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호](연재) 종합적 사회과학자로서의 니체-니체와 정치경제학

기고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3 16:20
조회
660
니체와 정치경제학

김상범


1.

(니체에 의하면) 공리주의자들은 ‘좋음’이라는 개념과 판단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론을 내세운다:

“원래 비이기적인 행위란 그 행위가 베풀어져 이익을 얻은 사람들 측에 의해 칭송되고 좋다고 일컬어졌다. 나중에는 이러한 칭송의 근원이 잊혀졌고 그러면서 비이기적인 행위들은 습관적으로 항상 좋다고 칭송되었기에 그냥 좋다고 느껴지게 되었다. 마치 그 행위 자체가 좋은 것이기라도 하는 것처럼.”(<도덕의 계보학>제 1논문, §2)

이것은 어떻게 보면 ‘속류유물론’에 부합되는 것 같고 우리의 ‘상식’에 부합되는 것 같다. 도덕이라는 것이 ‘경제적 이해’에 의해서 추동된다고 하는 속류적인 ‘상식’말이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주장이 비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이론에 의하면 비이기적 행위의 공리성은 망각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공리성은 어느 시대에나 일상적으로 경험”되고 이러한 일상 속에서 부단히 강조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도덕의 계보학>제 1논문, §3)

뿐만 아니라 이들은 ‘좋음’이라는 가치판단이 ‘좋은 자’가 아니라 ‘좋은 자’로부터 ‘호의’를 받은자로부터 탄생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좋음이라는 가치판단이 행동(action)이 아닌 ’반응‘(reaction)으로부터 탄생했다는 주장으로써, 가치판단을 내리는 자가 먼저 행동하는 자가 아니라 타자의 행위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객관적 실리‘를 따지는 좀스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니체에 의하면 이는 틀린 주장이다. 이에 대해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첫째로 분명한 것은 그 이론에서 ‘좋음’이라는 개념이 원래 발생한 곳을 그릇된 장소에서 찾고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좋음’이라는 판단은 ‘호의’를 받은 사람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좋은 사람들’ 자신, 즉 고상한 사람, 강한 사람,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과 고매한 뜻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도덕의 계보학>제 1논문, §2)

그리고 ‘객관적 실리’를 따지는 인간은 사실 고귀한 인간이 아니라 무리 동물의 습성을 가진 인간이다.

“이러한 기원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좋음’이라는 용어가 저 도덕의 계보학자들의 미신이 억측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필연적으로 ‘비이기적’ 행위와 결부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이기적’, ‘비이기적’이라는 대립의 전체가 인간의 양심에 더욱 떠오르게 되는 것은 귀족적 가치 판단이 몰락할 때 비로소 일어난다.-이 대립과 더불어 마침내 표현되는 것은, 내 언어를 사용해보자면, 무리 본능이다.”(<도덕의 계보학>제 1논문,§2)

이처럼 니체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자신의 실리를 추구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결코 귀족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이러한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학은 ‘노예의 학문’, ‘무리동물의 학문’이다.

그렇다면 니체의 초인, 귀족, 강자는 이타적인 인간인가? 니체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부르는 이기심, 즉 ‘병든 이기심’의 너머에 ‘진정한 이기심’이 있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이 두 이기심을 대비시키고 있다.

“진실로 그처럼 나누어주는 사랑은 모든 가치의 강탈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이기심을 나는 건정하고 거룩하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기심이 있다. 너무 가난하고 너무나 굶주리고, 언제나 훔치고 싶어하는 이기심, 그것은 저 병든 자들의 이기심, 병든 이기심이다.

그것은 반짝이는 것이면 무엇이든 도둑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 이기심은 굶주린 자의 욕심으로 배불리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언제나 주는 사람들의 식탁 주변을 배회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부 §22)

우리가 통상적으로 부르는 이기심은 사회적으로 통용되거나 인정받는 가치를 추구하는 이기심이다. 이러한 이기심은 ‘결여’에 의해 작동되기에 “너무나 가난하고, 너무나 굶주리”는 자들의 이기심이다. 반면에 건강한 이기심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들의 이기심이며, ‘나누어주는 사랑’의 이기심이다. ‘나누어주는 사랑’과 ‘이기심’이 어떻게 양립가능한가? 우리는 새로운 덕으로서의 ‘나누어주는 덕’에 대하여 설교하고 있는 니체의 다음과 같은 문장들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리하여 정신으로 하여금 창조자가 되고 평가하는 자, 사랑하는 자, 그리고 만물에 대해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게 한다.

그대들의 마음이 강물처럼 드넓게 가득 물결쳐서 강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 축복이자 위험한 것이 될 때, 그 때야말로 그대들의 덕이 근원에서 움트는 것이다.

그대들이 칭찬과 비난을 넘어설 때, 그리고 그대들의 의지가 사랑하는 자의 의지로써 모든 사물에 대해 명령하려 할 때, 그 때야말로 그대들의 덕이 근원에서 움트는 것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부 §22)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사물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주는 것이므로 “만물에 은혜를 베푸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타심이 아니라 건전한 이기심, 즉 사랑하는 자의 “모든 사물에 대해 명령”하고자 하는 건전한 이기심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또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칭찬과 비난을 넘어설 때”, 즉 사회적으로 통용되거나 인정받는 가치를 넘어설 때 가능한 것이다.

2.

상품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사용가치도 그리고 교환가치도 화폐와의 교환이후에 성립하는 것이다. 교환되지 않으면 이러한 상품은 폐기물로 사라지게 된다. 상품의 가치는 화폐 소유자의 그 상품과 상품 소유자에 대한 '인정'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상품 교환 경제는 '인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 자체가 익명적인 '타자'에 의한 인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상품을 팔아야 하는 자본은 소비자에 대하여 열등한 위치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익명적인 '타자'에 대한 인정을 받는데 성공하여 화폐를 많이 축적하게 되면, 이제 소비자였던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자본가에게 팔아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노동자는 자본에게 '인정' 받기를 추구하게 된다.

상품을 판매하는 자본은 소비자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이미지 관리'를 시도해야 하며 소비자 대중들의 취향이나 심리에 호소해야 하고, '무리동물'들의 비위를 맞추어주어야 한다. 니체는 이렇게 '무리동물'에게 영합하는 존재를 '노예'라고 부른다. 따라서 상품교환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자본도 노예, 노동자도 노예인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가치형태론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가치형태'에서 사물의 가치는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타자'의 인정에 근거한다. 그러나 화폐가 등장하면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인정의 질서가 성립한다. 화폐가 등장한 이후의 사물의 가치는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타자'가 아니라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적 '대타자'의 인정에 의해 규정된다.

니체는 이러한 인정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사물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라고 요구한다. 니체는 황금의 가치를 교환가치, 즉 사회적 인정 속에서 발생하는 가치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인간에게 주는 것 속에서 발견한다.

"황금은 오직 최고의 덕의 상징으로서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나누어주는 자의 눈빛은 황금처럼 빛이 난다. 황금의 광채는 달과 태양 사이에 평화를 맺게 해준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부, §22)

니체는 상품교환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습성과는 반대로 '나누어주는 것'이야말로 고귀한 것이라고 말한다.

"최고의 덕은...반짝거리고 그 광채는 부드럽다. 나누어주는 덕이야말로 최고의 덕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제 1부, §22)

따라서 니체는 '교환'을 넘어서 '증여'의 경제로 나아가길 원했다고 볼 수 있다.

니체의 다윈 비판은 자유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공한다. 다윈주의자들은, 그리고 이러한 진화론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원의 '희소성'과 이러한 결핍으로 인해 비롯되는 '파괴적 경쟁'의 불가피성을 자신의 전제로 삼지만, 니체는 이러한 전제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생존의 일반적인 양상은 굶주림과 빈곤이라기보다는 풍요와 사치, 더 나아가 터무니 없는 낭비인 것이다."(<우상의 황혼>,'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탐험',§14)

니체의 '천재' 개념 또한 경제학적 의미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에 한정된 자원 중에서 많은 것을 얻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탕진해버리고 소비해버리는 인간에 속한다.

"천재란...필연적으로 하나의 낭비가이기 마련이다. 그의 위대성은 그가 자신을 탕진한다는 사실 속에 있다......자기 보존의 본능은, 말하자면, 활동 중지되어 있다....천재는 흘러넘치며, 천재는 넘쳐흐르고, 천재는 자신을 탕진해버린다."(<우상의 황혼>,'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탐험',§44)

3.

앞서 설명한대로 상품의 가치는 사회적 '대타자'의 인정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화폐의 자기증식 욕망에 따라 현실이 끊임없이 재조직되기 시작하면서, 현실(상징계)을 유지시키는 대타자의 권위는 끊임없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자본은 이러한 대타자의 권위의 붕괴와 함께 위기를 겪는다. 이것이 상품을 생산해내는 자본의 이율배반이라고 할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이와 같은 현상을 다음과 같은 언어로 포착해내고 있다.

"...모든 인간적인 목적의 파괴를 먹고 산 것은 자본이며 그의 권력의 튼튼한 법인 등가와 교환이라는 기본법을 안치하기 위하여 참과 거짓, 선과 악의 모든 구별을 깨뜨렸던 것은 자본이다....맨 처음으로 사실성과 사실성의 원칙을 썩도록 한 것이 자본이었다....그래서 우리는 실재적인 것이란 없고 조작만이 전능한 힘이라는 감각을 가졌으며 조작의 목적도 어떤 사실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감각을 가졌다. 따라서 오늘날 바로 이 사실성을 죽였던 동일한 논리가 이제 와서 사실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자본에 반대하여 치열해 진다."(장 보드리야르, 하태환 옮김, <시뮬라시옹>(민음사, 2001),p.58)

사람들은 오랫동안 실제로는 기호체계에 불과한 것을 현실로 믿고 살아왔다. 그러나 자본은 기호조작을 통해 화폐를 축적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기호체계가 현실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했고, 이로 인해 '대타자의 붕괴'라는 현상이 발생하지만, 자본은 이러한 대타자 없이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호체계의 '현실성'을 회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가짜, 즉 하이퍼리얼리티를 만들어낼 뿐이다.

"...자본은 사실성의 기호들만을 증폭시키며 시뮬라시옹의 유희를 가속화할 따름이다."(<시뮬라시옹>,p.58)

오늘날 지배적인 자본주의 형태는 상품-자본주의가 아니라 금융-자본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분석은 잘 들어맞는다. 금융-자본주의도 역시 사회적 '대타자'에 의존하는 동시에 이러한 대타자를 붕괴 시킨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는 사회자체가 채권자-채무자 관계에 의해 짜여간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보이지 않는 '제 3자' 즉 대타자의 보증이 있어야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은행과 기업, 은행과 개인 사이의 채무관계는 대타자가 부여한 '신용'에 의해서 생산되고 유지된다.

4.

<니체와 종교학>이라는 꼭지에서 보듯이 죄의식은 부채의식이 사제에 의해 도덕화되어 생겨난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이러한 사제의 역할을 하는 것은 언론인, 정치가, 경제학자등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의 잘못이다”.“당신이 죄인이다” 그리스인들이 따뜻한 햇볕 아래 누워 몸을 태우는 동안, 신교도인 독일인들은 유럽과 인류의 안녕을 위해 음산한 하늘 아래 열심히 일을 했다는 것이다.“(마우리치오 라자라토, 허경·양진성 옮김, <부채인간>(메디치, 2012),p.58)

그리스인들이 죄의식을 느껴야만 하는 이유는 독일인들에게 빚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는 빚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고 주체성을 생산해낸다. 놀랍게도 이것은 니체가 분석한 원시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원시 사회에 대한 니체의 이러한 통찰은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니체는 문화에 의한 훈육은 곧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을 기르는 것이며, “가장 원초적인 사회 관계”는 바로 채권자-채무자 관계였기 때문에, 원시 문화는 사실상 “채무를 상환할 수 있는 인간”을 길러냈다고 한다. 그리고 권력은 이렇게 “약속할 수 있는 인간”, “채무를 상환할 수 있는 인간”을 기름으로써 “예측 가능한 인간”을 만들고 이를 통해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부채의 기술은 미래가 감출 수 없는 채무자의 행동이 갖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경로’를 예견하고 없애는 일이다.”(<부채인간>,p.76)

니체는 이렇게 “약속가능한 인간”을 기르기 위해 엄청난 폭력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억”을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심어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말랑말랑한 해답과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도덕의 계보학> 제2논문, §3)

“피와 고문과 희생 없이는 인간이 자신에게 기억을 새겨 넣을 수 없었다.”(<도덕의 계보학> 제 2논문, §3)

그러나 이렇게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을 기르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풍습의 윤리에서 벗어난 개체”가 탄생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이성'의 두 형태, 즉 “먼 앞 일을 현재의 일처럼 보고 예견하는 법”과 “무엇이 목적이고 수단인지 확실히 정”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도덕의 계보학> 제2논문,§1)

“먼 앞일을 예견하는” 능력은 “~을 해야한다”는 윤리적 명령에 따라 세계가 움직이지 않음을 깨닫게 하고, 스스로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 확실히 정”하는 능력은 목적과 수단을 자신의 욕망과 의지에 따라 정하고 이러한 욕망과 의지가 풍습의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더라도 목적을 이루려고 (자신의 욕망과 의지를 실현시키려고) 노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 기억은 “의욕의 능동적 상태이고, 일단 하려던 것을 계속하려는 것이며,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인 것이다.”(<도덕의 계보학 제 2논문, §1)

그리고 이렇게 사회의 폭력 속에서 자기 지배력을 갖추게 된 인간들만이 지배하고 명령할 자격이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을 지배하는 것과 아울러 환경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나 의지가 좀 부족해 신뢰할 수 없는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것도 자신의 손에 맡겨져 있음을 어찌 모를리 있겠는가?”(<도덕의 계보학> 제2논문, §2)

5.

다시 부채의 문제로 돌아가도록 하자. 오늘날의 부채경제는 역시 “약속할 수 있는 인간‘ 즉 ’신용할 수 있는 인간‘을 키워내는 것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니체가 말했듯이 ’주권적 개인‘이 탄생하는 조건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주권적 개인들은 금융에 미래를 저당잡히지 않고 자기 스스로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빚진 사람들’이 이러한 ‘주권적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당당하게 부채 상환의 불가능을 선언해야할 것이다.

“단 한 푼도 상환해서는 안된다. 부채를 없애기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부채인간>,p.223)

또한 이러한 주권적 개인들 사이에는 제 3자(대타자)에 의해 보증되는 ‘신용’이 아니라 무매개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신뢰’가 형성되어야 하고, '상호 채무'의 형성을 통해 '채권자 없는 채무'가 형성되어야 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적 형식의 채무는 공통적인 것이 갖는 고결한 측면을 증명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채무는 채권자가 없는 채무이고, 특이성들 사이의 관계를 맺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게다가 그것은 도덕과 죄의식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적 의무라기보다, 우리가 사회와 서로에게 지고 있는 사회적 빚에 대한 상호적 인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공통적인 것의 윤리를 통해서 기능한다.”(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조정환 옮김<선언>(갈무리, 2012),p.81)

이러한 상호채무, 혹은 상호책임은 개개인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책임이라는 이례적인 특권에 대한 자부심,...자기 자신과 운명을 지배하는 이러한 힘에 대한 의식은 그의 깊디 깊은 심연에까지 내려가서 본능, 지배적인 본능이 되었다.”(<도덕의 계보학> 제 2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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