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호] 공간의 파괴와 재생산에 맞서는 한국 다큐멘터리의 미학적 실천 / 이도훈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2 23:02
조회
1338
공간의 파괴와 재생산에 맞서는 한국 다큐멘터리의 미학적 실천

이승민, 『영화와 공간』 (갈무리, 2017)


이도훈(『오큘로』 편집인)


* 이 서평은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저널『ACT!』107호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goo.gl/pyFCn5


이승민의 『영화와 공간 : 동시대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미학적 실천』은 2000년대 후반 이후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내에서 사회적 공간을 미학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간학제적인 접근 속에서 해명하고 있는 책이다. 2010년을 전후로 동시대의 사회적 국면이 특정 공간에 압축되어 나타난 경우가 많았다. 청계천 복원 사업, 4대강 사업, 서울 뉴타운 개발, 용산 참사, 홍대 두리반, 강정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등. 이러한 사건과 현장은 자본과 국가의 비호 아래 개발을 추진하려는 이들과 그에 맞서 생존권, 주거권, 환경권 등을 주장하는 이들이 충돌하는 곳이었다.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는 그와 같은 사회적 공간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록 또는 사유해왔다. 이승민은 그 다큐멘터리들의 작업을 쫓아 동시대의 공간이 어떻게 영화적으로 활용되고 해석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은 그간 영화학계 내에서조차도 관심 밖에 있었던 영화적 공간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영화는 시간의 지속을 공간적으로 표현하는 매체라고 정의되기는 하지만, 정작 영화적 시간과 비교하면 영화적 공간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 이러한 학문적 불균형은 영화의 매체적인 순수성이 카메라의 시각성, 조형성, 운동성에 있다고 간주하는 통념이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특히 영화에 대한 경험을 움직이는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과 움직이는 이미지의 지속을 체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관점 속에서 영화적 공간에 대한 인식이 들어서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영화적 공간의 중요성이 철저하게 간과되어왔던 것은 아니다. 영화사적으로 봤을 때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지건 야외에서 만들어지건 간에, 영화는 물리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공간과 상상적으로 인지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지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거리영화, 도시 교향곡, 풍경 영화, 산악 영화, 여행 영화, 로드 무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영화 제작자들은 이국적이고, 낯설고, 흥미로운 공간을 통해서 관객들의 주목을 끌어내려고 했고, 영화 관객들은 그러한 공간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했다.
한편, 1990년대 이후로 영화학계 내외부에서 영화 속 공간이 단순히 프레임의 구성 요소, 미장센의 일부, 서사가 발생하는 무대,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의 텍스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이 시기에 영화학자들은 문화연구, 미디어 고고학, 비판지리학, 인문지리학, 도시사회학, 건축학, 현상학 등과의 학문적 교류 속에서 영화 속 공간의 중요성을 읽어내었다. 그러자 비로소 영화적 공간은 독립적인 담론의 위상을 갖게 된다. 영화학 내외부에서 일어난 이러한 학문적 흐름의 변화를 영화학의 ‘공간적 전회(spatial turn)’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본다.

이 책의 독창성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진영을 중심으로 영화(학)의 공간적 전회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저자는 통시적 접근과 공시적 접근을 순차적으로 활용한다.
먼저 저자는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공간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부상한 시기를 2000년대 후반 이후로 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크게 세 개의 시기를 통과해왔다. 그것은 각각 계몽의 시기, 성찰의 시기, 미학의 시기로 요약된다. 1980년대 계몽의 시기에는 사회운동과 결합한 액티비즘 성향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고, 1990년대 성찰의 시기는 창작자의 시각과 개성이 드러나는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00년대 미학의 시기는 영화와 미술이라는 두 영역의 경계가 무너지고 상호 간에 협력이 일어나던 때이다.
특히 미학의 시기에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다큐멘터리라고 불리기 힘든 작품들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 미술과 영화의 영역을 횡단하는 작품, 그리고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한 작품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 서로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양식을 추구했지만, 대체로 동시대의 공간성을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부류로 묶일 수 있었다.

이 지점에서 원론적이지만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왜 기존의 분류학적 기준으로는 하나의 장르로 묶이기 힘든 여러 유형의 다큐멘터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간에 주목했던 것일까? 저자는 앙리 르페브르, 데이비드 하비, 에드워드 소자 등의 공간 개념, 그리고 이푸 투안, 에드워드 렐프, 마크 오제 등의 장소 개념을 빌려와 오늘날 공간이 하나의 키워드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역사적 필연성을 탐색한다. 공간 개념을 앞세운 비판 지리학자들은 공간에 은폐된 사회적 모순을 폭로하면서, 역사 유물론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공간이 물화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장소 개념을 앞세운 인문 지리학자, 인류학자들은 과거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을 내포하던 장소가 오늘날 스쳐 지나갈 수 있으며 소비될 수 있는 비장소로 전락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즉, 오늘날 공간과 장소는 모두 양적으로 환원 가능하고 수치로 셈할 수 있는 자본과 상품과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
특히 과거 근대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 속에서 사회적 공간이 창조적으로 파괴되고,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를 통해 공간이 자본의 축적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공간은 그것의 사회적 관계를 상실하고 장소는 그것의 인본주의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염두에 두는 가운데 저자는 동시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나타나는 공간들이 역사적으로 파편화되고, 잔여로 남겨지고, 폐허가 되었음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저자는 동시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공간들이 붕괴 직전에 이른 현실의 징후이자 알레고리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중반부 이후는 2000년대 후반, 즉 미학적 시기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가 사회적 공간에 개입하고 그것을 표상하는 방식을 추적해나간다. 여기서 무수히 많은 다큐멘터리가 호명되고 분석된다. 그것들은 종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분류된 다음에 설명되어진다. 그 내용을 거칠게 요약 및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동시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는 근대성의 논리에 의해 폐허, 잔여, 기념비화 된 공간들 자체를 텅 빈 기표와 같은 즉자적인 공간 이미지로 제시하거나, 그 텅 빈 이미지에 알레고리적으로 깃들어 있는 의미, 기억, 역사를 복권해내려고 한다.
한편, 참여적이고 수행적인 성향의 다큐멘터리들은 특정 사회적 공간에 직접 개입하여 그곳에 강제된 자본주의적 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해프닝과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한다. 이 외에도 일부 작품들은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수집한 공간 이미지들을 창의적으로 배열하여 특정 사회적 공간에 대한 열린 해석을 가능케 한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는 공간을 동질화하는 힘에 맞서 공간을 이질화하는 미학적 실천을 전개해나가고 있었다.

끝으로 저자는 공간성과 관련된 영화적 담론이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한다. 영화적 공간은 사회, 문화, 정치, 경제, 철학, 미학, 역사 등의 다양한 결들이 중층적으로 결정되어 있어 그것의 특성을 섣불리 규정하기 힘들며, 또 그렇기 때문에 이 논의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적 “공간은 시간의 켜들을 품고 현재를 새롭게 혹은 제대로 대면하도록 하는 영매이자 나아가 미래를 구상하는 지속의 매체”이다. 영화적 공간에 대한 관심을 지속 및 확장하면 그 끝에서 세계에 대한 관심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다음과 같다. 영화와 현실은 공간을 통해 그리고 공간 속에서 서로 교통하고 있으며, 그 두 세계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의 질적 도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글쓴이 이도훈
영화 비평 전문 계간지 『오큘로』 편집인이며,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오큘로』 홈페이지 http://www.okul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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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에서 경쟁력 있는 제3후보가 적어도 한 명이라도 출마한다면, 1,000만이라는 숫자는 유효 투표의 약 3분의 1에 해당해 당선 확정에 근사한 수치다. 2005년 이후 천만 관객을 넘은 한국 영화들은 권력과 관련되는 내용을 다루었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사회 부조리와 관련된 이슈들을 주로 다루었다. 1,0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한국 사회의 정치 문화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문화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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