할때 선택하는 호명방식이다)라는 호명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내뱉는 절대 다수가 존재하는 사회라야 가능한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챕터의 부족분을 하나 꺼내들자면, 라까인족의 입지가 종종 생략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p378를 보자.


"식민지 시기에 제국주의 세력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영국-로힝야족 vs. 일본-버마족'으로 분열되어 싸웠던 경험은 해방 후 버마 족 중심으로 구성된 독립 정권에 의한 로힝야 족 및 무슬림에 대한 차별로 이어졌다."


위의 인용은 미얀마의 복잡한 종족 관계에 대한 이해부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버마족'을 '라까인족'으로 대체해야 정확도가 높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같은 오류는 간혹 한국 언론 보도와 특히 이슬람포비아가 넘쳐나는 댓글란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라까인주의 종족갈등은 로힝야족과 버마족 갈등이 아니라 로힝야족과 라까인족 갈등이다. 로힝야 제노사이드가 벌어지는 구도를 보면 국가폭력의 가해성이 물론 주도적 일순위이다. 여기에 더해 라까인 주의 로힝야 이웃인 라까인족과 로힝야의 갈등도 위중하고 위험한 변수다.


미얀마 전체로 보면 버마족 주류통치에 억압당하는 소수종족이지만, 라까인주에선 다수종족인 라까인족은 다수가 로힝야를 혐오한다. 그중 일부는 2012년 이래 대 로힝야 폭력에 보안군과 동참해왔다. 로힝야 디아스포라 그룹과 활동가들은 라까인족에 소수종족간 연대를 끝없이 제안하고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그 반대의 신호는 요원해 보인다. 최근 라까인족 반군과 미얀마 정부군 간에 내전이 격화하면서 반군 AA 최고사령관 트완 므랏 나잉(Maj. Gen. Twan Mrat Naing)의 대로힝야 유화적 발언이 나오고 있지만, 필자는 이 발언이 다분히 버마족 중심의 정부군을 겨냥한 국제무대용 외교적 전술이자 심리전이라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물론 이후 전개 상황을 유심히 관찰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이와 같은 '소수종족 vs. 소수종족' 갈등 구도가 뿌리깊고, 폭력적이며 절대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은 난민 X 현장 팀 저자들이 기술한 위 인용구도에서 '주류 버마족 vs. 소수 로힝야'로 왜곡 반영됐다.


로힝야 대학살이 전 세계에 던진 혐오의 교훈은 어마무시하다. 한국사회라고 그 교훈을 피해갈 순 없을 것이다. 최근 차별금지법(혹은 평등법)이 정의당 장혜영 의원의 대표발의로 국회에 상정됐지만, 그 발의를 위해 10명의 정족수를 채우기까지 발을 동동 굴러야했던 현실은 참담하다. 혐오와 차별이슈에 여전히 무감하거나 타협을 시도하려는 정치권의 후진적 인권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예멘 난민에서 로힝야 제노사이드까지 혐오의 범람을 직간접적으로 모자라지 않게 경험한 한국사회가 여전히 아무 교훈도 얻지 못했다면 바로 이 책 <난민, 난민화되는 삶>과 같은 출판물이 희귀했던 탓일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 우리의 필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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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0년 7월 25일 <프레시안>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s://bit.ly/2BwHS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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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마이너리티 코뮌』(신지영 지음, 갈무리, 2016)


2009년 가을 ~ 2015년 초까지 도쿄.서울.뉴욕의 길에서 만난 소수자 마을(minority commune)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의 반전.반빈곤 활동,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활동, 야숙자들의 공원 점거 활동, 재일조선인 코뮌과 인종주의적 차별, 3.11 이후 탈원전.반원전 활동, 헤이트 스피치에 대항한 카운터 데모, 비밀보호법과 전쟁헌법 반대 활동 순간들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 순간들은 미군 기지 반대 운동, 두물머리, 세월호, 재능교육, 쌍용 자동차 투쟁을 하는 한국의 거리와 연결되며, 2014년 ‘범죄 인종주의’에 저항하며 뉴욕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아메리카 아프리칸들과 접속한다.


증언혐오』(조정환 지음, 갈무리, 2020)


이 책 『증언혐오』(그리고 이와 동시에 출간하는 『까판의 문법』)은 2019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지 5년이 되는 날에 시작된 증언선 윤지오호의 침몰이라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1년여에 걸친 집중적인 연구의 결실이다. 이 두 책은 하나의 사건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증언혐오』는 사람들을 위한 증언자의 증언증여와 증언자를 위한 후원자의 화폐증여에 의해 형성된 진실 공통장을 중심에 놓고 이에 대한 혐오의 경향이 변호사, 기자, 작가 등의 전문가 집단과 SNS 등에서 발생하는 모습을 그렸다.


까판의 문법』(조정환 지음, 갈무리, 2020)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증언자 윤지오의 증언을 통해 형성된 진실 공통장에 대한 반발, 거부, 억압, 배제의 메커니즘이 증언자를 사기꾼으로 만드는 마녀사냥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한다. 이것은 일명 '까판'이라 불리는 반공통장 공간의 운동으로 나타나는데, 이 공간은 SNS 까계정에서 출발하여, 변호사·기자·작가·교수와 같은 전문가 집단, 신문·방송과 같은 전통 매체, 국회의원·경찰·검찰·법원 같은 국가기관 등에 광범위하게 산포되면서 우리 사회의 지배적 논리이자 주류 담론 문법으로 자리 잡아 결국 전 사회적 까판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 책은 이 전 사회적 까판의 논리와 운동 메커니즘을 권력형 성폭력 가해권력이 사용하는 권력 테크놀로지로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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