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이미지와 환상_4장 형태가 그림자로

작성자
keenist
작성일
2018-12-15 12:38
조회
691
4. 형태가 그림자로 - 와해되는 형태

Ⅰ. 18-19세기 민주주의 혁명과 19-20세기 그래픽 혁명의 도래로 예술과 원본(original)의 부동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술을 접할 수 있으려면 작품들은 모든 사람에게 이해되고 거부감 없게 만들어져야 했다. 민주주의는 보통교육을 추구했고 문학작품은 국민 누구에게나 읽힐 수 있는 교과서로 채택되었다. 작품은 교과서로 재편집되기 위해 검열을 당했다. 난해하거나 비종교적이고 부도덕한 내용은 축약, 삭제 되었다. 여기에 그래픽 혁명, 종이・인쇄・제본 기술의 발달이 가세했다. 대량생산과 원본을 뛰어넘는 선명한 재현은 독창성(원본)에서 대중성(복제품)으로 예술적 가치의 무게중심을 옮겨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와 TV가 등장했다. 문학작품은 이제 스크린과 스테이지를 위한 스크립트가 되거나 그래픽으로 재현하기 어려운 내면 세계로 침잠했다.

Ⅱ-Ⅲ. 정보를 제공받고 공공 관심사에 참여하는 시민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퍼졌다. 더불어 세상의 변화와 위협 그리고 과학 발전의 속도가 자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자 사람들은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이 문제의 해답으로 요약본(digest)이 등장했다. 민주주의가 번창하고 문맹률이 낮아진 20세기 미국에서 요약본은 정보가 필요한 시민들에게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도구는 곧 목적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등장 이후 원본을 요약하는 일은 독자들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을 알게 하고 결과적으로 원본으로 안내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다이제스트> 자체가 목적이 되었고 원본 기사나 논문이 요약을 위해 가짜로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요점만 요구하는 현상은 정보 제공의 형태 뿐만 아니라 학문의 형식과 절차도 바꿔놓았다. 자연과학 분야는 쏟아지는 막대한 정보를 빠르게 제공하기 위해 ‘자동초록’을 요약해주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논문에 실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사전인쇄’ 방식을 개발했다.

Ⅳ-Ⅵ. 책도 마찬가지였다. 원본 하드커버는 종이 표지 보급판(paperback)으로 재판(再版)되었다. 종이 표지 보급판은 원본의 핵심을 추려낸 초록이거나 상품성을 가늠하기 위한 사전인쇄물의 역할을 했다. 잘 팔리는 소설들이 종이 표지 보급판으로 대량유통되었다. 원본 하드커버는 확실한 이윤이 보장될 때 추가로 출판되거나 종이 표지 보급판에 신빙성을 더하고 ‘책을 유명하게 만드는’ 마케팅 전략이 되었다. 영상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책을 유명하게 만드는 건 책이 아니라 책을 원작으로한 영화가 되었다. 문자는 영상(이미지)보다 까다로웠다. 이미지는 생생해서 즐겁고, 독해할 필요성이 적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미디어였기 때문에 쉽게 빠져들 수 있었다. 영화가 보편화되자 무형의 세계를 유형의 이미지로 매끄럽게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해졌다. 해결되지 않는 모호한 진실(소설)보다 엔딩이 명확한 환상(영화)이 본질에 더 가깝게 여겨졌다. 1930년대 영화산업을 부흥을 맞았고 영화판권 가격은 급등했으며 작가들은 병에 걸렸다. 한쪽 눈으로는 타이프라이터를 쳐다보면서 다른 한쪽 눈으로는 할리우드를 쳐다보느라 눈알이 고정되지 않고 수시로 돌아가는 ‘안진증’을 앓았다. ‘표현된 단어와 형태가 하나다’라는 문학의 근본 개념은 점차 옅어졌다. 소설은 콘티가 되었고 소설적 형상화는 극적 긴장감을 유발하기 위한 스펙터클로 대체되었다.

“이런 태도는 예술의 진수인 이야기 구성을 되찾기 위해 없어져야 한다. 그래서 책과 같은 인쇄물을 사진으로, 영화로, 라디오와 TV로 이미지를 증폭시키는 일은 문학적이고 드라마적인 사람들의 경험을 어중간한 림보처럼 만드는 것이다. 그 림보에는 형태는 없고 형태의 유령만 있다.” (209)


Ⅶ-Ⅷ. 예술을 와해시킨 또 다른 범인은 ‘스타 시스템’이었다. 영화탄생과 동시에 생긴 것은 아니지만 스타 시스템은 영화가 상업화된 1910년대, 가짜 사건적 징후가 짙은 환경에서 등장했다. 유명세와 임금이 비례했기 때문에 제작사는 스타의 이름이 유명해지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들의 우상들이 이름을 밝히고 신격화되길 원했다. 이 신은 모태부터 스타가 아니었다. 기회와 우연에 의해 캐스팅된 신이었다. 강한 개성보다 보편적으로 소비되는 매너 혹은 육체적 용모가 스타의 선전 요소였다. 누구나 기회를 잡으면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민주주의의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인간 가짜 사건을 만들어내는 스타 시스템은 스타의 인기가 문학, 희곡, 영화 등 드라마적인 모든 예술 형태를 지배하게 했고 그 예술적 형태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스타 시스템은 작품보다는 사람에 초점을 맞췄다. 베스트셀러라는 말의 용례 역시 이를 반영한다. 셀러는 사람을 뜻하지만 베스트셀러는 잘 팔리는 책을 의미한다. 베스트셀러,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책들의 유명인사다. 출판계의 스타 시스템이다. 사람들이 유명인을 원하고 유명인이 벌이는 가짜 사건을 원하듯이 베스트셀러와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원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인공적인 성격에는 관심이 없다. 가장 많이 광고되었고 광고할 거리가 있느냐, 대중들이 보기 원하는 자질을 갖추었느냐가 관건이다. 베스트셀러의 인기는 거울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 밖을 쳐다보는 일이 아니라 익숙한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거울에 비추는 일이 되고 있다.

Ⅸ-Ⅹ. 거울의 성능이 중요해졌다. 재현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원본보다 재현된 복제품의 품질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세련된 컬러인쇄기술과 광각렌즈사진 기술은 낡아버린 원본 피사체를 생생하게 살아있는 복제품으로 바꿔 놓았고 사람들은 기술의 창조적 조작에 매료되었다. 더구나 카메라만 있으면 누구나 셔터를 눌러 고유한 자기만의 순간을, 불변의 원본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므로 사진은 자기도취의 수단이 되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사진을 카메라라는 기계가 찍듯이 음악은 스피커가 들려준다. 녹음기에 녹음되어 스피커로 재생되는 음악은 현장의 음악 연주보다 생생하다. 단지 스위치를 돌리는 것만으로 녹음된 오케스트라를 우리집 거실에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우리집 거실에 얼마나 더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재생할 수 있는가, 녹음 기술 자체가 예술의 척도가 되었다. 언제 어디에서나 내가 원할 때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자 작곡가의 개별적인 스타일의 표현보다 내 기분과 분위기가 중요해졌다. 시간과 장소에 맞는 기능적인 배경음악, 음악적 가짜 사건이 도처에서 흘러나왔다. 음악은 원래 의도된 대로 연주되지 못하고 단지 개인적인 무드나 상업적 이미지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Ⅺ. 예술작품들은 가능한 다양한 형태로 변하면 변할수록 그 형태들은 모호하고 유령같이 변한다. 문학, 드라마, 음악 상품을 판매해서 돈을 번 사람들은 대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손실을 초래할 정도로 과감하지 않게 원본을 변형시키고 이를 반복하는 공식을 이용하고 있다. “가짜 사건이 만연한 다양한 형태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미적 기준은 ‘베스트셀러는 베스트셀러이고 또 베스트셀러이다’라고 요약될 수 있다.“ 이제 ”인간의 경험은 집이 아니라 그 집의 실내장식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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