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호](연재) 종합적 사회과학자로서의 니체4: 니체와 언어학(中-1)-니체 대 비트겐슈타인-1

기고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3 14:31
조회
693
니체 대 비트겐슈타인-1

김상범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논리적 수정체와 같은 이상언어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거칠고 ‘마찰이 있는’ 일상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마찰이 없는, 그러니까 어떤 뜻에서는 그 조건이 이상적인,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또한 걸어갈 수도 없는 빙판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걸어가고자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대지로 돌아가자.”(<철학적 탐구>, §107)

그런데 이런 일상 언어를 기술하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메타언어가 필요하지 않을까?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철자법이 “철자법”이라는 낱말과도 관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제 2의 철자법을 요구하지는 않는 것처럼, 일상 언어를 기술하기 위해서 2차적 이상언어가 요청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 언어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애매하지만 친숙한 “고향”(<철학적 탐구>,§116) 과 같은 언어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자면 제 정신을 잃지 않기는 어렵다. 즉 우리는 일상적 사유물들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그릇된 길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철학적 탐구>, §106)

철학은 이처럼 일상적인 것과 친숙한 것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철학이 일상 언어를 변형시켜서는 안 되고 단지 그것을 기술해야 한다는(<철학적 탐구>, §124 참조)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인간의 언어적 창조력을 제한시킬 뿐만 아니라, 일상 언어 속에 침투한 이데올로기를 보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낳게 되지 않겠는가?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주장은 ‘언어적 보수주의’를 보여주는가?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체계/이념/과학으로서의 언어’로부터 ‘생활세계’의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은 일상 언어’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우선 '체계'를 이루지 않는, 즉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는' '고향'으로서의 일상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없다. 게다가 니체는 이렇게 친숙하고 일상적인 언어부터 의심해 들어간다. 니체는 우리가 제대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언어의 유혹’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일상언어의 문법을 니체는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반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문법적 틀에 따르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활동과 분리되는 문장의 주어로서 ‘주체’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번개를 그 섬광과 분리해서 섬광을 번개라는 주체의 활동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이 ‘미신적인’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법적 착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니체에 의하면 형이상학적인 사고방식이 바로 일상 언어의 문법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따라서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을 철저히 비판하고자 한다면 일상 언어의 문법 또한 비판되어야 하는 것이다. 니체의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음미해보자.

“ 인도, 그리스, 독일의 모든 철학적 사유 행위가 놀랄 정도로 가족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설명된다. 언어 유사성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는 공통된 문법에 힘입어...철학체계가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배열되도록 처음부터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도저히 피할 수 없다.”(<선악을 넘어서>, §20, 강조는 필자)

또한 철학적 개념은 언제나 다른 개념과의 관계의 체계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개념은 일상적인 언어를 포함하는 언어구조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일상적인 단어는 형이상학적 개념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어의 '형이상학적 사용'과 '일상적 사용'을 엄격하게 나눌 수도 없다. 언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할 때조차 그러한 단어에 대한 의미부여가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때묻지 않은 자연'이라는 표현은 '자연'과 '인공'을 대립시키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따라서 '본래적인' '고향'으로서의 일상언어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니체의 다음과 같은 언설은 형이상학 비판이 얼마나 일상 언어 비판과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군중도덕도 강자를 강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에서 분리하여, 마치 강함을 나타내거나 나타내지 않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어떤 중립적인 기체가 강자의 배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기체란 없다. 행동, 작용, 생성의 배후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 ‘행동자’란 행동에 그냥 상상으로 덧붙인 것이다.-행동이 전부인 것이다.

사람들은 번개가 번쩍하는 것을 보고 사실 행동을 중복시킨다. 이것은 행동의 행동으로, 같은 사건을 두고 한 번은 원인으로 보고 또 한 번은 그것의 결과로 보는 격이다. 자연과학자들이 “힘이 움직이게 하고, 힘이 무엇을 일으키는 원인이다”와 같은 말을 한다면, 그들은 사태를 보다 잘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과학은 대단히 냉정하고 냉담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언어의 유혹에 사로잡혀 있으며, ‘주체’라고 하는 슬쩍 바꿔치기 한 기형아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원자가 그런 기형아이고, 칸트의 ‘물 자체’도 마찬가지이다.)”(<도덕의 계보학>, 제 1논문 §13, 강조는 필자)

문법적 주어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은 행동, 작용, 생성의 배후에 ‘존재’를 가정하는 ‘실체의 형이상학’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실체의 형이상학’은 원자론과 ‘물 자체’의 형이상학등으로 나타난다. 또한 문장의 주어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은 작용자와 작용을 분리시켜서 하나를 원인으로 다른 하나를 결과로 만들어낸다. ‘힘’이 ‘힘의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원인으로 설정되는 것이 이러한 분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작용자와 작용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니체의 주장은 사실상 인과율이라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처럼 일상 언어의 문법은 ‘실체의 형이상학’과 ‘인과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들며, 따라서 형이상학은 일상 언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니체의 이러한 언설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보다 더 정교하고 철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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