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호](연재) 종합적 사회과학자로서의 니체-6:니체와 정치학

기고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3 15:01
조회
810
니체와 정치학

김상범


1.

니체가 의미하는 '강자'와 '약자'는 무엇인가? 이것은 단순히 현실적인 권력이 있고 없음에 의해 답이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니체의 '강자'는 현재 권력이 있는 자가 아니라 권력을 가져야할 사람이고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니체의 '강자'는 독립적인 자이고 '자유정신'을 가진 자로서 진정으로 습속, 타인의 인정, 원한 등에 얽매이지 않는 자이다.

"독립이란 극소수의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이며 강자의 특권에 속하는 것이다. 아무 거리낌 없이 아주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이라면 강한 인간일뿐만 아니라 무모하리만큼 대담한 인간이다."(<선악을 넘어서>, §29)

이러한 강자는 "홀로 설 수 있는 능력"과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 <선악을 넘어서>,§41)을 가졌기에 진정으로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이다. 반면에 약자,혹은 무리동물은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하기에 홀로 설 수 없는 자이고, 원한에 얽매인 자이며 사실상 "양심이란 형식을 빌린 복종"(<선악을 넘어서>,§199)에 익숙한 자로서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부모, 선생, 법률, 계급적 편견, 여론"등에 얽매여 있는 자이다. 그래서 이러한 약자들은 지배하고 명령할 권리가 없다.

백승영은 '주권적 개인'을 '주인'이나 '강자'와 등치시키면서, 이러한 주권적 개인=주인=강자만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등식은 매우 올바르며 이러한 주권적 개인만이 그러한 특권을 누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니체의 사상을 올바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주권적 개인은 어떠한 사람인가?

그것은 나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인간 내부에서 들끓는 욕망과 충동을 '관리'하고 '이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무의식적 이성'을 갖춘 사람이다. 백승영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내부는 수많은 충동과 욕구들이 갈등하고 있는 긴장체다. 거기서 내적 카오스 상태나 자기분열이 일어나지 않고 질서가 구현되는 것은 바로 그 긴장을 지배하는 힘이 있다는 증거다."(백승영, <니체-건강한 삶을 위한 긍정의 철학을 기획하다>(한길사, 2011),p.181)

그리고 이러한 힘을 나는 '무의식적 이성'이라고 부른다. 주권적 개인은 '무의식적 이성'이 발달되어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고, 따라서 홀로 설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백승영은 이러한 존재를 "자신의 자연적 본성을 억압하고 희생시키는 주체이자, 동시에 그 억압과 희생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잘 못된 것이다. 이렇게 본능 위에 폭군처럼 군림하는 '무의식적 이성'을 가정하는 것은 또다른 '소크라테스주의' , 즉 '무의식적 소크라테스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더 많은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아테네 귀족들의 배후를 꿰뚫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우가, 자기와 같은 특이한 경우가 이미 예외적인 경우가 아님을 파악했었다....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전세계가 그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수단, 그의 치료, 그 자신의 개인적 자기보존 수법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여기저기에서 본능들이 아나키 상태에 놓여있었다..."충동들이 폭군 노릇을 하려 한다; 그러니 그것보다 더 강력한, 그것에 대적적인 폭군을 하나 고안해내지 않으면 안된다"......소크라테스가 했던 것처럼 이성을 폭군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면, 다른 어떤 것이 폭군이 되는 위험도 분명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우상의 황혼> ,'소크라테스의 문제', §9~10)

백승영의 니체-해석에서는 '충동과 욕구들의 갈등과 긴장을 지배하는 힘'(나의 표현대로 하자면 '무의식적 이성')이 본능 위에 군림하는 일종의 폭군이며, 이런 것이 폭군이 되는 위험도 분명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니체의 '주권적 개인'에서의 '무의식적 이성'은 자연적 본성을 포함한 인간의 욕망이나 충동을 억압하거나 희생하지 않으나 이러한 욕망이나 충동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이용'함으로써 '지배'한다.

이러한 ‘무의식적 이성’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생성되며, 또한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작동되기도 한다. 강자들의 '무의식적 이성'은 강자들“서로간의 태도에서 고려, 극기, 온정, 신의, 긍지, 우정”이 나타나게 만든다. 그러나 ‘무의식적 이성’은 이렇게 공격성과 폭력성을 억제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적 이성’은 이렇게 가슴 속에 응어리지는 것을 풀도록 명령할 때도 있다.

“이러한 숨겨진 밑바탕에 깔린 응어리는 때때로 발산될 필요가 있다.”(<도덕의 계보학> 제 1논문 §11)

그리고 이러한 ‘발산’을 니체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들이 외부로 눈을 돌려 낯선 것, 낯선 지역이 시작되는 곳에서는 고삐 풀린 맹수보다 그리 나을게 없다. 그들은 그 곳에서 온갖 사회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공동체의 평화 속에 오랫동안 갇히고 둘러싸여서 생긴 긴장을 황야에서 푼다. 그들은 일련의 소름끼치는 살인, 방화, 능욕, 고문을 저지른 후 방자하고 태연자약하게 발걸음을 돌리며 즐거워하는 괴물처럼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맹수로 되돌아간다.....이러한 고귀한 종족의 밑바탕에는 맹수, 즉 먹이의 승리를 찾아 탐욕스럽게 헤매는 화려한 금발의 야수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도덕의 계보학> 제 1논문 §11)

2.

이렇게 니체는 인간의 '동물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것은 능동적인 성질을 의미하기 때문에, 코제브와 아즈마 히로키의 수동적인 '동물' 개념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코제브와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이라는 개념을 니체가 말하는 ‘가치의 관점’에서 보면 흥미롭다. ‘동물’은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허무주의적인 현대성을 보여주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동물’ 또는 ‘최후의 인간’은 니체의 또 다른 개념으로 보자면 똑같이 ‘수동적 허무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두 개념은 ‘거대서사의 몰락’ 혹은 ‘최고 가치들의 탈가치화’ 이후의 인간의 모습을 비슷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거대 서사의 몰락’과 ‘최고 가치들의 탈가치화’는 서사와 가치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작은 서사’, ‘작은 가치’들이 난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작은 서사’, ‘작은 가치’들의 난립은 인간을 분열시킨다.

실제로 아즈마 히로키는 현대의 ‘동물화’된 인간들이 ‘다중인격'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고 있다. 니체는 이러한 개인을 생산해내는 ‘현대적 혼란상’을 다음과 같이 그려내고 있다.

"이리하여 가치나 목표의 종합(모든 강력한 문화는 이것에 기초해 있다)이 해체되고...."(<권력의지> §23 강조는 인용자)

“종족들이 상호 뒤섞이는 해체의 시대에 살고 있는 인간은 그 스스로 다양한 유래의 유산을 몸 안에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때로는 단지 대립할 뿐만 아니라 서로 싸워 좀처럼 안식할 줄 모르는 충동과 가치척도를 몸에 지니고 있다.”(<선악을 넘어서> §200)

니체는 이와 같이 종합이 해체된 현대문화를 정신력이 쇠퇴한 문화, '허약한 문화'라고 부르고, 이와 같은 문화에 의해 지배적으로 생산되는 분열된 인간을 '허약한 인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의 다양성을 종합하여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인간은 이전의 모든 인간보다 강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니체가 “최후의 인간들” 다음에 ‘초인’의 등장을 기대하는 것도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초인은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서로 싸우고 대립하는 다양성들을 종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이다. 니체가 ‘미래의 철학자’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다음과 같은 니체의 글을 읽어보라.

“인간적인 가치와 가치감정의 영역을 편력하고, 다양한 눈과 양심을 지닌 채 높은 곳에서 모든 먼 곳을, 깊은 곳에서 모든 높은 곳을, 구석에서 모든 드넓은 곳을 전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 스스로 비판가이며 회의론자이고 독단주의자이며 역사가이고, 그 외에 시인이며 수집가이고 여행가이며 수수께끼를 푸는 자이며 도덕가이고 미래를 예견하는 자이며 ‘자유정신’이며 거의 모든 유형의 인간이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단지 그의 과업에 이르기 위한 전제조건일 뿐이다. 이러한 과업자체는 다른 것들을 원한다.-이것은 그가 가치를 창조하기 바란다.”(<선악을 넘어서>,§211)

니체가 말하는 ‘미래의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거의 모든 유형의 인간이어야만 한다.”: 즉 다양성을 경험하고 자신 속에 내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미래의 철학자’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초인’ 혹은 ‘미래의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다양성들을 종합함으로써 자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니체는 인간의 위대함이나 강함이, 이러한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고 또한 종합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철학자는...인간의 위대함을, '위대함‘의 개념을 바로 그의 광범위함과 다양성에, 그의 다면적 전체성에 둘 수 밖에 없는 것이다.”(<선악을 넘어서>,§212)

이러한 ‘다양성의 종합’은 차이나는 것들을 미리 전제된 동일성으로 포섭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차이를 극한까지 밀고나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들뢰즈가 묘사한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의 능력들의 ‘일치’와 이러한 능력들에 의해 생산된 것의 ‘종합’과 같이 말이다.

“다양한 능력들은 일치를 이루는데 이 일치는 더 이상 능력들 가운데 어떤 한 능력을 통해 규정된 일치가 아니다....숭고함은 서로 싸우게 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능력들이 활동하도록 만든다... 능력들은 서로 직면하고 각각 자신의 극한까지 뻗친다. 그리고 근본적인 불일치 속에서 일치를 찾는다.”(질 들뢰즈, 서동욱 옮김, <칸트의 비판철학>(민음사, 2006),p.153)

현대문화 속에서 강자들은 이렇게 자신의 다양성을 종합하여 이용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들을 갖춘 반면에 약자들은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의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다. 실제로 니체는 내부에서 여러 가치들이 충돌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약해지지만, 카이사르와 같은 극소수의 예외자들은 이러한 가치-관점들의 싸움을 끝까지 밀고 감으로써 (들뢰즈가 해석한 칸트에서와 같이)이러한 가치-관점들이 '일치'에 도달하게 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지배하며, 이러한 '일치'의 생산물로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러한 싸움이나 긴장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무의식적 이성’이 발달해있기 때문이다.

3.

"달아나라! 친구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나는 그대가 위인들의 떠드는 소음으로 귀가 먹고 소인들의 가시에 마구 찔리는 것이 보인다....고독이 끝나는 곳에서 시장이 시작된다. 그리고 시장이 시작되는 곳에서 위대한 배우들이 내지르는 소음과, 독파리 떼들의 윙윙거림도 시작된다.

세상에서 제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해도, 그것을 먼저 무대에 올리는 자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렇게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자들은 군중은 위인이라고 부른다.

군중은 위대한 것, 다시 말해 창조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군중은 큰 사건을 연기하는 자들과 배우들에 대한 감각은 갖고 있다.

새로운 가치를 고안해내는 자들을 중심으로 세계는 돌고 있다. -눈에 띄지 않게 회전한다. 그러나 배우들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은 군중과 명성이다. 세상의 움직임이란 이런 것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12)

중요한 것은 여기서 '위인'과 '새로운 가치를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자'가 구별된다는 점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위인'은 대중들을 위한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에 불과하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리고 니체는 왜 이러한 무대를 '시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까?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니체에게 있어서 '무대'='시장'은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인정투쟁'이 벌어지는 장이다. 우리는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니체의 주장을 사회적 관계를 벗어나 고립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인정투쟁에 근거하지 않는, 무대=표상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니체는 결코 모든 사회적 관계를 제거해야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니체는 ‘친구’관계를 매우 중요시한다. 니체는 ‘인정’을 통해서 작동되는 ‘이웃’관계 대신에 ‘친구’관계를 형성하라고 주장한다.

“나는 그대들이 그대들의 모든 이웃들과 그 이웃의 이웃들을 견뎌내지 못하기를 바란다. ...그대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좋게 말하고 싶어할 때 증인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를 현혹시켜 그가 그대들에 대해 좋게 생각할 때,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을 좋게 생각하는 것이다....이처럼 그대들은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때 그대들 자신과 그대들의 이웃을 함께 속이는 것이다....나는 그대들에게 이웃을 갖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갖도록 가르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부 §16)

니체가 말하는 친구관계는 좋은 말과 허영심으로 포장된 상호인정의 관계가 아니라, 때로는 대적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자신의 뜻과 반하는 모습도 존중하는 관계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친구 속에 있는 적(敵)까지도 존중해야 한다....사람은 자기의 친구 속에 최선의 적(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대가 친구와 대적할 때, 그대의 마음은 그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부 §14)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노예적 상태에서는 ‘친구’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그대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친구가 될 수 없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부 §14)

남에게(‘이웃’에게) 인정받고 싶을 때 우리는 '연기'를 해야 한다. '배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를 뛰어나게 잘하는 인간들은 대중들로부터 인정받아 '위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위인'이 되면 군중들로부터 '명성'을 얻을 수 있다.이러한 '위인'이 군중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기존의 가치에 호소하는 반면, 니체의 '위대한 인간'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는 점에 있어서 큰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역사는 이러한 '창조적 소수자'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새로운 가치를 고안해내는 자들을 중심으로 세계는 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가치의 창조에는 친구, 혹은 동반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니체가 말하는 ‘창조하는 자의 고독’은 사회적 관계를 배제하지 않는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창조하는 자는 함께 창조할 사람을 구한다.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들을 써 넣을 자들을 구한다.

창조하는 자는 동반자를, 그리고 함께 수확을 거둬들일 자들을 구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설 §9)

4.

니체의 '힘'은 일종의 '역능'으로서 '권력'과 대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힘’과 ‘권력’의 대비는 특이한 결과를 도출한다.

그것은 권력자가 곧 힘이 있는 자라는 잘못된 등식을 파기 시켜 버리는 것이다. 힘 있는 자는, 즉 강자는 권력자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이고 더 나아가 이러한 자기 지배의 토대 위에서 생산적 힘=역능을 마음껏 발휘하는 자이다. 이런 생산적 역능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충동들을 적절히 이용하고 관리하고 종합할 수 있는 ‘무의식적 이성’을 갖춘 자에게서 높게 나타난다. 강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역능은 곧 '차이의 역능'이다. 그것은 ‘차이’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이렇게 ‘차이’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다는 것은 나와 타자와의 ‘차이’ 혹은 니체의 용어로는 ‘거리’를 생산하는 것을 포괄한다. 또한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능력도 ‘차이를 생산하는 역능’에 포함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낯선 것, 이질적인 것을 수용하고 그것을 포함한 서로 차이나는 것들을 능동적으로 종합하는 과정 자체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해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고, 따라서 차이를 능동적으로 종합하는 능력 자체가 '차이'를 생산해내는 능력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종합'은 차이를 미리 전제된 동일성으로 환원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차이들을 끝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치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합'과 '일치'의 산물로서 새로운 '통일된 자기'가 생산된다.

김진석은 니체가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권력관계를 기술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는 순수한 높이를 갈망했다고 쓰고 있는데,(김진석,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 했는가>(개마고원, 2009), 9장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로 갈라지는 길들’ 참조)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니체는 ‘초월적인 높이’를 지향하는 사상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내재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차이’를 생산하려는 철학적 기획을 품었던 사람이다. 그가 ‘정신적 높이’를 강조했던 것은 현실을 초월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속에서 '무리동물'을 생산해내는 사회시스템의 작동방식과 미세하게 ‘차이’를 내고 현대적 사목권력이 자기에게 부여하는 동일성(정체성)에서 벗어나 이러한 자기와 차이 나는 새로운 자기를 발명해야 한다는 ‘현실적 요청’이었던 것이다. 김진석의 말대로 니체는 ‘힘들 사이의 존재론적 위계질서’을 추구한 사상가였다. 그러나 어떤 힘이 우위에 있는 것인가? 라고 묻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적극적인 힘, 즉 차이를 생산하고 ‘거리’를 생산하는 힘이다. 그렇다면 어떤 힘이 하위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반응적인 힘, 즉 ‘부정’을 생산하고 ‘모순’을 생산하는 힘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들은 모든 저급한 것과 저급하다고 생각되는 것, 비열하고 천민적인 것과 달리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훌륭하다고, 즉 최상급의 것으로 느끼고 평가한다. 이러한 거리의 파토스에서 비로소 그들은 가치를 창출하고, 가치의 이름을 새기는 권리를 획득한 것이다.”(<도덕의 계보학>, §2, 강조는 인용자)

“...노예도덕은 애당초부터 ‘외부적인 것’, ‘다른 것’,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이야말로 노예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이다.”(<도덕의 계보학>, §10)

5.

니체의 이러한 ‘부정’과 ‘모순’에 대한 판단은, 그리고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긍정은, 니체의 사상 속에서 ‘적대’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니체가 안 좋게 생각하는 것은 ‘차이를 부정하는 적대’이고 오히려 ‘차이를 긍정하는 적대’를 니체는 적극적으로 권유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차이를 긍정하는 적대’라는 말은 두가지 의미를 품고 있다. 하나는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하는 적대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적대를 의미한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귀한 인간은 이미 자신의 적에게 얼마나 큰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그리고 그러한 경외심은 이미 사랑에 이르는 다리이다....... 그는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적을 요구한다. 그는 경멸할 것이 전혀 없고, 아주 크게 존경할 만한 적이 아니면 참을 수 없다! 이에 반해 원한을 지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적’을 상상해보자.-바로 여기에 그의 행위가 있고 그의 창조가 있다! 그는 ‘나쁜 적’을 ‘악한 사람’을 생각해내고, 사실 그것을 근본 개념으로 거기에서 그것의 잔상 또는 대립물로 다시 한 번 ‘선한 인간’을 생각해낸다.-그것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도덕의 계보학>, §10)

따라서 니체의 사상 속에서 강자에게 있어서 ‘적대’는 중요한 것이지만 이러한 ‘적대’는 ‘부정’과 ‘모순’의 원리에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와 ‘긍정’의 원리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김진석의 '차이‘와 ’적대‘를 대비시키는 다음과 같은 말은 옳지 않다.

“...다양성과 개방성, 그리고 차이를 강조하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갈등과 싸움을 강조하는 관점도 있으니 말이다.....누구보다 니체는 이 극단들 사이에서 흔들린다.”(김진석,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 했는가>(개마고원, 2009), p.240)

김진석의 눈에 니체가 두 극단들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사실 니체의 사상 속에서 강자에게 있어서 이 두 극단들이 실제로는 극단이 아니고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니체의 정치학은 ‘차이’의 정치학, 그러면서도 ‘적대’를 긍정하는 정치학이다. 니체의 ‘호머의 경쟁’이라는 텍스트는 이러한 니체의 정치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니체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두 명의 불화의 여신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파괴적이고 잔인한 투쟁의 여신으로서 어두운 ‘밤의 여신’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적 ‘경쟁’을 자극하고 충동질 하는 여신이다. 이러한 ‘생산적 경쟁’을 통해 경쟁자들은 모두 발전하게 되고 사회 또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적 경쟁'은 경쟁자를 짓밟고 올라서야 승리하고 생존할 수 있는 다윈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파괴적이고 잔인한 '생존 경쟁'과는 급이 다른 것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가 ‘도편추방제’를 시행한 것도 천재나 뛰어난 개인의 힘을 조절하고 통제하려는 ‘무리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적 경쟁’을 통해 ‘다수의 천재’들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함으로써 사회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서였다.

“이 특별한 제도의 본래적 의미는 조절 장치의 의미라기보다는 자극 수단의 의미이다. 사람들은 힘들의 경쟁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뛰어난 개인을 제거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천재의 ‘독점’에 적대적인 사상은 사물들의 자연적 질서 속에는 서로의 활동을 자극하는 천재들이 항상 여럿 있게 마련이며 또 그들은 서로 중용의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전제한다.”(‘호머의 경쟁’)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이 ‘종합’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발전되지 않고 오히려 혼란에 빠질 것이다. 니체는 “천개의 목표 위에 씌울 한 개의 사슬이 부족”하다고 말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부 §15) 천개의 목표를 사슬로 묶는 다는 것은 다양성이나 차이를 파괴하지 않고 종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력한 문화는 차이와 다양성을 미리 전제된 동일성이나 화해 속에 포섭하지 않고 오히려 차이나는 것들의 싸움과 경쟁을 극한까지 밀어붙임으로써 ‘불일치의 일치’를 이루고 ‘종합’을 수행한다. 앞에서 인용한 들뢰즈의 글을 다시 써보자.

“다양한 능력들은 일치를 이루는데 이 일치는 더 이상 능력들 가운데 어떤 한 능력을 통해 규정된 일치가 아니다....숭고함은 서로 싸우게 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능력들이 활동하도록 만든다... 능력들은 서로 직면하고 각각 자신의 극한까지 뻗친다. 그리고 근본적인 불일치 속에서 일치를 찾는다.”(질 들뢰즈, 서동욱 옮김, <칸트의 비판철학>(민음사, 2006),p.153)

6.

니체의 ‘차이’와 '생성'에 근거한 정치학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니체의 정치학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힘들의 ‘위계질서’을 강조할 때, 그 강조는 어쩔 수 없이, 때로는 자신도 모르거나 때로는 자신도 통제할 수 없이, 힘들의 엄격한 존재론적 질서를 전제하고 부추기기 쉽다. 그리고 사회적/역사적으로는 과거의 봉건적이고 귀족적인 사회질서를 그리워하고 추구하기 쉽다.”(<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p.254)

그러나 니체가 추구한 것은 ‘귀족적 보수주의’, 즉 고정된 힘들의 질서가 빚어내는 정치체제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끊임없이 투쟁하는 힘들의 질서가 만들어내는 ‘다양성’과 ‘생성’의 정치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니체가 ‘고귀한 인간들’,‘강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극복하는 인간이기에 봉건제 하의 귀족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거리의 파토스가 없었다면, 저 다른 더욱 신비한 파토스, 즉 영혼 자체의 내부에서 점점 더 새로운 거리를 확대하고자 하는 요구는 전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간단히 말해 지속적인 ‘인간의 자기극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선악을 넘어서>, §257)

다시 말해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함으로써 이 자기와 차이나는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인간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하는 인간이 어떻게 동일성에 기반한 봉건적 귀족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니체는 민족적 동일성에 기반한 내셔널리스트도 아니었다. 니체는 어떻게 민족적인 공통성이나 공동 체험의 동일성이 ‘고귀한 인간’을 희생시키는 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사람들이 오랜 시간 유사한 조건 아래 함께 살아간다면, 거기에서 ‘서로 이해하는’ 어떤 것, 한 민족이 생겨난다....오직 평균적이고 공동의 체험을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인간을 마음대로 해왔던 모든 폭력 가운데 가장 큰 폭력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좀더 유사하고 좀더 평범한 인간들은 언제나 유리한 입장에 있었으며 지금도 그렇지만, 좀 더 선택된 자...들은...재난을 당하기도 쉽고 거의 번식하지도 못한다. 이 자연스러운 것, 너무 자연스럽게 유사한 것으로 진행하는 과정, 유사한 것, 일상적인 것, 평균적인 것, 무리적인 것으로-비속한 것으로!”(<선악을 넘어서>, §268)

이러한 유사성, 동일성, 평균성을 극복하고 ‘차이’와 ‘다양성’의 귀족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니체의 목표였던 것이다. 따라서 민족적 혈통의 순수성과 개개인들의 유사성, 동일성, 평균성에 의지하는 파시즘과 니체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다. 니체는 ‘힘들의 위계질서’를 강조했지만 그것이 플라톤적인 국가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잘 못된 것이다. 니체는 자기를 극복하는 힘, 차이를 생산하는 힘으로서의 적극적인 힘을 긍정한 것이기 때문에, 플라톤처럼 영원하고 이상적인 정체를 추구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니체가 추구했던 정체는 개개인이나 사회 모두 끊임없이 자기-동일성을 해체하고 다시 구축하는 역동적인 정체였다. 니체는 플라톤적인 영원함에 대해 ‘영원회귀’를 대치시키는 것이다. 백승영은 올바르게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정신적 귀족주의는... 선천적 계급결정론이나 우생학적 결정론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또한 현실적인 정치권력이나 경제력에도 의존하지 않는다....이렇게 형성된 계층은 물론 가변적이다.”(백승영, <니체-건강한 삶을 위한 긍정의 철학을 기획하다>(한길사, 2011),p.218)

7.

니체는 인간을 왜소한 존재, 즉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무리동물’로 만드는 기독교를 비판하며 동시에 이러한 기독교를 계승하는 민주주의를 비판한다. 니체에 의하면 민주주의적 제도와 형식과 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정치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작은 정치’에 불과하다. 니체는 인간을 고양시키는 ‘위대한 정치’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인간의 훈육과 육성에 의해 가능하다.

“이런 우리에게는 민주주의 운동이란 정치조직의 타락한 형식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타락형식, 즉 왜소화 형식으로, 평균화와 가치 하락으로 생각 된다: 우리는 우리의 희망을 어디에서 붙잡아야만 할까?-그것은 새로운 철학자들을 향해 희망을 거는 것이며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훈육과 육성이라는 위대한 모험과 총체적인 시도를 준비하는 것...이를 위해 언젠가는 새로운 종류의 철학자와 명령하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며 그 모습에서 보면, 일찍이 지상에서 감추어진 무섭고 호의적인 정신으로 있었던 모든 것은 창백하고 왜소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힘과 과제들이 유리하게 결집되고 고양된 경우, 어떤 것이 인간에게서 훈육되어야만 하는지 한눈에 파악한다. 그는...인간이 최대의 가능성에서 아직도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그리고 인간이라는 유형이 얼마나 종종 이미 신비로운 결정과 새로운 길에서 있었던지를 알고 있다.”(<선악을 넘어서>,§203)

주체를 생산해내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길들임'이고 다른 하나는 '길러냄'이다.

니체는 '길들임'이 역사 속에서 인간을 개선한다는 목적 아래에서 폭력으로 작동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폭력인가? 그것은 강하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것을 병약한 것으로 만드는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의 사례는 중세 초기에 '금발의 야수'를 길들였던 기독교적 권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직자가 <개선>시켜 온, 길든 인간의 경우도 다를 바가 별로 없다. 교회가 사실상 동물원과 다를 바 없던 중세 초기에 사람들은 어디서나 <금발의 야수>의 가장 아름다운 표본을 찾아 쫓아다녔었다....그러나 그와 같이 <개선>되어 수도원으로 인도되어 들어갔던 튜튼인이 나중에는 어떻게 보였던가?..죄인이 되어버렸고, 울안에 갇혀버렸으며, 그지없이 끔찍한 개념들 속에 감금되어 버렸다."(<우상의 황혼>, '인류를 개선하는 자들',§2)

이렇게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길들임'의 방식으로는 '고귀한 인간'을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귀한 인간들’을 어떻게 교육을 통해 '길러내야', 즉 생산해야 하는가? 니체는범용한 인간들을 생산하는 당시 독일의 고등교육에 대항하여 ‘고귀한 인간들’을 생산하는 교육자에게 세 가지 과제를 부여하고 있다.

첫 번째 과제는 ‘보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다. 이것은 특정한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정신의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보는 것을 배우는 것...판단을 유보하고, 개별적인 모든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다루어보고 포괄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특정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고 격리하는...것이다.”(<우상의 황혼>,‘독일인에게 부족한 것’,§6)

보통 사람들이 반응능력을 발견하는 곳에서 니체는 ‘자극에 저항할 수 없는 무능력’을 발견한다. 이데올로기와 대중문화는 사람들의 “자극에 저항할 수 없는 무능력”을 통해서 작동한다. 이데올로기는 대타자의 호명에 반응하여 대답할 때 작동하는 것이고, 대중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계산된 반응을 하게함으로써 사람들을 '대중'으로 조직화하려고 한다.

니체의 이러한 “자극에 저항할 수 없는 무능력”에 대한 비판과 현대적 이데올로기 비판의 접점은 둘 모두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자극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으로서의 실천을 하지 말고 신중하게 사태와 사물을 볼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는 파스칼과 알튀세르가 이야기한대로 “무릎 꿇고 입을 열어 기도하는”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인 “자동반응 기제”로부터 벗어나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음으로 더욱 고차적인 과제는 ‘생각하는 법’과 ‘말하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다. 니체는 ‘생각하는 것’과 ‘말하고 쓰는 것’을 춤을 추는 것에 비유하는 데, 왜냐하면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데에는 정신의 유연함과 정교함, 섬세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정신의 가벼운 발이 모든 근육으로 옮기는 그 정교한 전율을 지금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독일인이 누가 있단 말인가!-정신적인 동작의 뻣뻣한 무례함, 파악할 때의 굼뜬 손-이것이 독일적이다. 춤이라는 것은 어떤 형식이든 고급교육과 분리될 수 없다. 다리를 가지고 춤출 수 있지만, 개념과 말을 가지고도 춤을 출 수 있다는 것; 펜을 가지고도 춤출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직도 말해야 할까?”(<우상의 황혼>,‘독일인에게 부족한 것’, §7)

"보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타인의 선동이나 조작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지배하게 함으로써 인간을 강자로 육성한다. 또한 “생각하는 법”과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움으로써 인간은 섬세하고 정교한 해석의 기술을 습득하게 되고, 이러한 기술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은 춤추는 것처럼 자유롭게 된다.

8.

이렇게 니체는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을 육성하길 원하기 때문에 ‘평등한 가축떼’를 생산해내는 민주주의를 비판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고병권은 니체가 시뮬라크르로서의 세계를 긍정했다는 이유로 그를 ‘민주주의자’라 부른다.

“이 반 플라톤적 ‘몰락의 길’을 택한 대표적인 이가 바로 니체이다. 많은 이들이 그를 민주주의의 적대자로 간주하고, 그가 근대 민주주의에 지독한 욕설을 퍼부은 것도 사실이지만, 내생각에 그는 그의 비난자들보다 훨씬 더 민주주의에 다가간 인물이다....그는 <서광>에서 플라톤의 동굴 밖 철학자, ‘이데아 세계의 철학자’와 대비되는 ‘지하생활자인 사상가’유형을 제시한 바 있다.”(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 2011),p.21)

고병권이 니체를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지하생활자’가 머무는 곳이 “어떤 토대, 어떤 척도, 어떤 원칙도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려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모든 것들은 근거나 원칙, 토대 없이 생성하고 소멸되기에 평등한 위상을 갖는다.

그러나 니체는 과연 어떠한 근거, 원칙도 없는 정치체를 요구했던가? 이것은 니체 사상의 ‘디오니소스적 측면’만을 고려한 것으로 ‘아폴로적인 측면’을 아예 배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니체에게 있어서 ‘디오니소스적인 힘’은 척도를 파괴시키고 형상들의 구별과 존재자들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라면, 아폴로적인 것은 형상을 생산하고 “척도를 설정하고 틀을 규정하고 산출하는” 힘이다. (백승영, <니체-건강한 삶을 위한 긍정의 철학을 기획하다>,p.242 참조)

니체가 구상했던 정체는 끊임없이 자신의 척도들을 파괴하고 사회적인 형상들의 구분과 구별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파괴 이후에 새로운 척도들과 형상들을 만들어내는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니체가 추구했던 정체는 아폴론적인 힘과 디오니소스적인 힘이 항구적인 긴장상태 혹은 상호보완 상태에 있는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니체가 무리동물보다 ‘뛰어난 개인’을 중요시 했다는 것에서도 니체가 ‘개별화의 원리’로서 아폴론적인 것을 중요시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능력으로서의 사회적, 집단적 감성과 아폴론적인 능력, 즉 조형적이고 형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 이성’, 혹은 ‘무의식적 지성’을 동시에 중요시 했다.

니체는 전 저작에서 자신의 철학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이라고 공공연히 강조했지만, 니체가 국가설립자들을 원한이나 가책이 없는 자로 묘사하면서, 대중들에게 형태를 부여하고 사회전체에 형식을 새겨 넣는 힘을 가진 자로 묘사한 것에서도 보듯이, 아폴론적인 힘의 중요성도 비밀스럽게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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