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2/20 312~326 (내일 드디어 마지막!)

작성자
voov11
작성일
2022-02-19 21:16
조회
569
11. 긍정의 의미

나귀와 낙타

- 나귀는 낙타와 마찬가지이다. 가장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 낙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겸손, 고통과 질병의 감수, 처벌하는 자에 대한 인내, 진리가 양식으로 도토리와 석탄을 주기라도 하듯이 진리에 대한 선호 ..
나귀와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는 힘들일 뿐 아니라 무게를 달고 평가하는 등을 가지고 있다.
(현실적인 것의 무게)
여기서 긍정하는 것은 짐을 지고 떠맡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복종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감당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나귀의 관념이다.
나귀는 그가 진 짐, 그가 책임지는 짐의 무게를 현실적인 것의 긍정성으로 느낀다.
무거움의 정신은 부정의 정신, 허무주의에 의해, 반응적 힘들에 의해 변화된 정신이다. 지는 모든 짐 속에서 분별있는 눈은 허무주의 산물들을 본다.
짐들은 .... 현실적인 것의 긍정성을 갖는 것 같다.
나귀는 우선 예수이다.

짐의 무게는 지친 자신의 근육 무게와 혼동된다. 그는 현실적인 것을 감당하면서 자기 자신을 감당하고 자기 자신을 감당하면서 현실적인 것을 감당한다.
그 결과 속에서 현실적인 것과 그것의 수락은 있는 그대로, 즉 거짓 적극성, 거짓 긍정성인 채로 있다.

그런 긍정은 영원히 부정적 전제들의 결과의 긍정이고, 대답의 예, 무거움의 정신의 예이다.
나귀는 허무주의자체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줄 모른다.

니체는 긍정을 단순한 기능, 존재의 기능이나 존재하는 것의 기능으로 만들 긍정에 대한 모든 입장에 반대하면서 비판한다.
인간은 공정의 공무원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니체가 싸우고 있는 적의 정체를 알아보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그것은 긍정을 진리의 진실성, 현실의 긍정성과 혼동하는 변증법이다.
헤겔 논리학의 존재는 자신을 긍정하는 순수하고 공허한, 단지 사유된 존재일 뿐이나 그것은 대립자와 다르지 않다.
완전히 허무적인 생성이다.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그 생성을 책임질 힘과 관심으로서 모든 반응적 속성을 보존한다.


니체가 말하고 싶은 세가지

- 존재, 진리, 현실은 허무주의의 화신이다. 삶을 부정의 노동에 종속시키고, 삶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삶의 사지를 자르고, 삶을 부정하며 삶을 반응적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 수락, 존재하는 것의 긍정으로 진리의 진실성이나 현실의 긍정성으로 인식된 긍정은 거짓긍정이다.
나귀와 낙타는 사자의 대립자이다. 사자 속에서 부정은 긍정하는 힘이 되었지만 나귀와 나타에게서는 긍정이 부정에 봉사하는 단순한 부정하는 힘인채로 있다.
- 긍정은 거짓된 입장은 인간을 보존하는 방식이다. 최후의 인간은 가장 오랫동안 산다.




평가

살아있는 세계는 권력의지이며 다양한 힘들 아래서 실현되는 거짓의 의지이다.
어떤 힘 아래서든지 거짓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은 항상 평가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평가이고, 감각될 수 있는 것 조차 평가이다.

존재, 진리, 현실 자체는 평가로서만 말하자면 거짓말로서만 가치가 있다.
그러한 힘들 중 하나는 부정의 힘이나 성질에 봉사했다.
그떄 군림하는 것은 삶과 삶을 대립시키면서 삶을 총체적으로 부정하고 그것을 특별히 반응적인 것으로 승리하게 만드는 권력의지의 성질인 한에서 부정이다.

반대로 거짓의 보다 고귀한 힘, 삶이 전적으로 긍정되고 특수성이 적극적으로 된 성질 그것은 바로 권력의지의 다른 성질이다.
그것은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차이를 향유하는 의지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살아있는 것을 해방시키고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이며 삶을 가벼운 것, 적극적인 것으로 만든다.
과잉을 이용함으로서만이 창조가 존재한다.
부정을 긍정의 힘으로 고양시킨다. 모든 힘 속에서 긍정하는 것, 긍정 자체를 긍정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사자도 아직 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 그것은 바로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다.


긍정의 의미

진실도 현실도 아니고 평가이며
수락으로서의 긍정이 아니라 창조로서의 긍정이며
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형태로서의 초인이라는 점

예술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거짓의 가장 고귀한 힘,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나 초인의 천재성을 실현한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이다.

아니오라고 말할 줄 모르는 나귀는 긍정의 희화화이다.
디노이소스의 예는 아니오를 말할 수 있다.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부정에게서 자율적인 모든힘을 박탈했다. 즉 부정을 긍정하는 힘에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긍정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 짐을 지지도 견디지도 수락하지도 않는 것이다.



12. 이중의 긍정 : 아리아드네

모든 힘 속에서 긍정이란 무엇인가?

- 긍정은 존재이다. 존재는 긍정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에게 짐 지울 요소도 아니다. 긍정자체는 존재이고, 존재는 그것의 모든 힘 속에서의 긍정일 따름이다.
긍정은 자기자신과 다른 어떤 대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대상인 한에서 존재이다.
이것이 긍정의 대상으로서의 긍정, 이것이 존재이다.

그러나 생성을 존재로 고양시키거나 생성에서 존재를 추출하는 어떤 다른 긍정의 대상인 한에서 그것은 존재이다.
그래서 모든 힘 속에서 긍정은 이중적이다.

- 최초의 긍정은 존재이지만,
두번쨰 긍정의 대상으로서만 존재이다. 두 긍정은 총체적으로 긍정하는 힘을 구성한다.

(1) 차라투스라의 두 마리 짐승, 독수리와 뱀 : 영원회귀 관점에서 독수리는 큰 연도, 우주적 시기, 뱀은 개별적인 생애
독수리는 근 원을 그리며 친구로서 뱀이 독수리의 목 주위를 감는다.

(2) 성스러운 부부 디오니소스- 아리아드네

아리아드네가 우울한 인간의 표상인 테세우스를 사랑할 때 그녀는 단지 그 남자에게서 여성의 이미지이다.
버리받은 아리아드네는 고유한 전환이 도래한다. 이롭고 긍정적이고, 해방된 아니마.

아리아드네는 두번째 긍정과 같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 어떤 다른 긍정을 요구한다.

디오니소스적 생성은 존재, 영원이나 상응하는 긍정자체가 긍정될 때에만 한에서이다.
존재는 영원한 긍정, 나는 영원히 너의 긍정이다. 서로를 서로에 의해 긍정시킨다.

(3) 미로 또는 귀들

미로는 무의식, 영원회귀 자체이다.
잃어버린 길이 아니라 우리를 존재하고, 존재했고 존재할 동일한 순간에 동일한 지점에 다시 데려다 주는 길이다.
미로는 생성이며 생성의 긍정이다.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를 만난 동안 미로는 우월한 가치들, 부정과 원한의, 도덕의 실이었다.
디오니소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스스로가 미로, 생성, 존재인데 이때 그의 긍정은 긍정되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생성이다.
아리아드네에게 듣도록 요구할 뿐 아니라, 긍정을 긍정하도록 요구한다.

귀는 미로이다. 미로는 우리를 존재로 인도한다.
생성이기만한 존재가 존재한다.
아리아드네는 디오니소스의 귀를 가지고 있고,
아니아드네는 디오니소스의 귀에 사려깊은 말을 한다.
그녀가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들었을 떄, 그것을 디오니소스가 듣고 있는 두번째 긍정의 대상으로 삼는다.

질문 : 전체적으로 두번째 긍정의 대상으로서만 존재이다. 라는 말이 전체적으로 이해할 때 일종의 관계? 로 이해하면 될까요?
이때 아리아드네와 디오니소스 간의 미로 - 듣기 - 말하기의 관계와 과정을 통해서 이해하자면
뒤에 나오는 이 과정이 적극적 생성의 시간? 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두번째 긍정의 대상이 되는 그 시간 자체가 (변화와 차이의 시간?_) 긍정인지?
-> 이것이 다수, 생성, 우연과 함께 해석
-> 대화, 접속, 마주침 등 이런 관계, 행위?


긍정과 부정을 권력의지의 성질로 간주할 때일의적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이해한다.
부정은 긍정에 대립되지만 긍정은 부정과 다르다.
대립은 부정의 본질이다. 차이는 있는 그대로의 긍정의 본질이다.
부정은 대립의 고통과 노동이듯이 긍정은 자기자신의 차이의 향유와 놀이이다.

긍정은 처음에 다수, 생성, 우연으로 상정된다.
다수는 다른것과의 차이
생성은 자신과의 차이
우연은 차이 혹은 분배적 차이이다.

질문 : 우연의 뜻이 잘 이해안갑니다.

두번째 긍정이 첫번째 긍정을 대상으로 삼는 반영의 계기이다. 긍정은 다시 배가된다.
두번째 긍정의 대상인 그것은 긍정된 긍정 자체이고, 다시 배가된 긍정이며, 가장 고귀한 힘으로 고양된 차이이다.
(거울을 서로 마주보게 하면 그 안에서 끝없이 거울이미지가 확장되는 방식으로 배가 되는 것?)


생성은 존재이고 다수는 하나이며 우연은 필연이다
생성의 긍정은 존재의 긍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새로운 힘으로 인도하는 두번째 긍정의 대상인 한에서이다.


꿈꾸는 것은 생성의 존재, 다수의 하나, 우연의 필연이다.
있는 그대로의 차이의 존재이거나 영원회귀이다.

긍정하는 두 힘의 현존과 두 긍정의 현존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생성과 존재는 그것이 두번째 긍정의 대상인 한에서
하나의 힘에서 다른 힘으로 가는 동일한 긍정이다.

첫번째 긍정은 디오니소스이고 생성이다.
두번쨰 긍정은 아리아드네, 거울, 약혼녀, 반영이다.
첫번쨰 긍정의 두번째 힘은 영원회귀이거나 생성의 존재이다.
그것은 긍정속에서 차이를 발전시키고 긍정의 긍정 속에서 차이를 반영시키며 긍정된 긍정 자체 속에 그것을 지나가게 만드는 미분적 요소로서의 권력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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