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호] 격렬한 저항의 자원, 우리들과 '정동의 힘' / 강부원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6 12:36
조회
3033
격렬한 저항의 자원, 우리들과 '정동의 힘'
『정동의 힘』 서평


강부원(성균관대 국제한국학센터 연구원)


* 이 글은 2016년 2월 21일 인터넷신문 미디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416


이토 마모루의 <정동의 힘>은 새롭게 재편되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추수해 현상을 설명하는 단순한 정세 분석서가 아니다. 이 책은 미디어의 홍수가 만들어내는 환상에 취해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려치는 벽력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본과 권력의 네트워크 기만과 디지털 조작에 허우적대는 우리들의 정치적 패배 의식을 향한 단호한 반격이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정동의 힘(Affective Power)’이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작용이 빚어냈던 고전적인 문화적 효과를 넘어서 정치적 변화와 사회적 실천이 신체의 운동과 통합적으로 매개되어 있는 ‘동기’인 동시에 ‘결과’ 전체를 가리킨다. ‘미디어적 전회(Medial Turn)’ 혹은 ‘정동적 전회(Affective Turn)’라고도 불리는 이와 같은 격렬한 진동을 이 책에서 ‘미디어와 공진(共振)하는 신체’로 표현하고 있다.

마모루가 미디어를 바라보는 관점은 기본적으로 ‘사이’와 ‘매개’로서의 역할이라는 전통적인 미디어론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개념은 고전적인 미디어론의 지평을 넘어 직접적인 사회 변화를 초래하는 운동성의 개념으로 확장된다. 과거와는 달리 노트북이 놓인 책상은 광장이 되고, 손에 쥔 스마트폰은 횃불이 된다. 이제 네트워크는 단순한 정보의 유통 경로가 아니라 운동의 현장이자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다.

마모루는 브라이언 마수미와 가브리엘 타르드의 정보와 미디어 해석을 전유해 와 ‘공중’과 ‘집합적 주체’의 정치적 가능성을 더욱 풍요롭게 일구어냈다. 미디어를 통해 생산되고 전파되는 정보는 이제 스스로 생성하는 힘으로 작용되는 자기귀결적 에너지를 응축한 정동의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정동으로 촉발된 신체의 운동은 패턴뿐만 아니라 방식과 형태마저 모조리 뒤바뀌었다. 그러한 운동을 실현하는 신체야말로 새로운 미디어의 주역이자 첨병이다.

마모루의 미디어 이해를 보고 있자면 그가 더없이 비관적인 염세주의자는 결코 아니지만 무조건적인 낙관론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에게 이미 당면한 파국은 물론 앞으로 도래할 불안한 미래까지도 기꺼이 떠안아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에 기댄 가혹한 선언처럼 보인다. 실제로 지금까지 미디어는 우리의 마음과 신체에 온갖 역사적 패배의 기억과 잔혹한 현실 정치의 실패를 각인해 왔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동성의 폐쇄회로 때문에 우리의 신념은 쉽게 파쇄되고 신체의 운동은 섣부르게 정지되었으며 종내에는 사회의 변화마저 가로막혔다. ‘불가피한 불가능’이란 악무한의 미디어 조건이 정치적 변혁은커녕 현상유지조차 이어가기 어렵게 만드는 끝없는 수렁이자 함정이 되었다.

하지만 마모루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개념에 대한 창발적 갱신을 주도한다. ‘지금’ ‘여기’의 미디어를 통해 우리들이 얻게 되는 정보란 ‘주체’와 ‘대상’ 사이의 차이를 무화시키며 ‘사고’와 ‘행동’마저 서로 분리되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비물질적 총체이다. 즉 정신, 인지, 감정을 통합하는 정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새롭게 변환된 정보들의 복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정치 변혁과 사회 재편이라는 실천 의지를 작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정보는 운동하는 신체를 격발케 하는 힘으로 자리매김 한다.

결국 마모루는 자본과 권력이 행사하는 미디어 횡포가 심각하게 우려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야말로 그간 고장난 미디어 장치와 그 잔혹한 그물에 모두 완전하게 포박되진 않았다고 역설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정동적 전회의 주역이 바로 ‘우리’가 될 수 있음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억압과 통제의 견고한 성벽 밖으로 파선을 그어가며 호를 넓혀 진출할 수 있는 존재들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신자유주의적 질서 하에서의 자본과 권력이 펼쳐놓은 그물에 붙들리듯 매달려 있는 가혹한 처지인 듯 보인다. ‘우리’는 스스로 ‘잉여’ 혹은 ‘루저’라고 부르는 대단위의 낙오자들이다. 시민 사회의 오랜 전통에 따르면 ‘우리들’을 ‘소시민’ 혹은 ‘사회적 약자’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마모루가 보기에 이미 점령된 것처럼 보이는 ‘우리들’의 변화무쌍은 마치 그물에 걸린 바람과도 같이 자유롭다. ‘우리’야 말로 미디어의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지 않는 새로운 변혁의 가능성과 희망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는 정동의 실현체이다.

미디어와 공진하는 ‘우리들’의 신체는 ‘잡스러움’과 ‘진지함’을 가리지 않으며, ‘전문성’과 “덕력”이 구분되지 않는 혼재된 잠재성(virtuality)을 기반으로 단련되었다. 마음이 신체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신체화된 마음’이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이제까지 능동적인 주체가 수행했던 변혁을 향한 역사 속의 운동을 계속 모방하거나 기대만 할 것이 아니라 디지털 네크워크의 리듬과 현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표출되는 새로운 저항의 자원들로 스스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사실 혼란한 미디어 전환기의 주역이 누구인지, 혹은 미디어적 전회의 전면에 누가 서야할지를 정하는 문제는 중요치 않다. 오히려 다종다기한 미디어들의 갱신과 경합을 통해 새롭게 창출하는 ‘미디올로지’의 효과와 ‘우리들’의 정동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는지를 주목하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우리들’의 네트워크가 되어가는 미디어의 사회적 효과와 그 정치적 실천의 양상을 세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스스로 창안하고 때로는 그 모든 것을 뒤엎어가며 발신하는 새로운 신호와 움직임을 예민하게 포착해야 한다.

“진짜 세상은 키보드 밖에 있다”며 ‘우리들’을 냉소하는 보수우파의 젊은 정치가가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미디어 장치가 바로 키보드라는 사실을 알아채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과 동일한 플랫폼을 공유하면서도 자본의 우위를 통해 더 세련되고 교묘한 미디어 전략을 가동할 수 있는 그들의 말잔치에 놀아나선 안 된다.

미디어 조작과 여론 유도를 통한 지배와 억압은 특수한 사태의 돌연한 발생이 아니라 통제된 미디어에 예속된 시민들이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재난과 파국이다. 자본과 권력의 연막에 휩쓸리듯 미디어가 저당 잡혀 있다면 ‘우리’는 계속 저항해야 한다. 저항의 자원은 이미 우리의 네트워크 속에 정동의 형태로 공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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