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호] 신지영의 『마이너리티 코뮌』 / 이영진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8 20:40
조회
3569
신지영의 『마이너리티 코뮌』
『마이너리티 코뮌』 서평


이영진(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 연구교수)


* 이 글은 2016년 4월 7일 웹진 문화다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inte_text&ps_boid=100


출판사의 서평 의뢰를 받고 책을 펼쳐든 지 사흘이 지나서야 비로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중간 중간 강의도 있었고, 다른 일도 있었지만, 아침 9시부터 늦은 저녁까지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지식 노동자’의 평소 ‘작업’ 속도에 비춰본다 해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물론 540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의 볼륨도 만만치 않았지만, 무엇보다 7년여라는 긴 시간 동안 낯선 타지에서 이방인의 시선으로 ‘가까이서 그리고 멀리서’ 경계를 넘나들면서 관찰하며 기록한 이 노작을 가볍게 독파할 수는 없었다.

책장을 넘기노라면 자신이 지나치는 “거리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에너지를 느끼면서” 그 느낌들을 섬세히 기록하는 저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생생한 이미지야말로 무엇보다 이 책의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책이 단순한 여행기와 구분되는 이유는, 이방인stranger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철저한 자각 때문일 것이다. 예전 짐멜G. Simmel이 말했던 것처럼 이방인은 기본적으로 “오늘 와서 내일 가는 그런 방랑자가 아니라, 오늘 와서 내일 머무는 그러한 방랑자”, 즉 “더 이상 이동하지는 않지만 오는 것과 가는 것의 분리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한” 불완전한 존재다. 하지만 이러한 불완전성이 오히려 그에게 현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한 사회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관습들, 통념들을 낯설게 하고, 거기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눈이다.

이 책이 다루는 2009년부터 2015년까지의 일본사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스테레오타입의 일본, 즉 고요하고 정적인 균질한 공동체 사회가 아니다. 그곳은 점점 자신들의 생존권을 압박해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야숙자들이, 여성과 퀴어들이, 자이니치(在日)들이, 오키나와인들이,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는 ‘일본인’들이 서로 모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거리에 나서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치는 공간이다. 물론 그러한 소란스러움이야말로 ‘공동체’라고 불리는 사회의 본연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다만 ‘공동체’, 혹은 ‘사회’라는 이름으로 그 목소리들을 죽이면서, 없는 척 하는 것일 뿐.

따라서 이 웅성거림들은 어느 순간(어느 임계점에 도달하면) 큰 목소리로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일본 사회에서 그 가장 커다란 계기는 아마도 2011년 3.11 대참사(지진+쓰나미+방사능 누출이라는 복합재해)였을 것이다. 특히 방사능이라는, 자신들이 이전에 결코 대면해보지 못한,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맡을 수 없지만 사람들의 몸속에 들어가 치명적인 해를 일으키는 이 어마어마한 위험물질의 확산은 일본 사회를 불안과 공포에 빠트리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이 떨림과 불안이, 전통적인 정치 운동에서 결여된 부분들을 드러낼 수 있으며”, 그러므로 “불안은 새로운 형태의 분노가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쓴다. 실제로 3.11 이후 일본 각지에서 전개된 탈원전 데모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풍경은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분노(怒)였다. 2011년 여름과 가을, ‘60년 안보투쟁’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던 이유도 방사능에 대한 불안, 그리고 3.11 이후 아무런 수습도 하지 못한 채, 사람들을 기만하면서 심지어 원전을 재가동하려고 하는 정부, 도쿄전력, 그리고 미디어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파국은 반드시 혁명적 상황만이 아닌 또 다른 반동의 힘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아마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슬로건 아래 결집되는 힘일 것이다. 동북(東北)대지진은 어느새 동일본(東日本)대지진으로 명칭이 바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차별의 대상이었던 ‘동북’, 즉 ‘도호쿠 지방’에 왜 도쿄전력의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가 라는 지속되는 차별의 구조는 은폐되며, 대신 일본 곳곳에는 ‘힘내라 닛뽄’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진다. 더구나 방사능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고 당장 그로 인한 피해가 나타나지 않는, 그리고 없애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어찌해볼 수 없는’ 적과의 싸움에서 점차 피로와 무력감에 빠지는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경제부흥’, ‘강한 일본’이라는 유혹의 목소리가 침투해 들어간다. 2011년 3.11 이후 저자가 도쿄의 거리를 걸으면서, 그리고 집회현장에서 확인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모순된 정동들의 충돌이었으리라.


물론 지금 쓰고 있는 이 서평이 다루고 있는 부분은 이 방대한 저작의 극히 일부분이다. 어찌 A4 1-2페이지로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씌어진 낯선 여행의 기록의 전모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자이니치’, ‘오키나와’, 야숙자, 재특회에 반대하는 시민들(‘내 친구에게 손대지마라’), 그리고 뉴욕의 반인종주의 모임들까지 다양한 ‘마을’(코뮌)들과 마주치면서 저자가 예민한 감수성으로 보고 듣고 느낀 많은 사유들이 촘촘히 짜여져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일반적인 사회과학이 취하는 ‘~문제의 구성’과 같은 입장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도는 도미야마 이치로冨山一郎가 지적한 것처럼 “아픔과 관련한 경험을 한정된 사람들에게 숙명처럼 떠맡기고는 양심이나 연민에 근거해서 혹은 때로 정치적 슬로건과 함께 아픔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를 회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연루’에 대한 자각이다. 저자가 이 마을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의도했던 것은 코뮌에 대한 학문적인 문화기술지라기보다는, 연루에 대한 자각을 통해 그 다양한 마을들을 ‘접속’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책 역시 거의 모든 책들의 운명처럼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나오는 개개 코뮌들에 대한 기술들을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객관성’이 결여된 대목들이 종종 발견된다. 또한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에서 다시 학위를 밟고 있는 여성 연구자라는 저자의 ‘계급적/젠더적 정체성’ 역시, 그가 접속하는 사람들의 폭을 제한하고 좁힌다. 실제로 이 책에 언급되는 소수자 코뮌의 목소리들은 어떤 점에서 본다면, 여전히 상당한 정도의 고학력 여성들의 목소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범위’의 제한이 이 책의 한계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이미 이러한 ‘입장 지어진 주체’positioned subject로서의 자각을 전제로 하면서, 때로는 아주 솔직히 그 한계를 토로해가면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성’에 대한 자각이 기존의 코뮌의 남성주의적 한계를 짚어내고, 공통적인 것commons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종종 저질러지는 특수성에 대한 억압을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감각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이 책의 관점은 매우 소중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글은 에필로그, 즉 「끝나며 시작하는 글」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에필로그는 나중에 덧붙이는 말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지금을 기록하는 것은 뒤늦은 후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즉 “‘글’은 늘 뒤늦게 덧붙이는 것이지만, 늘 어긋나 버리는 시간 감각 속에서 이후를 시작하고 상상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기에, ‘글’은 항상 끝나며 시작하는 운명을 가지게 된다.”라는 이 문장은, 우리 사회, 아니 동아시아, 세계 전반에서 작동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로 인한 소외, 빈부격차, 배외주의, 새로운 인종주의가 만연해 있는 이 사회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잿빛 우울함과 무력감에 젖어 있는 ‘글 쓰는 노동자’들이 다시 펜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간명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이 “증언할 수 없는 타자들의 목소리‘들’의”, “침묵과도 같고 웅성거림과도 같고 파열음과도 같은, 소리 소문들의 비밀스러운 공명 장치”이자 “현재적 아카이빙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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