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호] 전회의 시대, 조용히 울려 퍼지는 백두송가ㅣ문규민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2-02-18 20:50
조회
654
 

전회의 시대, 조용히 울려 퍼지는 백두송가(白頭頌歌)


문규민(중앙대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한때 ‘종언’의 담론이 유행한 적이 있다. 피로 때문인지 실망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몇몇 지식인들은 수백 종의 생명이 멸종하는 사태보다 인간종이 지극히 최근에 만들어 낸 몇몇 현상의 종언을 더 심각하게 고민했다. 철학의 종언, 역사의 종언, 이데올로기의 종언, 근대문학의 종언. 멸종보다 종언. 그들은 마치 예언자라도 된 양 때로는 비장하게, 때로는 쿨하게 종언을 고했지만, 그 중 실현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지금은 ‘전회’가 종언을 대체하고 있는 것 같다. 존재론적 전회, 물질적 전회, 실재론적 전회, 비인간적 전회. 종언이 아니라 전회. 호기롭게 끝을 선언하다 헛물을 켠 경험을 잊지 않는다면, 단호하고도 신중하게 사유와 실천의 방향을 틀어야 할 것이다. 전회의 시대를 종언의 시대처럼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샤비로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과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존재론, 퀑텡 메이야수와 레이 브라시에로 대표되는 사변적 실재론을 끊임 없이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그들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비교나 대조는 쉽게 허수아비 때리기나 들러리 세우기로 변질되지만, 『사물들의 우주』는 그런 위험을 성공적으로 회피하면서 화이트헤드와 객체지향존재론, 사변적 실재론 모두를 꼼꼼하게 읽어내고 있다.

쉽게 넘기기 어려운 내용이 매 장마다 펼쳐진다. 1장 ‘자기향유와 관심’에서, 샤비로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해설하고 이를 타자와 윤리에 대한 레비나스의 논의와 대질시킨다. 2장 ‘활화산’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과 하먼의 객체지향존재론의 전면적인 비교와 대조가 이루어지는 ‘화이트헤드 대 하먼’이라고 할 만하다. 3장 ‘사물들의 우주’에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하이데거의 도구-존재, 제인 베넷의 생기론적 유물론과 공명한다.

책상도 나름 정신을 갖고 있을까

심리철학을 전공한 서평자로서는 4장 ’범심론 그리고/혹은 제거주의‘와 5장 ‘범심론의 귀결’이 매우 인상깊었다. 범심론은 거칠게 말해 도저히 정신을 가질 수 없어 보이는 무기적 존재자들, 예컨대 책상이나 쿼크조차도 미약하게나마 나름의 정신을 갖고 있다는 가설이다. 그냥 듣기에도 너무나 반직관적이라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일축하기 쉽지만, 현재 범심론은 심리철학에서 가장 핫한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런데 샤비로는 화이트헤드가 경험, 파악, 느낌 등 인간의 정신을 기술하는 개념들을 급진적으로 탈인간화하여 존재론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런 특징이 탈인간중심주의는 물론 일종의 범심론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인간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며, 가치를 평가하듯이, 모든 존재들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느끼고, 경험하며,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샤비로는 이를 보이기 위해 주체의 현상적 경험과 관련된 심리철학의 논의를 참조하고, 이 과정에서 메이야수와 브라시에에 대한 상세한 해설과 분석을 제공한다.

6장 ‘비상관주의적 사고’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 메이야수의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상관주의를 벗어나려는 메이야수와 브라시에의 시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가 논의되며, 그들이 내세우는 수학이나 물리학에 대한 대안으로 일종의 “자폐적” 사고, 즉 ““비인지적”이며 비-비판적인” “일종의 현상학 없는 현상성”으로서의 비상관주의적 사고가 제시된다. 이런 사고는 본질적으로 미학적이며,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느낌과 유사하다.

마지막 7장 ‘아이스테시스’에서 샤비로는 탈인간화되고 일반화된 미학을 제1철학으로 놓는 하먼의 논증, 그리고 칸트의 미학을 참조하면서 다시 한 번 화이트헤드와 하먼이 만나는 지점들, 그리고 둘이 갈라서는 지점들을 드러낸다. 여기서 샤비로가 제시하는 대안은 사변적 미학이다. 화이트헤드와 하먼에게 실재는 의식을 통해 인식되기 보다는 느낌을 통해 암시될 따름이다. 인간은 알려지는 사물에 대해 지식을 가지는 게 아니라 암시되는 사물에 대해 매혹을 느끼는 것이다. 메이야수에게 모든 것은 난데없는 우발성의 산물이고, 하먼에게 모든 것은 진공 속에 유폐된 객체이지만, 샤비로에게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느끼고 느껴지는 미적 현상인 것이다.

전회의 시대 조용히 울려 퍼지는 백두송가

최근의 사상 조류에 대한 일정 수준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의 논의가 객체지향존재론과 사변적 실재론에 바쳐져 있으며 신유물론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사물들의 우주』의 단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의 크나큰 미덕은 화이트헤드와 사변적 실재론 모두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어딘가에서 “W로 시작하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는 비트겐슈타인이 아닌 화이트헤드일 것“이라고 한 바 있는데, 샤비로의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최근 신유물론과 사변적 실재론 등이 다소 급하게 유입되면서 종종 자의적인 해석에 근거한 인상비평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물들의 우주』는 이를 차분하게 교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도의 형이상학적 사변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샤비로의 서술은 평이한 듯 하면서도 명료하며, 무엇보다 정확하다. 만약에 이 책이 읽기가 어렵다면, 그것은 책이 담아내는 내용이 심오해서이지 문장이 어려운 탓은 아닐 것이다. 『사물들의 우주』는 귀한 정보를 가득 담고 있는 수준 높은 형이상학책이자, 전회의 시대에 부르는 백두송가(白頭頌歌)다. 따라서 종언은 없는 것이다. “관념의 모험”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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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2년 2월 18일 <교수신문>( https://bit.ly/354yTPy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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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객체들의 민주주의』(레비 R. 브라이언트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1)


『존재의 지도』의 전편에 해당하는 시론으로서 기후위기의 시대에 적절하게도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실재론적 존재론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책! 브라이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현대의 체계 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론을 교직함으로써 주체와 객체, 문화와 자연 사이의 인위적인 간극을 용해하고 객체들의 동등한 ‘실체성’을 단언하는 ‘평평한’ 존재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존재의 지도 :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레비 브라이언트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자연주의와 유물론을 당당히 옹호하는 한편으로, 이들 친숙한 관점을 변화시키고 문화 자체가 어떻게 자연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브라이언트는 범생태적 존재론을 지지하는데, 요컨대 사회는 담론과 서사, 이데올로기 같은 기표적 행위주체들과 더불어 강과 산맥 같은 비인간의 물질적 행위주체들도 고려함으로써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생태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브라이언트는 새로운 기계지향 존재론의 토대를 구축한다.


브뤼노 라투르 :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1)


브뤼노 라투르의 진화하는 정치철학에 관한 선구적인 해설서이면서 객체지향 정치학을 발전시키려는 실험적 시도다. “라투르의 고유한 정치철학에 대한 해설서”로서 제시되는 이 책에서 하먼은, 이전의 저작 『네트워크의 군주』에서 시도한 대로, 브뤼노 라투르를 본격 철학자로서 고찰한다. 이 책에서 하먼은, 존재론과 정치철학의 관련성에 의거하여, 라투르의 사상적 단계를 세 단계로 구분하며 초기 라투르, 중기 라투르, 후기 라투르를 각각 대표하는 세 가지 저작, 즉 『프랑스의 파스퇴르화』, 『자연의 정치』, 『존재양식들에 관한 탐구』를 정치철학적 견지에서 주의 깊게 검토한다.


비유물론 : 객체와 사회 이론』(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사회적 세계에는 어떤 객체들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특정한 피자헛 매장은 그 매장을 구성하는 종업원과 탁자, 냅킨만큼 실재적일 뿐만 아니라, 그 매장이 종업원과 손님의 삶에 미치는 사회적 및 경제적 영향과 피자헛 기업, 미합중국, 행성 지구만큼 실재적이기도 한가? 이 책에서 객체지향 철학의 창시자인 저자 그레이엄 하먼은 사회생활 속 객체의 본성과 지위를 규명하고자 한다. 객체에 대한 관심은 유물론의 한 형태에 해당한다고 흔히 가정되지만, 하먼은 이 견해를 거부하면서 그 대신에 독창적이고 독특한 '비유물론' 접근법을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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