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호] (연재) 종합적 사회과학자로서의 니체-2:니체와 종교학(上)

기고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3 12:32
조회
701
니체와 종교학(上)

김상범


1.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 의하면 신은 인간본질의 소외에 의하여 나타난다. 신의 본질은 사실은 인간이 '덕'(virtu) 혹은 '훌륭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신에 대한 입장은 니체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포이어바흐에게는 종교가 인간의 결핍의 산물인 반면 니체에게는 최초의 종교가 풍요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반대된다. 다음의 두 인용문을 대조해보라.

“삶이 공허하면 할수록 신은 풍요로우며 더 구체적이 된다.... 신은 결핍감정으로부터 발생한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강대석 옮김, <기독교의 본질>(한길사, 2008), p.155)

“스스로를 여전히 믿고 있는 민족은 자기네의 고유한 신 또한 갖는다. 신 안에서 민족은 그들을 정상에 위치시키는 조건들, 즉 그들의 덕을 숭배한다.-그 민족은 자신에 대한 기쁨을,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그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존재에 투사한다. 풍요로운 자는 베풀기를 원한다. 긍지에 찬 민족은 희생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안티크리스트>,§16)

그러나 점차 이 긍지가 사라져가고 민족의 힘이 약화되기 시작할 때, 즉 민족이 몰락해갈 때, 역설적으로 이 민족의 신은 보편적인 도덕의 신이 되어간다. 니체는 이러한 사례로서 유대교를 들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물질적 상황이나 조건이 변화하면 신의 개념도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을 니체는 역설하고 있다.

“왜 그런 신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물론; 한 민족이 몰락할 때; 미래에 대한 믿음, 자유에 대한 그들의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느낄 때; 복종이 가장 이로우며, 복종한 자의 덕목이 보존조건이라고 그들이 의식할 때, 그들의 신 또한 바뀌지 않을 수 없다. 그는...계속해서 도덕화하고. 모든 이를 위한 신이 되고,..., 사해동포주의자가 된다.”(같은 책, 같은 곳)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종교가 ‘물질적 조건의 반영’이라고 섣불리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러한 물질적 조건의 변화에 사제들이 대처하여 새로운 세계-해석을 제시하고 신 개념을 변형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니체의 문장에 집착하다보면 반영론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민족간의 전투, 승리, 화해 및 융합에 관한 모든 역사는, 모든 위대한 인종을 종합하는 일에서 모든 민족 요소들의 최종적 위계질서에 선행하는 모든 것은 그들 신들의 뒤죽박죽인 계보에, 그들의 전투와 승리와 화해의 전설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보편 제국에 이르는 길은 언제나 보편 신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고, 독립적인 귀족을 제압하고 행해지는 전제정치는 언제나 어떤 것이든 일신교로 나아가는 길을 터는 것이기도 하다.” (<도덕의 계보학>, 제 2논문, §20)

이러한 <도덕의 계보학>에서의 종교에 대한 소박한 유물론(종교에 있어서만, 다른 영역에서 니체는 반영론을 단호히 거부한다.), 즉 종교적 상상이 물질적 현실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는 반영론은 <안티크리스트>에서 극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반영론이 성립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유대교와 기독교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음과 같이 행한다.

“자기네의 신을 ‘선 그 자체’로 끌어내리는 피정복자들의 본능이 정복자들의 신에게서 선한 속성을 삭제해버린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배자들에게 그들의 신을 악마로 만들면서 복수하는 것이다.”(<안티크리스트>,§17)

이렇게 피지배 민족에 속하는 사제계급의 종교적 상상력은 물질적 질서(민족들 간의 지배-피지배관계)를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물질적 질서를 도덕적으로 해석하고, 이러한 도덕적 세계 해석의 바탕위에서 물질적 질서를 전복하고 새로운 '신의 질서'를 구축할 것을 요구한다. 사제들은 말하자면 언어조작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그들에 의해 '역사'와 '세계'는 도덕적 질서를 갖는 것처럼 해석된다.

"신 개념은 이제 사제 선동가들의 손아귀에서 도구가 되어버렸다. 이들은 이제 모든 행복을 보상으로, 모든 불행을 신에 대한 불복종의 벌로, '죄'에 대한 벌로 해석해낸다: 이것이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 개념을 영영 뒤집어버린, 소위 말하자면 "도덕적 세계질서"라는 가장 기만적인 해석방식이다."(<안티크리스트>, §25)

그리고 이러한 ‘도덕적 세계 해석’을 통해 사제들은 피지배 민족 내부에서 권력을 잡으려고 한다. 사제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도덕적 세계질서"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한 민족과 한 개인의 운명에서 신의 뜻은 지배적인 것으로, 즉 복종의 정도에 따라 그들을 처벌하고 보상하면서 입증된다는 것이다.

이런 측은한 거짓말을 대체할 실상은 다음과 같다: ...사제가 신의 이름을 오용하고 있다. ..신에 대한 불복종, 달리 말해 사제에 대한 불복종....은 이제 '죄'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이것이 진정 권력을 부리는 것이며, 사제는 죄에 의존해 생존한다. 그에게는 '죄를 범하는' 것이 필요하다...지상문제: "신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한다"-사실대로 말하자면: 사제에게 복종하는 자를.(<안티크리스트>, §26)

2.

앞에서 우리는 <도덕의 계보학>에 나타난 종교에 대한 반영론적 견해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도덕의 계보학>의 종교론에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도덕의 계보학> 제 2논문에서 니체는 ‘부채’를 통해 종교를 설명하고자 한다. 니체에 의하면 채권자와 채무자사이의 관계는 “가장 오래되고 근원적인 개인 관계”로서 단순히 개인들 간의 관계 속에서 뿐만 아니라, 조상세대와 현재세대의 ‘관계’,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선사시대의 척도로 재보면...공동체와 그 구성원도 언제나 채권자와 채무자라는 저 중요한 근본 관계 속에 있다.”(<도덕의 계보학> 제 2논문, §9)

“채무자의 그 채권자에 대한 사법(私法)적 관계는 또 한 번, 그것도 역사적으로 매우 주목할 만하고 예사롭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 현대인으로서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로, 즉 현재세대의 그들 조상에 대한 관계로 확대 해석되었다.”(<도덕의 계보학> 제 2논문, §19)

이러한 조상에 대한 부채의식은 종족의 힘이 커짐에 비례하여 증가하게 되고, 이러한 부채의식이 커짐에 따라 조상은 신으로 전화한다.

그리고 처음에 신에 대한 죄의식은 이러한 신에 대한 부채의식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죄의식은 사제들에 의해 (국가를 통해 탄생한) ‘양심의 가책’과 결합하게 됨으로써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고문하는 도구가 된다.

“양심의 가책을 지닌 이 인간은 자기 고문을 말할 수 없이 소름끼칠 만치 가혹하고 준엄하게 몰아가기 위해 종교적 전제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했다. 신에게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러한 생각이 그에게 고문의 도구가 된다.”(<도덕의 계보> 제 2논문, §22)

사제들은 끊임없이 부채의식에 불과했던 이러한 죄의식과 의무감을 도덕화하여 인간의 양심에다 새겨 놓고 양심의 가책과 결합시키면서, 인간을 병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화’ 때문에 ‘신의 죽음’이 선언되는 오늘날 까지도 인간은 죄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속죄하게, 즉 인간 자신이 인간의 채무를 상환하게 함으로써가 아니라, 신 자신이 희생을 통해 인간을 대신하여 속죄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에게 더 큰 죄책감(채무의식)을 느끼게 한다.

“...기독교의 저 독창적 착상과 갑작스레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즉 신 자신이 자기 자신한테 스스로 속죄받는다....채권자가 자신의 채무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사랑 때문에, 이것을 믿어도 될까?, 자신의 채무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도덕의 계보학>, 제 2논문§21)

3.

이렇게 <도덕의 계보학> 제 2논문에서 종교와 죄책감의 관계를 다룬다면, 제 3논문에서는 종교와 금욕적 이상에 대해서 다룬다. 그리고 이 금욕적 이상은 죄책감과 관련이 있다. 지금부터 이 금욕적 이상에 대해 살펴보고, 사제에 의한 금욕적 이상과 죄책감의 결합을 살펴보도록 하자.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 제 3논문에서 금욕적 이상이 “사제에게는 사제로서의 본래적인 신앙이나 권력을 부리는 최상의 도구, 또한 권력을 얻는 ‘최상의’ 면허를 의미”(<도덕의 계보학>제 3논문, §1)한다고 쓰고 있다. 이 말은 사제가 금욕적 이상을 앞세워 권력을 차지하기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금욕적 이상은 그들이 고통 받는 자, 병든 자로서의 민중을 지배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이들은 고통 받는 자, 병든 자들을 치유하는 ‘의사’를 자임해왔다. 그러나 니체는 이들이 진정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맨 먼저 ‘최면’을 통해서 고통을 ‘완화’시키는 금욕주의적인 처방을 내렸다.

“가능하다면 어떤 의욕이나 소망을 더 갖지 말아야 한다. 정동이나 ‘피’를 만드는 것이면 뭐든지 피해야 한다......그 결과는,,,생리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최면이다...제대로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삶을 존속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물질 소모이자 신진대사이다.”(<도덕의 계보학> 제 3논문, §17)

그러나 이러한 ‘최면’을 거는 방식만으로 고통을 제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금욕적 사제들이 자신들의 치는 양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선택한 두 번째 방법은 바로 ‘노동’이다. 사람들은 ‘노동’을 하는 동안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좀 정직하지 못하게 ‘노동의 축복’이라 부른다. 완화되는 이유는 고통받는자의 관심이 원칙적으로 고통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돌려지는 데에 있다.”(<도덕의 계보학> 제 3논문, §18)

이러한 ‘최면’과 ‘노동’은 모두 금욕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금욕주의적인, 하지만 ‘순진한’ 방식만으로 고통은 완전히 제어될 수 없었다. 니체는 이러한 ‘순진무구한 방식’외에도 ‘죄 있는 방식’, 즉 인간의 죄책감을 활용하는 방식이 있었다고 말한다. 니체에 의하면 사제들은 자신들이 관리하는 양떼들의 죄책감을 폭발시킴으로써 양떼들로 하여금 고통에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을 갈망하도록 했다.
그리고 사제의 관점에서 이러한 방식은 ‘효험’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민중은 유약해졌고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종교는 권력을 잡았고 인간을 길들여서 순종적이게 만들었다.

4.

이렇게 종교의 폐해가 막심함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종교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종교는 '자유정신','강자','독립적인 자'에게 이용되어야 하며, 이러한 '미래의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들 자유로운 정신이 해석하는 철학자란 전면적인 인간 계발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느끼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철학자는 인간을 교화하고 교육하기 위해...종교도 이용할 것이다. 그렇게 정선하고 교화하는 작업은 종교의 도움 없이는 행해지기 힘들며...... 지배할 운명을 타고났으며 지배종족의 이성과 예술이 구현되는 강자와 독립자에게 있어 종교란 저항을 억누르고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선악을 넘어서> §61)

그러나 이렇게 강자, 독립자, '미래의 철학자','자유정신'의 통제 아래 머물지 않고, 종교가 권력을 차지하고 스스로를 목적으로 제시할 때(ex. 사제가 금욕적 이상을 제시할 때),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종교가 철학자의 수중에서 교육과 교화의 수단으로 머물기를 원치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를 고집할 때, 그리고 그것이 수단이 아니라 스스로 궁극적인 목적이 되고자 할 때 사람들은 언제나 그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선악을 넘어서>,§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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