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사물> 1장 발제문입니다

작성자
Yeongdae Park
작성일
2018-04-10 17:44
조회
1154
□ 다지원 <말과 사물> 세미나 ∥ 2018년 4월 10일 ∥ 발제자: 박영대
텍스트: 푸코, 『말과 사물』, 1장

1. 11쪽 : “거기에서는 사물들이 몹시 상이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놓여’ 있고 ‘배치되어’ 있어서, 사물들을 위한 수용 공간을 찾아내거나 이런저런 자리들 아래에서 공통의 장소를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 헤테로토피아는 불안을 야기하는데, 이는 아마 헤테로토피아가 언어를 은밀히 전복하고, 이것과 저것에 이름 붙이기를 방해하고, 보통 명사들을 무효가 되게 하거나 뒤얽히게 하고, ‘통사법’을, 그것도 문장을 구성하는 통사법뿐만 아니라 말과 사물을 ‘함께 붙어 있게’하는 덜 명백한 통사법까지 사전에 무너뜨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유토피아는 이야기와 담론을 가능하게 하는 반면에, 즉 유토피아는 언어와 직결되고 기본적으로 파불라의 차원에 속하는 반면에, 헤테로토피아는 화제를 메마르게 하고 말문을 막고 문법의 가능성을 그 뿌리에서부터 와해하고 신화를 해체하고 문장의 서정성을 아예 없애 버린다. …… 보르헤스를 읽을 때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거북함은 아마 언어가 손상된 사람의 깊은 불안과 유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장소와 이름의 ‘공통성’을 상실한 탓일 것이다. 아토피아, 아파지아.”

⇒ 보르헤스의 엉뚱한 분류는 웃음과 공포심을 함께 준다. 왜냐하면 그 분류가 헤테로토피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헤테로토피아는 ‘다른(이질적인) 장소’를 뜻한다. 하지만 이 이질적 장소는 단순히 우리의 장소와 색다른 무언가를 뜻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의 ‘공간’, ‘공통의 장소’ 개념 자체를 무너뜨리는 이질성을 뜻한다. 그래서 헤테로토피아에선 다른 사물들을 함께 놓을 수 있는 작업대(수술대)나 체계화된 표가 없다. 당연시 해온 모든 근거들이 의문에 부쳐지고, 우리가 서있는 토대가 실은 단단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때문에 이러한 작업대와 표, 근거와 토대 위에서 작동하고 있던 우리의 언어는 더 이상 말이기를 멈출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주지만, 아주 오랫동안 웃게 만드는 것도 분명하다. 그게 헤테로토피아가 가진 능력이며, 동시에 푸코가 보르헤스의 글귀로부터 이 책을 쓰도록 만들고, 우리가 이 책을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기도 할 것이다.
푸코는 한 편에 병리학적 증상을 염두에 두면서 글을 써내려간다. 그러다 눈에 띤 것은 ‘아토피아’였다. 이는 사실 아토피(atopy)다. 역자처럼 ‘무 장소’, ‘장소 자체가 없음’을 뜻한다. 곧 아토피란 증상이 ‘공통의 장소 없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가 주변 환경과 공통의 장소를 만들 수 있으면, 아토피 증상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체라는 사물이 주변 사물들 사이에서 공통의 장소를 만들 수 없을 때, 신체는 이질성과 불안을 가려움과 발진으로 드러낸다. 아토피 자체가 신체의 헤테로토피아적 현상이다.
생각해보면, 책을 읽는 모든 행위는 아토피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책은 보르헤스의 분류처럼 언제나 우리가 딛고 있는 근거들을 와해시키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특히 어려운 책일수록, 좀이 쑤시고 몸이 꼬이는 것이 바로 정신의 아토피, 헤테로토피아적 증상에 다름 아닐까. 이 책이 지금 나의 테이블(작업대/표)를 부수고자 하며, 그래서 이 책과 나는 공통의 장소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더 많은 아토피를, 더 많은 헤테로토피아를 마주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 웃음과 공포가 책의 힘이니까 말이다.
<서문>의 결론은 이렇다. 이처럼 우리의 테이블은 당연하지 않다. 우리는 매 순간, 매 시대 헤테로토피아를 덮은 독특한 지반 위에서 살아왔다. 이 위에서 말하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학문과 생각, 상식을 가능케 했던 토대, 즉 에피스테메를 살펴봐야 한다. 원래 당연하다는 의미의 선험적인 토대가 아닌, 역사적으로 변해왔고 앞으로 변해갈 수 있는 동시에 우리 자신을 넘어서 있다는 의미에서 선험적인 토대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에피스테메는 시대를 따라가는 역사이기 전에 그런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지형’에 대한 탐구, 즉 고고학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근대를 구성하고 있는 지형을 탐구한다면, 그래서 그 아래에 놓여있는 헤테로토피아를 드러낸다면, 우리는 새로운 아토피를 느끼고 다시 새로운 지형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사유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을 넘어서는 푸코만의 방법인 셈이다. 인간을 넘어서야 한다는 니체의 말에 대한 응답으로서.

2. 41쪽 : “한곳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모든 얼굴, 성장을 한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왕과 왕비는 가장 흐릿하고 가장 비현실적이며 가장 손상되기 쉬운 이미지다. 가령 한 번의 움직임, 약간의 빛만으로도 그들은 쉽게 사라질 수 있다. 그들은 또한 그림 안의 모든 인물 중에서 가장 소홀히 취급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 뒤로 교묘하게 끼어들고 생각지도 않은 공간을 조용히 차지하고 있는 이 반영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범위 내에서 왕과 왕비는 가장 덧없고 가장 비현실적인 형태다. 역으로 그들은 그림의 외부에 있음으로써 본질적 비가시성 속으로 물러남에 따라, 재현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중심이 된다. 누구나 그들과 대면하고 누구나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공주 역시 그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나들이옷을 입고 나선 것이다. …… 구성의 진정한 중심은 바로 이런 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 중심 혹은 근거란 원래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다. 감춰져 있으며, 아주 얼핏 슬쩍 보일 뿐이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중심을 작품 속에 넣으면서, ‘이미지는 액자의 경계를 넘어’섰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지가 액자를 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다른 모든 것이 액자를 넘어 안으로 들어오고, 이 모든 것을 이미지로 담아내려 했다는 점에서 뒤집힌 적용이다.

3. 42쪽 “거울이 베푸는 아량은 완전히 허위일 것이고, 어쩌면 거울은 보여주는 만큼, 심지어는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이 감출 것이다. 국왕이 왕비와 함께 당당히 자리하고 있는 장소는 미술가와 관람자의 자리이기도 하다. 거울의 안쪽에는 또한 익명의 과객과 벨라스테스의 얼굴이 나타날 수 있거나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다. 실제로 이 반영의 기능은 심층적으로 그림과 무관한 것, 즉 그림을 구상한 시선과 그림의 전개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림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국왕이 그림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거울의 안쪽에 나타나는 것처럼, 미술가와 방문자는 그림의 오른쪽과 왼쪽에 현존하기 때문에 거울 속에 드러날 수 없다. …… 이는 모든 재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를테면 모든 재현의 명백한 정수인 이 그림에서도, 온갖 거울, 반영, 모조, 초상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보는 것의 비가시성은 아마도 보는 이의 비가시성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을 것이다. 장면의 주위로 재현의 기호들과 연이은 형태들이 배치되지만, 재현의 모델과 재현의 지배자에 대한, 재현의 대상이 되는 사람뿐만 아니라 재현하는 작가에 대한 재현의 이중관계, 이 관계는 필연적으로 끊어진다. …… 즉 재현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 달리 말하자면 재현과 닮은 사람, 그리고 재현이 닮음으로만 비치는 사람이 사방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 주체 자체, 즉 동일 존재(그 자체, 그 사람)는 사라졌다.”

⇒ 결론적으로,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재현 자체를 끝까지 밀어붙인 재현이다. 재현된 이미지(=공주와 시녀들), 재현하는 자(=화가), 재현의 근거이자 중심(=왕과 왕비), 재현을 감상하는 독자(=방문자)를 모두 화폭에 담아냈다. 기존의 재현이 재현된 이미지만 보여주었다면, 이 그림은 재현을 끝까지 밀어붙여서 재현의 모든 요소를 다 재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현의 정수조차 재현의 사람을 담아내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어떤 방식으로도 재현의 근거가 되는 사람들(모델, 화가, 독자)를 완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 이렇게 재현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람을 잃어버리면서, 재현은 ‘닮음’을 넘어서는 순수재현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여기가 결론인 것 같은데, 이 ‘사람’의 상실은 잘 이해가 가지 않네요. 같이 이야기해 보면 좋겠습니다. 아마 1부 전체에서 이 지점이 반복될 것 같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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