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_발제] p.539-555

작성자
objectapple
작성일
2020-10-11 10:00
조회
325
4장. 분열-분석 입문
4) 분열-분석의 첫째 정립적 임무
1. 욕망적 생산과 그것의 기계들
2. 부분대상들의 지위

3. 수동적 종합들
이 분산, 현실적 구별, 연줄의 부재라는 조건들이 어떻게 어떤 기계적 체제를 허용하는지, 이렇게 규정된 부분대상들이 어떻게 기계들과 기계들의 배치체들을 형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 → 그 답은 종합들의 수동적 성격 속에, 또는 같은 얘기지만, 해당 상호작용들의 간접적 성격 속에 있다.
부분대상들의 연결의 종합들은 간접적이다. (...) 이는 머리가 둘인 흐름들과도 같아서, 이 흐름들을 통해 우리가 분열-흐름 내지 흐름-절단이라는 개념으로 고찰하려 했던 / 그런 생산적 연결 전체가 행해진다. 그래서 흐르게 하고 절단한다는 무의식의 참된 활동들은, 수동적 종합이 / 상이한 두 기능의 상대적 공존과 이전을 보증하는 한에서, 이 수동적 종합 자체에 있다.

이제 두 부분대상에 연합된 각 흐름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서로 겹쳐 있다고 해 보자. 이 흐름들의 생산은 이 흐름들을 방출하는 대상들 x 및 y와 관련해서는 구별된 채로 있지만, 이 흐름들이 현전하는 장은 이 흐름들을 서식시키고 절단하는 대상들 a 및 b와 관련해서는 구별되지 않으며, 그래서 부분 a와 부분 b는 이 점에서 분별될 수 없다. 부분 a와 부분 b는 혼합 영역에서만 분별될 수 없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이 영역에서는 기능이 바뀌어 버렸기에 부분 a와 부분 b는 두 흐름이 더 이상 겹치지 않는 데서 한층 더 서로 배타적으로 구별될 수 없다고 언제든지 상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a와 b가 <포괄적 분리>의 역설적 관계 속에 있는 하나의 새로운 수동적 종합 앞에 있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흐름들의 겹침의 가능성이 아니라, 흐름들을 방출하는 대상들의 교체의 가능성이 남는다. 현전하는 각 장의 가장자리에서는 <간섭무늬>들이 발견되는데, 이 무늬들은 다른 흐름 속에 있는 한 흐름의 여분을 증언하며, 한 흐름에서 다른 흐름으로의 이행 내지 느껴지는 생성을 이끌어 주는 <잔여적 결합 종합>들을 형성한다.

4. 기관 없는 몸의 지위
이 종합들은 필연적으로 기관 없는 몸의 정립을 내포한다. 이는 기관 없는 몸이 부분대상들-기관들의 반대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기관 없는 몸 그 자체는 욕망의 두 활동, 욕망의 두 머리를 중화하거나 작동시키는 것으로서, <연결의 최초의 수동적 종합>에서 생산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기관 없는 몸은 <반생산의 무형의 유체>로서만이 아니라 <흐름의 생산을 전유하는 받침대>로서도 생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관 없는 몸은 대상들-기관들을 밀쳐낼 수도 있고, 이것들을 끌어당기고 전유할 수도 있다.

기관 없는 몸은 대상들-기관들에 대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유기체와 자신의 대립 및 유기체와 대상들-기관들의 대립을 확실히 할 뿐이다. 기관 없는 몸과 부분대상들-기관들은 / 유기체에 공히 대립된다.

부분대상들-기관들은 기관 없는 몸 위에 매달리며, 그 위에서 포괄적 분리와 유목적 결합, 즉 유기체와 유기체의 조직화에 끊임없이 반발하는 / <겹침과 교체>라는 새로운 종합들 속에 들어간다.

그 바탕에서, 부분-기관들과 기관 없는 몸은, 분열-분석에 의해 그렇다고 생각되어야 하는 <하나의 같은 것, 하나의 같은 다양체>이다. 부분대상들은 <기관 없는 몸의 직접적 권력들>이며, 기관 없는 몸은 <부분대상들의 원료>이다.

기관 없는 몸은 내공의 이런저런 등급으로 공간을 언제나 채우고 있는 질료이며, 부분대상들은 내공=0으로서의 질료에서 출발해 공간 속에서 현실계를 생산하는 이 등급들, 이 내공 부분들이다. 기관 없는 몸은 가장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내재적 실체이다. 그리고 부분대상들은 이 실체의 궁극적 속성들과 같은 것으로, 이 속성들은 현실적으로 구별되고 이 때문에 서로 배제되거나 대립될 수 없는 한에서 이 실체에 귀속한다. 부분대상들과 기관 없는 몸은 분열증적 욕망 기계들의 두 질료적 요소이다. 전자는 일하는 부품들과 같고 후자는 부동의 모터와 같으며, 전자는 미시-분자들과 같고 후자는 거대 분자와 같으며, 이 둘은 한데 어우러져 욕망의 분자적 사슬의 두 끝에서 연속성의 관계를 이룬다.

5. 기표 사슬과 코드들
사슬은 욕망 기계에서의 전달 장치 또는 재생산 장치와 같다. 사슬이 기관 없는 몸과 부분대상들을 (통합함이 없이, 통일함이 없이) 집결하는 한에서, 사슬은 기관 없는 몸 위에 부분대상들의 분배와, 전유의 유래인 기관 없는 몸을 부분대상들로 복귀시키기와 합류한다.

사슬은 포괄적 분리들이 생산적 연결들을 다시 절단하는 한에서, 기관 없는 몸 위에 있는 포괄적 분리들의 그물이다. 사슬은 생산적 연결들을 기관 없는 몸 자체로 이행시키고, 이렇게 함으로써 흐름들을 수로화하거나 <코드화>한다.

코드와 공리계라는 개념들 자체는 그램분자적 집합들에 대해서만 타당해 보이며, 거기서는 기표 사슬이, 특유화된 받침대 자체 위에서, 이탈된 기표에 관련하여, 특정하게 규정된 배열형태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고유하게 분자적인 사슬에서는 사태가 전혀 다르다. 기관 없는 몸이 그램분자적 집합들의 분자적 극한을 표시하는 / 특유하지도 않고 특유화되지도 않은 받침대인 한에서, 사슬은 흐름들을 탈영토화하고 흐름들이 기표의 벽을 통과하게 하는 것 말고 다른 기능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코드들을 해체하는 것 이외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 (...) 그것은 도주의 사슬이지, 더 이상 코드의 사슬이 아니다.

이 분자적 사슬은 욕망의 기호들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기표이다. 하지만 이 기호들은, 거기서 [모든 것이 가능한] 포괄적 분리들의 체제 아래 있는 한, 더 이상 전혀 기표들이 아니다. 이 기호들은 그저 어떤 본성을 지닌 점들이요, 기관 없는 몸 위에서 자유로이 노닐며 아직 그 어떤 구조화된 배열형태를 형성하지 않는 (또는 더 이상 형성하지 않는) 추상적인 기계적 형상들이다. 모노가 말하듯, 우리는 <맹복적인 조합들의 놀이 말고ᅟᅳᆫ 아무것도 분별되지 않는> 그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기능적 특성들에 의해서 그런 기계로 있는 하나의 기계를 착상해야만 한다.

그에 대응하는 사슬이 배타적인 그램분자적 배열형태들 속에 감겨 있는 한에서 실효적으로 코드들을 형성한다면, 이 사슬은 가능한 모든 형상을 포함하는 분자적 섬유에 따라 풀려나면서 코드들을 파괴하기 때문니다. (...) 유전 코드는 결국 유전자 탈코드화와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 분자적 사슬은 유전자 무의식이 항상 주체로 머물면서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형식이다.

6. 기관없는 몸, 죽음, 욕망
기관 없는 몸은 죽음의 모델이다. (...) 죽음은 욕망되지 않는다. 기관 없는 몸이나 부동의 모터의 자격을 지닌 / 욕망하는 죽음이 있을 뿐이며, 일하는 기관들의 자격을 지닌 욕망하는 삶 또한 있다. 거기에는 두 욕망이 있지 않으며, 기계 자체의 분산 속에, 욕망 기계의 두 두품들, 두 종류의 부품들이 있다. (...) 어떻게 그것은 한데 어울려 기능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기능이 아니고, 단지 분자적 기능의 (구조적이지 않은 ) 조건이기 때문이다. 기능이 나타나는 것은, 부동의 모터가, 예전 조건들 아래서, 말하자면 부동이기를 그치지 않으며 또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함이 없이, 기관들을 기관 없는 몸 위로 끌어당기고, 외견상 객관적 운동 속에서 기관들을 기관 없는 몸에 전유하는 때이다. 밀쳐 냄은 기계가 기능하는 조건이지만, 끌어당김은 기능 자체이다.

문제는 욕망 기계의 순환 속에서 / 죽음의 모델을 죽음의 경험이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부단히 번역하고 부단히 변환하는 일이다. 즉 안에서 (기관 없는 몸 안에서) 올라오는 죽음을 / 밖에서 (기관 없는 몸 위로) 도래하는 죽음으로 변환하는 일이 문제이다.

7. 죽음을 분열증화하라
죽음의 모델과 구별되는 죽음의 경험이란 무엇일까?

죽음의 경험은 무의식의 가장 일상적인 일이다. 정확히 그 까닭은, 죽음의 경험이 삶 속에서, 삶을 위해, 모든 이행 내지 모든 생성 속에서, 이행과 생성으로서의 모든 내공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 모든 내공은 자기 고유의 삶 속에 죽음의 경험을 데리고 다니며 감싸고 있다. 그리고 필경 모든 내공은 결국 종식되며, 모든 생성 자체는 죽음-생성이다!

블랑쇼의 죽음의 이중적 성격
1) 한 양상 아래서 외견상 주체는 누군가(On)로서 살고 여행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누군가 죽기를 그치지도 않고 끝내지도 않는다.>
2) 다른 양상 아래서 나(Je)로 고정된 이 동일한 주체는 실제로 죽으며, 말하자면 결국 죽기를 끝내는데, 왜냐하면 그 주체는 그를 이렇게 나로서 고정하는 마지막 순간의 현실 속에서 온통 내공을 해체하고 그 내공이 감싸는 0으로 데려감으로써 죽는 것을 통해 끝나기 때문이다.

죽음의 경험은 그야말로 확장된 경험을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 욕망 기계들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고 알게 해 주어야 한다. 또 인접 부품으로서의 주체는 언제나, 죽음의 경험을 해 가는 어떤 <누군가>이지 / 모델을 받아들이는 어떤 나 (un Je)가 아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델 자체는 나 자체(le je)가 아니라 기관 없는 몸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모델에서 경험으로 가는 것, 모델에서 경험으로 재출발하고 되돌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죽음을 분열증화하는 것이며, 욕망 기계들이 수행하는 일이다. (...) 그렇다, 밀쳐 냄으로의 회귀가 다른 끌어당김들, 다른 기능들을 조건 지을 것이며, 기관 없는 몸 위에서 일하는 부품들의 작동을 조건 지을 것이며, 둘레에서 다른 인접 부품들의 작업을 조건 지으리라. (...) 경험으로서의 영원회귀, 그리고 욕망의 모든 순환의 탈영토화된 회로.

8. 정신분석에서 죽음에 대한 낯선 숭배 ─ 사이비-본능
정신분석은 삶의 노래여야 하리라. 그렇지 않다면 아무 가치도 없다. 실천적으로,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삶을 노래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리라.

프로이트가 죽음을 초월적 원리로 만드는 까닭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죽음이 모델도, 경험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이와 반대로 무의식에는 죽음의 모델과 경험이 있기 때문에 죽음 본능은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죽음은 욕망 기계의 한 부품으로, 이 부품 자체는 기계의 기능과 그 에너지 변환 체계 속에서 판단되고 평가되어야지, 추상적 원리로 그래서는 안 된다.

프로이트가 초월적 죽음 본능을 원리로 세운 궁극적 이유를 이 방향에서 찾는다면, 실천 자체에서 그것을 발견하리라. 왜냐하면 원리는 / 사실들과 아무 관계가 없을지라도, 사람들이 실천에 대해 품는 착상, 그리고 사람들이 강요하려 하는 착상과는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욕망의 추상적·주체적 본질인 리비도에 대해 가장 깊이 있는 발견을 해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 본질을 자아의 재현이라는 주관적 재현 속에서 다시 소외했고 다시 투자했기 때문에, 이 본질을 오이디푸스라는 잔여적 영토성 위에서, 거세라는 전제군주 기표 아래서 재코드화했기 때문에, 삶의 본질을 자아에 맞서는 반전된 형식으로, 죽음 자체의 형식으로밖에는 착상할 수 없었다. 삶의 이 중화, 이 반전은 여전히 우울하고 소진된 리비도가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고 살아남기를 꿈꿀 수 있는 마지막 방식이다.

부패와 죽음의 깊은 냄새는 바로 오이디푸스, 즉 늪지의 땅에서 나온다. 이 죽음을 오이디푸스적 삶을 위한 보존실로 만드는 것은 거세, 독실한 금욕적 상처요, 기표이다. 욕망은 그 자체로는 사랑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사랑하는 힘, 즉 증여하고 생산하고 기계 작동하는 덕이다.

분열-분석이 행하는 모든 파괴는 정신분석의 이 보존실보다 더 나은 가치가 있지 않을까? 이 파괴들은 긍정적 임무의 일부를 이루지 않을까? (...) 분열-분석은 무엇을 요구할까? 바깥과의 약간의 참된 관계, 약간의 진짜 현실 말고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가벼움의 권리와 근본적 무자격의 권리를, 즉 분석가의 진료실에 들어가, 당신한테 악취가 난다고 말할 권리를 요구한다. 거기서는 큰 죽음과 작은 자아의 냄새가 난다.

9.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의 친화성 문제
10. 분열-분석의 기계론적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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