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고원발제

작성자
floor
작성일
2019-03-02 15:36
조회
541
틀림없이 우리는 모든 경우에 영토성, 탈영토화, 재영토화의 요인들을 동시에 작동시켜야 한다. 리트로넬로는 본질적으로는 영토적인 것이라서 동물과 아이의 리트로넬로도 영토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음악에서는 리트로넬로를 점령해서 그것을 탈영토화하고 나아가 <목소리를 탈영토화>할 때 비로소 그것은 화성이나 선율의 좌표계를 가로질러 음악으로서 자신의 내부에서 재영토화 될 수 있다. 동물의 리트로넬로조차도 탈영토화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특수한 재영토화 없이는 탈영토화가 있을 수 없기에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 사이에 상관관계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 어떤 흐름도, 그 어떤 분자-되기도 그램분자적 형성체에서 벗어나려면 그램분자적 성분들이 동반되어야 하며, 지각 가능한 통로나 좌표를 형성해야 한다.

목소리를 기계화함. 이는 음악의 여성되기와 아이되기이다. <목소리의 기계장치라는 음악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거대한 이원적 기계, 즉 “남자나 여자”에게 목소리를 분배하는 그램분자적 구성체의 소멸을 함축하고 있다. 여성이나 남성이 아닌 목소리 자체가 여성-되기나 아이-되기가 되어야 한다. 음악적 목소리 자체가 아이-되기가 된다. 이것은 이중적이라서, <목소리는 아이-되기 속에서 탈영토화>되지만, 목소리가 생성한 <아이 자신도 탈영토화>되어 출생하지 않고도 생성하는 것이다.

음악의 동물-되기에서도 이와 같은 지그재그운동을 발견한다. 음악 블록이 동물-되기를 내용으로 가지려 하면 동물도 그 속에서 동물이 아닌 것, 즉 밤, 죽음, 기쁨 등과 같은 뭔가 절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음악은 이러 동물-되기 속에서 탈영토화되고 음악인은 동물(ex.새) 속에서 탈영토화된다. 물론 동물(ex.새) 자신도 탈영토화되고 변모한다. 에이허브 선장이 모비딕과 함께 고래-되기에 말려들고 모비딕도 순수한 성벽이 되는 것처럼.

어떠한 예술도 모방적일 수 없다. 모방은 스스로 붕괴하고 만다. 실제로는 모방은 <되기>로 스며들어가고 만다는 의미이다. 모방하는 자는 자신도 모르게 생성에 들어가며 이 생성은 자신이 모방하는 것의 부지불식간의 생성과 결합한다. 화가나 음악가는 동물을 모방하지 않는다. 화가나 음악가는 동물이 되며, 동물도 화가나 음악가가 바라는 것이 되며 그들은 가장 깊은 곳에서 그렇게 자연과 공모하는 것이다.

생성, 곧 되기는 언제나 둘을 통해 진행된다. 곧 생성하는 대상도 생성하는 자 못지않게 중요하다. 생성, 되기는 본질적으로 유동적이며, 한 점에서 기우러져 자신의 폐쇄성을 반쯤 열며서 두 변을 잇는 사선을 생산하는 정방형의 블록을 만든다. 이에 반해 <모방>은 원형에서 정점에 달하는 항들의 유사성이나 상징적 질서를 구성하는 관계들의 일차 구조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되기>는 이런 구조로 환원되지 않는다. 곧 생성은 모방이 아니다. 히치콕이 새를 만들 때 새의 외침을 재생산해내지 않는 것처럼. 타란텔라의 춤은 물린 희생자를 상정하고 그를 치유하거나 재앙을 풀기 위한 춤이지 독거미와 동일화되기의 춤은 아닌 것처럼. 모방은 단지 생성의 블록을 조정하기 위해 개입할 뿐이지 중요한 모든 것은 다른 데서 일어난다. 다시 말해 동물은 색과 음을 같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화가나 음악가가 그 색-되기와 음-되기에 기다리지도 않는다. 탈영토화의 성분들을 통해 색-되기와 음-되기에 들어가기를 기다리지도 않기 때문이다.~p578

순수한 질(ex.색, 음 등)은 우리가 보기에는 여전히 점 체계이다. 단지 상기일 뿐이다. 이와 반대로 기능주의의 입장은 이 질을 고려할 때 그것이 정확히 어떤 배치물에서 수행하는 기능만을 고려한다. 곧 질은 그것을 파악하는 생성 안에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가령 색인 white는 화가나 에이허브 선장의 동물-되기일 수 있는 하나의 <동물-되기 안에서 파악>된다. 동시에 동물 자신의 색-되기, 흰색-되기 안에서도 파악된다.

<색, 실루엣, 동물 등>같은 질은 탈영토화의 성분을 함축하는 부부-되기 와 사회적으로-되기의 지표이다. 하나의 질은 어떤 배치의 탈영토화의 선으로만, 또는 어떤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가는 경우에만 기능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동물-블록은 회상과는 다르다. 카프카의 작품에서도 질은 그 속에서 탈영토화하고 또 탈영토화의 선을 부여하는 하나의 배치를 바로잡는다. 그렇게 해서 유년기의 종탑은 성탑으로 옮겨가고, 성탑을 식별 불가능성의 지대의 층위에서 붙잡아 도주선 위로 내던져진다. 프로스트에서 이것이 덜 복잡한 이유는 상기 혹은 환상의 분위기를 그는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서도 역시 기능적 블록은 한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아이-되기와 여성-되기로, 탈영토화의 성분으로 작용한다.

탈영토화의 제 5정리. 탈영토화는 동시에 생성하는 대변수와 소변수의 공존을 함축하기 때문에 <탈영토화는 언제나 이중적>이다. 생성에 두 항은 자리를 바꾸지도 동일화하지도 않고 비대칭적인 블록으로 끌려들어가며, 거기에서 한 항은 다른 항 못지않게 변화하며 또한 그것은 두 항의 근방역을 구성한다.

제 6정리. 비대칭적인 이중적 탈영토화는 탈영토화하는 힘과 탈영토화된 힘을 부과할 수 있다. 동일한 힘이 해당 “계기” 나 양상에 따라 <한 값에서 다른 값>으로 옮겨가더라도 말이다. 가장 덜 탈토화된 것이 가장 탈영토화를 재촉하고 가장 탈영토화된 것은 가장 덜 탈영토화 된 것에 한층 더 반작용한다.

제7정리. 탈영토화하는 것은 표현 역활이나 내용 역할을 상대적으로 할 뿐이다. 그런데 내용은 표현과 더불어 비대칭적인 블록을 만들기 때문에 외부와는 관련이 없고 어떤 근방에 담겨져 있다. 근방에서 표현과 내용의 구별은 타당하기를 멈추며 <탈영토화는 표현과 내용의 식별 가능성>을 창조한다. 예컨데 음악적 표현의 형식인 음의 사선, 순수하게 음악적인 내용, 리토르넬로로서의 여성-되기, 아이-되기, 동물-되기 등.

제 8정리. 탈영토화의 힘과 속도는 각 배치가 다르다. 따라서 해당되는 생성의 블록들과 추상적인 기계의 변이들에 따라 매번 지수나 계수를 달리 계산한다.

성악에서의 여성-되기와 아이-되기. 페르난데스는 이런 면에서 베르디와 바그너를 비난한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요청에 영합함으로써 이항 기계를 복원하였다. 목소리를 성별로 나누고 각각이 제 나름의 목소리를 가지기를 바랬다. 목소리는 단순한 악기 반주의 동반으로 그 자체가 기계화되지 못했다. 그래서 목소리는 더 이상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 표현의 지층 또는 표현의 선이기를 그쳤다. 그러나 음악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탈영토화의 새로운 문턱>을 뛰어넘는다. 그 문턱에서 목소리를 기계화하는 것은 악기이다. 거기서 목소리와 악기는 동일한 판 위에서 대결관계로, 혹은 대행관계로, 때로는 교환이나 보충 관계로 옮겨간다. 목소리와 피아노를 동일한 고른판 위로 데려가고, 피아노를 착란의 악기로 만든다. 이런 일은 슈만의 가곡에서 일어난다. 음악을 변용하는 가장 일반적인 운동, 즉 <음악 기계의 느린 변이>가 문제가 된다. 특정 작곡가의 문제가 아니다. 음악에는 언제나 좌표 노릇을 하는 그램분자적 체계가 있다. 그래서 목소리도 남녀 양성의 이항적 분배가 자꾸 일어난다. 재영토화가 자꾸 일어난다.

<목소리의 탈영토화>라는 새로운 문턱과 함께 대두되는 핵심적인 문제는 목소리마저도 악기가 되는 <목소리의 분자-되기>이다. 물론 여성-되기와 아이—되기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말이다. 생산된 것은 이미 분자적 아이, 분자적 여성… 이었다는 진리! 드뷔시의 작품이 그러하다. 아이-되기와 여성-되기는 너무나 강렬하여 동시에 모티브의 분자화와 분리될 수 없는 분자화가 일어난다, 그것을 되찾는 경우에 그렇다.

새는 여전히 중요함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곤충이 새보다 더 분자적이다. 곤충-되기는 새-되기를 대체했다, 모든 생성은 분자적이라는 진리를 이해시키는데 곤충은 새들보다 더 가깝게 근접해 있다. 분자적인 것은 원소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을 소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분자적인 것이 형식을 해체한다. 이러한 형식의 해체는 가장 다양한 경도들과 위도를, 가장 다양한 빠름들과 느림들을 관계시키며, 자신의 형식적 한계를 훨씬 넘어서까지 변주를 확장시킴으로써 하나의 연속체를 훨씬 넘어서까지 변주를 확장시킴으로써 하나의 연속체를 확보하는 것이다. 음 분자(블록)은 다양한 속도의 관계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배치된 여러 원소들 속으로 해리될 뿐만 아니라 전 우주에 퍼지는 음 에너지의 파동이나 흐름처럼 미친듯한 도주선으로서 작용한다.

메시앙은 다양한 반음계적 지속들을 현전시키고 통합시켰으며, “별들과 산들의 무한히 긴 시간이 곤충들과 원자들의 무한히 짧은 시간 사이의 관계라는 관념을 시사하고자 최대의 지속과 최소의 지속을 서로 바꾼다. 우주의 권력은 (….) 무엇보다도 리듬의 작업에서 온다. 음악가가 새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 원소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을 발견해주게 해 주고 그것이 블록, 우주의 섬유, 사선 또는 복합 공간을 만든다. 음악은 분자적 흐름들을 발송한다. 우주, 코스모스 모두가 리토르넬로 로 만들어졌다.

① 음악에서는, 자연을 가로지르는 탈영토화의 역량이 중요하다. ②인간에게서는, 음악적이지 않은 것이 중요하고 ③ 자연에서는, 이미 음악적인 것이 문제가 된다. 인간은 단지 덧코드화에 능할 뿐이다. 이제 인간은 인간의 비음악적인 음과 음의 음악-되기는 함께 블록을 만드는 지점까지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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