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호] 『예술인간의 탄생』 서평 | 김진호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5 23:28
조회
1440
『예술인간의 탄생』 서평


『예술인간의 탄생』 서평


김진호(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


* 이 글은 2015년 3월 31일 문화연대 소식지 『문화빵』 57호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culturalaction.org/xe/1127513?l=ko


조정환의 저서 <예술인간의 탄생>이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나에게 떠오르는 저서가 하나 있었다. 엘렌 디사나야케의 <미학적 인간Homo Aestheticus>(예담, 2009)이다. 인간의 예술적 성향이 문화적인 것이라기보다, 종(種)적인 것, 즉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쓰였다고 한다. 진화론은 영국의 과학자 찰스 다윈이 주장한 이래로 다양하게 발전되고 있다. 진화심리학은 인간과 동물의 몸에 대한 진화론적 방법론을 인간과 동물의 뇌와 마음에 적용한 것으로, 다양하게 발전된 진화론의 한 갈래이다. 나는 디사나야케의 <미학적 인간>이 진화론과 진화심리학의 좋은 가르침에 충실히 기초해서 잘 쓰인 책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녀의 <미학적 인간>의 핵심 주장이 왠지 모르게 가볍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디사나야케는 인간에게는 미학적인 본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본능의 내용이 본능의 소지자인 인간 자신이나 인간의 주위 환경을 ‘잘 꾸미고 특별화하는 성향’이라는 것이다. 이런 성향이 많은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성향으로부터 예술이 탄생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성향이 오늘날의 예술 진화의 동력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무엇을 꾸미고 어떻게 특별화한다는 것인가. 내용이 빠진 특별화하는 작업으로서의 예술이라, 나에겐 너무나 가볍게 보인다.

많은 진화론적 예술학자들이 예술의 기원과 예술적 본능, 그것의 신경적 기반을 찾아 나서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자들은 털이 빠져 아이가 더 이상 잡을 데가 없는 알몸의 어머니가 견과류 등을 채집하면서 아이를 잠시 주변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고, 그 상황에서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르는 자장가를 음악적 본능의 뿌리로 본다. 혹은 털 고르기(그루밍)를 통해 사회적 유대를 확인하던 원숭이들이 털이 빠지면서 더 이상 털 고르기를 하지 못하게 되자 발명한 것이 노래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흥미로운 주장들은 우리의 음악적/예술적 시야를 넓혀준다. 또 음악과 예술이 원래부터 모종의 실용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을 개진함으로써,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한 음악’과 같은 전통 예술의 이데올로기적 허상을 벗겨내는 긍정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런 진화론은 학문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점점 더 복잡해지는 예술적 상황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비춰주거나 암시해주는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진화론과 진화심리학의 시야의 방향이 과거에 쏠려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럼에도 진화론은 중요하고 무시할 수 없다. 진화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진화론적 용어 혹은 표현을 한두 번 들어봤을 것이다. 그것은 “Homo”이다. 인간을 동물의 한 종으로 분류할 때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학명을 쓴다. 지구상의 대략 70억 명의 인간들 ‘모두’가(대다수가 아니다!) 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한 종(種/specie)으로 분류된다. 즉 지구상의 인간들은 다양한 외모와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 모두는 호모 사피엔스, 즉 현명한(sapiens, 라틴어) 사람(Homo, 라틴어)들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용어는 우리 스스로를 하나의 종으로, 다른 동물의 일원으로 격하시키는 표현일 수 있다. 우리 자신을 묘사하고 정의내리기 위해 이 용어를 택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동물과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용어를 책 제목의 일부로 사용한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동물을 이해하는 일로부터 분리된 작업이 아니라는 점을 공공연하게 표방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진화론자들이 다윈과 그의 후배들처럼 인간을 동물과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은 존재로 보고 있지는 않다. 명시적이건 묵시적이건 동물과 인간의 명백한 차이를 강조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진화론자들도 있다. 그리고 이런 연구자들은 이제 사회적 진화, 문화적 진화라는 개념들을 제안하고 발전시킨다. 내가 보기에 조정환의 길은 이 길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조정환은 ‘예술인간’ 개념을, ‘경작인간’, ‘노동인간’, ‘국가인간’, ‘경제인간’ 등의 개념들에 이미 잠재해 있는 어떤 것들을 발견하여 발전시키면서 제안하고 있다. ‘경작인간’, ‘노동인간’, ‘국가인간’, ‘경제인간’ 등의 개념들은 앞에서 내가 말한 “Homo -”의 표현들을 빌려 쓰고는 있지만, 사실 진화론적 용어들은 아니다. 이 용어들은 그래서 자연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만 진화론을 넘어선다.

거의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진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최소 수 만 년이라는 긴 세월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언어적 본능과 음악적 성향을 종적 성향으로 프로그래밍하고 키워나간 것도 수만 년에서 20만 년에 이르는 긴 시간 단위 속에서 진행되었다. 빛에 민감한 피부의 특정 부위가 눈이 되고, 진동에 민감한 부위가 귀가 되는 진화는 그보다 더 긴, 수억 년 단위의 세월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수백 년 단위의 짧은 기간은 인간을 진화시키지 못하는가. 그런 점에서 인간의 진화가 오래 전에 멈추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일반 통념이었다. 오래 전이란 대강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지구 곳곳으로 퍼져나갔던 5만 년 전 이전이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어디나 똑같다는 것, 즉 인류의 ‘심적 동일성’을 암시한다. 미국의 과학자와 인류학자인 그레고리 코크란과 헨리 하펜딩은 자신들의 저서 <1만 년의 폭발>(글항아리, 2010)에서 최신 유전학의 도움을 받아 이런 통념이 틀렸고,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옛날보다 100배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빠른 소진화(micro-evolution)는 인간을 서로 다른 인간들로 진화시켰다. 이러한 진화는 원래 가지고 있던 기능을 버리거나 강화하고 조정하기만 하면 되는, 얕은 변화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이 ‘경작인간’으로부터 ‘노동인간’으로, 다시 ‘국가인간’과 ‘경제인간’으로, 마지막으로 ‘예술인간’으로 진화하였다면, 이것은 상술한 소진화에 해당할 수 있다. 나는 사실 인간이 서로 매우 다르다고 생각하며, 심적 비동일설을 믿는 편이다. 그 근거는 이렇다. 한편으로는 조정환이 말하는 바로서의 ‘예술인간’을 극도로 싫어하고, 적개심을 표하는, 전통적 의미의 예술을 전문적으로 하는 인간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과 (조정환이 말하는 바로서의 ‘예술인간’을 옹호하는 쪽인) 나 사이의 차이가 꽤 크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내 생각에, 대화로 풀어가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다. 아서 단토가 예술의 종말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예술의 종말이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도, 들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수많은 자칭 예술가들이 있다. 이들과 나의 차이가 네안데르탈인과 우리 조상 호모 사피엔스의 차이보다 더 큰 것 같다. 참으로 유감이다.

네안데르탈인들은 빙하기의 수만 년 동안 유럽에서 성공적으로 생존해 왔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멸종했다. 멸종해야 할 이유가 많았다. 나는 조정환이 자신의 책에서 잘 설명해준 것처럼, 전통적 예술은 오로지 루카치가 말한 대로 “예술에 대한 자본주의의 적대성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인간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잠재력이 예외적이고 소수적인 방식으로 살아남을 수 있고 그것이 소수의 위대한 작가들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는” 조건하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은 경우 전통 예술은 언젠가는 멸종할 것이라고 믿는다. 멸종은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전통적 예술이 가지는 많은 단점들 때문이다. 여러 단점들 중에서 한 가지만 지적하고 서평을 끝내고자 한다. 전통적 예술은 정치적인 메시지가 없거나, 최소한 없는 것으로 읽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치적 메시지가 없는 예술은 누구나 예술가인 시대에, 즉 예술인간이 탄생하고 진화하는 이 시기에, 그 예술인간의 콘텐츠가 될 수 없다. 정치란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시키는 구체적 방법이거나 그런 방법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일 수 있다. 그런 것으로서의 정치적 메시지가 빠진 예술은 우리네 삶에 큰 도움이 안 된다. 아, 한 가지 도움은 된다. 그런 예술을 함으로써, 그런 예술을 하는 지도교수의 눈도장을 찍을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어렵게 예술대학의 교수 자리 하나 얻을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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