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수유리에서

작성자
commons
작성일
2018-09-15 16:49
조회
699
다시 수유리에서

고정희

이제는 수유리를 떠나야 한다고
은밀히 내 심중에게 말하고
은밀히 수유리의 바람에게도 말했습니다.

이제는 수유리에서 자유로와야 한다고
한국신학대학 푸른 청솔에게 말하고
4년 동안 조기가 게양되었던
수유리 하늘에게도 귀띔했습니다.

이제 수유리는 수유리가 아니라고
경기도 양산리를 향해서 한번 말하고
찢어진 우리의 교기를 향해서도 한번 크게 외쳤습니다.

연희동에 13평 전세아파트를 계약하고
길일을 따져 이삿날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친구여
나는 수유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계약금을 날리고
아파트의 자유를 날려버리면서도
나는 수유리의 흡인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습니다.
개인주택 지하 1층에 살면서
에프엠 수신이 불가능하다 해도
하루 세 시간씩 출퇴근길에 파김치로 흔들린다 해도
수유리에 묻는 내 꿈을 버릴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수유리에 뿌리내린 이 나라의 기원이
눈부시게 휘날리는 날을 위하여
뜻맞은 우리 몇사람
수유리에 모여 앉아
뜨겁고 뭉클한 믿음을 포개며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함을 알았습니다



저는 수유리를 떠났습니다. 맑은 아침내음과 풍경 가득한 새소리들, 개털들의 꼰대 같은 자존심들과 찬 약수에 찬 소주들을, 돌아섰습니다. 시인의 그 떠나지 못하는 마음을 저는 너무나 잘 느낍니다. 마치 중독처럼, 삶의 마디마디에 떠오르는 그때의 추억들이 아직도 형형하게 저를 휘감으니까요. 시인은 못 떠났죠. 그는 시인이기에 그랬겠죠. 하지만 두 자녀와 마누라를 둔 가장은 떠나야 했습니다. 아니 매일 떠나야 합니다.

사실! 신변잡기보다는 ‘떠난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모두 사람들은 어떤 정도들(degrees)이 있는 것 같습니다. 떠남의 정도들이죠. 책의 표현으로는 본능에서 경향들로의 떠남의 정도들이랄까요? 그 스펙트럼의 어디에 여러분은 있나요?

몰래 한신대 기숙사를 찾아갔죠. 그런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니 사람만 없지 않고 그 시절 그 분위기, 그 단호하지만 텅 빈 주먹들, 구석구석 뒹굴던 병 나부랭이들,...!
저만 사라진 게 아니었더군요. 다행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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