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를 끝내고

작성자
Yeongdae Park
작성일
2019-03-27 17:06
조회
532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을 다 읽으니 아주 뿌듯하네요.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할 책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 읽어놓은 게 좋은 바탕이 될 것 같습니다.
저 스스로 정리도 할 겸,
이번에 느낀 바와 나름의 과제를 간단히 적어봅니다.

- 이 책은 '사자'에서 '어린 아이'가 되는 과정을 그리는 책입니다.
니체는 이 책 이전에 사자가 되었습니다.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명령으로서 주어지는 도덕 명령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렇기에 사자로서의 니체는 언제나 화가 나 있고 비판과 '팩트폭행'의 언설을 내게 됩니다. 제가 떠올렸던 촌철살인의 이미지는 대개 이 사자-니체였더군요. 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허무를 불러옵니다.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해낸 자는 어떤 가치도 의미없음을 깨닫게 되고, 허망함/허무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어린 아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분노와 미움 없이 세계를 긍정하기 위해서, 부정적인 것에 기대지 않고 창조하기 위해서, 니체는 분투합니다. 그 고군분투의 과정이 <차라투스트라>의 전체 내용입니다. 이 책은 어린 아이를 예감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이후의 저서들은 아이로서의 글쓰기, 창조한 자의 결과물로 드러나겠지요.

- 영원회귀, 가장 허무한 것을 그 자체로 긍정한다는 것.
영원회귀는 이 책의 가장 큰 주제 중 하나입니다. 영원회귀는 모든 것, 그리고 우리 삶이 그대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허무주의의 극치입니다. 그 똑같은 삶(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모두 그대로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영원회귀는 사자-니체에게 가장 큰 허무주의, 절대 벗어날 수 없는 허망함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니체는 깨닫습니다. 바로 그 영원회귀가 가장 큰 자유, 창조의 바탕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를 이해하는 것은 저에게 남은 과제입니다. 이 방향일텐데, 아직 실감이 나지 않네요. 영원회귀의 허무함을 그 자체로 긍정하게 되는 지점. 영원회귀에 논리나 설명을 붙여 가공해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자유'임을 깨닫는 긍정. 그 논리를 억지로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깨닫는 게 남아있습니다. 철학적 개념에 대해서, 우리에겐 설명이 아니라 체험이 필요하니까요.

- 긍정에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차라투스트라> 머릿말의 결론은 '길동무'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시장터의 사람들에게 무시받은 후, 차라투스트라는 결심합니다. 길동무를 얻자.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나를 따라 나설 길동무를 만들자. 4부 끝까지 읽어도 기대한 길동무는 나오지 않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언제나 혼자 출발하고 혼자 돌아오고 고독을 위해 동굴로 들어갑니다. 게다가 중간에 만나는 이들은 대부분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설령 조금 이해하고 그의 말을 인용하는 자가 있더라도(4부 보다 높은 자들), 오해한 게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마음 맞는 길동무는 결국 없는 셈이지요. 그는 실패한 것일까요? 실은 길동무를 <마음 맞고 잘 이해하는 친구>로 정의한 제가 실패한 거였습니다. 길동무에 그런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서는 안되더군요. 오직 다만 함께 길을 갈 뿐. 그게 길동무가 되는 조건의 전부입니다. 오해하고 왜곡하더라도 함께 길을 가려고 한다면, 길을 가는 한 영원히 길동무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길동무로부터 차라투스트라는 긍정을 배우게 됩니다. 그 과정도 한 편의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왜 길동무가 필요한 것일까요?

이 정도가 저에게 남아있는 내용이자 과제입니다.
앞으로 살면서 이를 이해할 때가 오겠죠.
다음에 다시 읽게 될 때, 또 많이 배웠으면 정말 기쁘겠네요.

5월부터는 니체의 <아침놀>을 볼 계획이니,
<차라투스트라>와 이어지는 지점도 있겠지요.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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